넘겨 보는 설화 양달사와 장독골샘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5:39
영암설화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삼거리에 사방 2.5m, 길이 4m 가량의 샘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최근에 판 샘이고 양달사비 곁에 있는 샘이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불리는 장독골샘(장독걸샘)이다. 장독은 군대의 기(旗) 가운데 장군의 기를 말하는데, 장독골샘에는 영암 출신 양달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달사(梁達泗 1518~1555)는 영암이 자랑할 만한 의병장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을묘왜변 때 의병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더구나 시묘살이 가운데 의병을 모았다는 점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양달사의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도원(道源), 호는 남암(南岩)이다. 감역(監役)1)을 지낸 양흥효(梁興孝)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주부(主簿)2) 벼슬을 지낸 양승조(梁承祖)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아버지의 삼종(三從)3)인데, 그에게서 배웠다.

 

1) 조선 중기 이후 토목과 건축을 관리하였던 선공감(繕工監)의 종9품 관직.

2) 조선시대 돈녕부·봉상시·군자감·사역원·훈련원 등 30여 관아에 설치되었던 종6품 관직.

3) 8촌 형제. 종형제(從兄弟)는 4촌, 재종(再從)은 6촌 형제를 말한다.

양달사와 장독골샘-1.jpg

 

영암군 영암읍에 있는 장독걸샘 비와 양달사 공적비.

양달사는 1537년(중종 32)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546년(명종 1)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역임하였다. 1553년(명종 8)에 남해현감으로 부임하던 중 1555년(명종 10) 모친상을 당하여 영암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그 해 5월 11일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삼포왜란 이래 조선이 일본에 대한 세견선을 감축하고 교역량을 줄이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대마도 등지의 왜인들이 배 70여 척을 타고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達梁浦)4)에 상륙해 노략질을 한 것이다. 영암군수 이덕견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 기세등등해진 왜구들은 5월 하순까지 장흥·강진·진도 등을 짓밟으며 다시 영암으로 침입하였다.

달량포에 처음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만 하여도 양달사는 시묘살이를 더 중하게 여겨 꼼짝달싹 하지 않고 있었다.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달려와 왜구가 쳐들어왔다고 알리자 처음에는 난감한 표정을 짓던 양달사는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 묘를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래놓고도 마음에 걸렸는지 양달사는 부제학(副提學)5)으로 있던 사촌 동생 양서정에게 사람을 보내 상의하였다.

 

4)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5) 조선시대 홍문관과 그 전신이었던 집현전의 정3품 당상관직.

 

그러자 양서정이 답장을 보내왔다.

“충(忠)과 효(孝)가 드리지 않거늘 어찌 가만히 있으시렵니까? 지하에 계신 당숙모께서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던 중 왜구들이 다시 영암으로 진격해 온다 하자 양달사는 곧바로 형 양달수, 동생 양달해, 양달초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4형제가 나서서 의병을 모으자 순식간에 의병이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비록 형이 있었지만 현감을 지낸 양달사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대장으로 추대된 양달사가 형제들을 포함하여 몇몇 장사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하였다.

“우리가 비록 수백에 달하는 의병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저들을 유인하여 기습하는 작전을 펼쳤으면 하는데요.”

그러자 의병 가운데 한 명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적들이 아직 우리의 존재를 모르니 난장을 펼쳐 유인을 한 다음 기습을 하면 어떨까요?”

“난장을 펼칠 만한 사람들이 있을까요?”

“제 무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재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양달사 부대는 몇몇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화려한 옷을 입힌 뒤 서남리 삼거리에서 난장을 펼쳤다.

잠시 후 영암으로 진입해 오던 왜구들이 난 데 없는 난장을 보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매복하여 있던 의병들이 기습을 하여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계략으로 왜구를 물리치자 의병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열을 정비한 왜구들이 다시 몰려왔다. 그리하여 무려 사흘 동안 격전을 벌였지만 전투에 능한 왜구들과 급조된 의병의 차이가 역력하였다.

결국 양달사의 의병부대는 왜구들에게 포위가 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군량미와 마실 물마저 떨어져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장군! 식량도 식량이지만 당장 마실 물조차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기진 데다 목까지 마른 의병들은 사흘 동안의 격전 끝에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 여기저기 기대어 버티고 있었다.

