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이량 장군과 장군도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08
여수설화

여수 종고산(鐘鼓山)은 해발 200m의 삼각형 산으로 여수시의 맥을 이루는 산이다. 옛날 이곳에는 보효대 (報效臺)가 있었는데,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두던 날 종고산 쪽에서 종소리 같기도 하고 북소리 같기도 한 은은한 소리가 3일 동안이나 났다 하여 이순신 장군이 이 산을 종고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한 여수는 세 마리의 용이 어울려 여의주와 같은 장군도를 두고 다투는 형국이라고 설명한다. 그 첫 번째 용이 건너편에 보이는 종(鐘鼓山)을 때리는 타봉(打棒)처럼 생긴 대교동의 예암산(隸岩山)이요, 두 번째 용이 돌산도, 세 번째 용이 경호도(鏡湖島)라 한다. 이 가운데 경호도는 비룡(飛龍)으로 비유되고 있으나 고려 때 서울에서 귀양 온 사람들이 살았다 하여 경도(京島) 또는 경호도(京湖島)라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 때 경호(鏡湖)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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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여의주라 불리는 장군도.

여의주에 해당하는 장군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600m에 불과하지만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고기 낚시도 꽤 되기 때문에 유명하다. 하지만 벚꽃은 1914년 일본인들이 우리의 민족정신을 억누르기 위하여 심었다고 한다. 장군도 동편과 돌산 북편 사이에 수중 석성을 쌓아 적선의 접근을 방어하여 왜구의 침범을 근절시켰다. 수중 석성을 쌓은 사람이 바로 이량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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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도와 주변 지형(다음 스카이뷰)

이량(李良 ?~?) 장군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건장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1479년 여진족을 상대로 한 건주전투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14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삭주부사·회령부사·의주목사를 지냈다.

1497년 고흥에 왜구가 쳐들어 와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왜구를 막을 적임자로 이량을 추천하여 녹도(鹿島)만호로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량은 부임하자마자 왜구를 대파하였다.

그 공으로 당상관 품계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진됨과 동시에 일약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친상을 당하여 올라가게 되었는데 다시 이량을 전라좌수사로 보냈다.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본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임금의 신임과 왜구의 침탈로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이량 장군은 고민에 고민을 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량 장군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여수 앞바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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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할 때는 욕지도-남해도-돌산으로 이어지는 섬을 따라 우리 군대를 피하였다. 특히 그들은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따라서 장군도와 돌산 사이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구가 침범하면 잡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며칠 동안 그 형세를 살피던 장군은 바다의 깊이와 넓이를 재어보았다. 그리고는 부하들을 시켜 배로 돌을 운반하게 하더니 각각의 지점에 장군의 지시대로 일정한 양의 돌을 붓게 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은 괜한 일을 시킨다며 불평불만이 많았다. 그러한 분위기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장군은 묵묵히 일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 가운데 한 명이 소리쳤다.

“장군, 바닷물 흐름이 달라졌습니다!”

정말이었다. 그 빠르던 물살이 이제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였다. 이제 군선이 아니라 조그마한 어선도 그 지점을 통과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장군은 오며가며 그 위에 돌을 던져 넣어라 지시하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니 돌은 많아지고 물은 얕아져서 큰 배들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넣고 또 넣으니 만조 때에도 돌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간조 때가 되면 마치 성곽을 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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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도와 연결된 수중 석성. 간조 때가 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쪽 뒤에 보이는 것이 종고산이다.

수종 석성을 쌓은 후 처음으로 쳐들어온 왜구가 예전처럼 그 길로 지나가려다 곤욕을 치렀다. 배가 바위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였던 것이다. 왜구들은 마치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곳을 넘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섬의 이름을 ‘장군도’라 불렀다. 장군도에 있는 석성은 국내 유일의 수중 석성이며, 장군도에는 ‘장군도’라고 음각된 돌이 있다.

이량 장군은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후 처음으로 부임한 최초의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이순신 장군보다 111년 전에 부임하였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643년 그의 5세손 이배원이 이량 장군 방왜축제비(防倭築堤碑)를 세웠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710년 8세손 이삼(李森)이 다시 수사로 와서 중건하였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 이 내용은 여수문화원장을 지낸 故 문정인 선생님이 채록한 내용에서 기본 뼈대를 삼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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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량 장군 방왜축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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