그때였다. 양달사가 장독(將纛)을 높이 들고 크게 호령을 하더니 땅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쾅’ 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깃발을 꽂은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군사들은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사기가 충천하여 왜구들과 싸워 크게 이겼다.

그런데 도망친 줄 알았던 왜구들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양달사 장군이 계책을 내었다.

“그대들이 선봉에 서서 왜구들과 맞서 싸우는 척 하다가 퇴각을 하시오. 이쪽으로 도망치다가 신호가 가면 옆으로 빠지시오.”

양달사 장군은 난장을 벌였던 무리들을 내세워 유인책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의병들을 약속된 장소 곳곳에 매복을 시켰다.

양달사의 작전대로 왜구들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쫓아왔다. 그러나 양달사가 지정한 장소에 이르러 의병들이 한쪽으로 빠지자 무작정 쫓아오던 왜구들이 한순간 주춤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곳은 양달사 장군이 장독을 내리꽂아 물이 펑펑 쏟아졌던 곳이었다. 마침 그곳은 진흙땅이었는데 물이 계속 나오는 바람에 질척질척한 땅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뛰어든 왜구들이 진흙땅에 발이 묶이어 움직임이 둔해진 순간 여기저기에 매복하여 있던 의병들이 뛰어나와 왜구를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선봉에 서서 싸우던 양달사 장군은 왜구의 칼에 팔을 다쳐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왜구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몇 명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을 쳤다. 그때부터 양달사 장군이 만든 샘을 장독골샘이라 불렀다.

 

비록 영암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쳤지만 상을 당한 사람이 전쟁에 나가 피를 흘린 것을 부끄러워하여 양달사 장군은 자신의 공을 관군에 돌리고 어머니 묘소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에 부상당한 곳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바람에 창독(瘡毒)에 걸려 그만 죽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에 1555년(명종 10) 12월 2일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의 원벽(院壁)에 시를 써 붙였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장흥 사람들은 부모의 상사를 당한 듯하니

한공의 정치하는 방책이 어짊을 알겠네.

구원하지 않았으니 광주 목사의 살점을 씹고 싶고,

곧바로 도망간 수사의 몸뚱이는 찢어야 마땅하네.

성을 버린 홍언성은 먼저 참형해야 하며,

진을 비운 최인도 그 죄가 똑같네.

원수는 금성에서 부질없이 물러나 움츠렸고,

절도사는 중도에서 일부러 머뭇거렸네.

감사는 어째서 계책을 도모하는 데 어두웠으며,

방어사는 어찌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겁게 여겼는가.

품계가 올라간 이윤은 진정한 장수이지만,

자급을 뛰어넘은 변협은 바로 간사한 신하이네.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가고,

의리 없는 유충정이 강진에 부임했네.

평소 국록을 먹을 때에 모두 거짓을 꾸몄는데,

오늘날 위태함을 당하여 문득 실상이 드러나네.

멋대로 날뛰는 왜적을 누가 대적할 수 있으랴.

공사간에 모두 불태워 없앴으니 생민들이 곤궁하네.

상벌은 법이 없어 공도가 무너졌으니,

실망하여 탄식하는 임금의 수치는 씻을 길 없네.

행객이 다만 들은 대로

벽에다 써붙여서 지나는 사람을 흥기시키려 하네.

 

【한공(韓公)은 한온(韓蘊)을 지칭한 것이고, 광목(光牧)은 이희손(李希孫)이다. 수사(水使)는 김빈(金贇)이며, 원수(元帥)는 이준경(李浚慶)이고, 절도사(節度使)는 조안국(趙安國)이며, 감사(監司)는 김주(金澍)이고, 방어사(防禦使)는 남치근(南致勤)이며, 이윤(李尹)은 전주부윤(全州府尹)인 이윤경(李潤慶)이다. 변협(邊協)은 해남(海南)을 보전했기에 장흥부사(長興府使)에 초수(超授)되었으나 그의 공이 아니었으며, 양달사(梁達泗)는 영암을 지킨 공이 있는데 발탁하여 기용하지 않았으며, 유충정(柳忠貞)은 본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였기 때문에 그 평이 이와 같은 것이다.】

 

양달사 장군이 사망한 100년 만인 현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6)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추증되었다.

 

6) 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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