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봉황의 정기를 타고난 최산두
864년(신라 경문왕 4년) 희양현(지금의 광양)에 흉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러자 희양현감이 도선국사를 모셔왔다. 신라 말기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로 잘 알려진 도선국사는 옥룡사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물리치고 희양현에 평화를 가져왔다.
어느 날 도선국사가 현감에게 백운산의 삼정(三精)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곳 희양현은 백운산의 정기가 얼마만큼 잘 뻗어나가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달라질 것입니다. 특히 백운산에는 세 가지 정기가 서려 있는데...”
도선국사가 세 가지 정기를 이야기하자 현감이 마른 침을 삼키며 바짝 다가앉았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인가요?”
“그 하나는 봉황의 정기요, 다른 하나는 여우의 정기이며, 마지막이 돼지의 정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기라는 것이...”
봉황과 여우와 돼지의 정기가 서려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현감이 어정쩡하게 되물었다.
“그 세 가지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 태어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것은 알 수 없지요. 때가 정해진 것이 아니요, 장소가 정해진 것도 아니랍니다. 천지인(天地人)의 조화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몇 백 년 후일지 아니면 천 년, 이천 년 후일지, 아니면 영원히 태어나지 않을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482년(성종 13년) 백운산 기슭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을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렸다 하여 아이의 이름을 산두(山斗)라 지었다고 한다.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백운산 봉황의 정기를 타고 났다는 이가 바로 최산두다. 그래서 그의 위패를 모신 광양읍 우산리 사원의 이름도 봉양사(鳳陽祠)다.
최산두는 여덟 살 어린 나이에 10년 공부를 계획하고 옥룡면 동곡리 바위굴에 들어갔다. 그러나 8년째 되는 어느 날 더 이상의 공부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위굴을 나왔다. 바위굴을 나오면서 백운산을 바라보며 감흥을 시로 읊었다.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 태산이 뒤를 누르니 북쪽 하늘이 없다.”
그런데 너무 감흥에 겨웠는지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초립동이 나타나더니 댓구를 하였다.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 대해를 앞에 당하니 남쪽 땅이 없다.”
그리고는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자극받은 최산두는 다시 바위굴로 들어가 10년을 채운 뒤 하산하였다.
그때 최산두가 가지고 들어간 책이 <주자강목>이었다. 80권에 달하는 <주자강목>을 가지고 바위굴로 다시 들어가 2년 동안 기거하면서 천 번을 통독하였다 하니 당시의 결의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최산두가 10년 공부를 완성하고 바위굴을 나오면서 바위굴이 있는 절벽에 ‘학사대(學士臺)’라 크게 새겼는데, 그래서 이곳을 학사대라 부른다.

10년 공부를 마치고 나온 최산두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멀리 죽림리에 있는 훈장 선생님께 배움을 청하였다.
집이 가난하였기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옥룡 운평리에서 서당이 있는 죽림리 숲골 마을까지 5리 남짓 되는 거리를 오가며 공부를 하였다. 그 중간에 목동이라는 재가 있는데, 이 재가 험한데다가 덕발마저 있어서 어른들도 혼자 넘기를 무서워했다. 덕발은 사람이 죽으면 그냥 묻지 않고 송장 든 관을 놔두기 위해 만든 움막을 말한다. 송장에서 물이 쭉 빠지고 나면 그때야 매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덕발이 있는 곳은 그 고을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산두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밤낮으로 거기를 넘나들었다.

최산두 선생이 10년 공부를 했다는 바위굴 근처에 세워진 학사대(學士臺).
어느 날 밤 서당에 가는데 도중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다. 무서웠지만 그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덕발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덕발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건너편 덕발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이 인자 나가세.”
사람 소리 같기도 하고 귀신 소리 같기도 한데 빗소리가 커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최산두가 있는 덕발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에는 귀한 손님이 오셔서 갈 수가 없네.”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람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귀신이 분명하였다. 그런데도 어린 최산두는 놀라지도 않고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귀한 손님이 누구신가?”
“한림학사께서 오셨네.”
그 소리를 듣고 최산두는 ‘아하, 내가 장차 한림학사가 되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최산두는 날마다 이 재를 넘어다녔다. 어느 날 밤 어여쁜 처녀 하나가 나와서 유혹을 하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다짜고짜 최산두에게 입을 맞추려고까지 하였다. 공부에 집중하고자 결심이 굳은 최산두가 처녀를 뿌리쳤다. 그런데도 처녀는 매일 밤 나타나 최산두를 유혹하였다.
거절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밤 아리따운 처녀가 유혹을 하자 최산두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점차 글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유혹하는 처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열심이던 최산두가 공부에 집중을 못하자 훈장 선생님이 눈치를 채셨다. 어느 날 훈장 선생님이 최산두를 불러 추궁을 하였다.
“요즘 부쩍 집중을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연유가 있느냐?”
그러자 거짓말을 못하는 최산두가 훈장 선생님께 사실대로 고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훈장 선생님이 씩 웃더니 최산두에게 일러주었다.
“한 동안 뜸 하더니 나타난 것을 보니 산두 네가 인물이긴 인물인가 보구나. 그 처녀는 실은 구미호란다. 계속 거절하다가는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못 이기는 척 유혹을 받아주도록 해라. 구미호의 입에 구슬이 있을 것이다. 너에게 입을 맞출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삼켜버려라. 그러면 구미호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훈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글공부를 그만 둘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최산두는 다음날도 어김없이 재를 넘었다. 그랬더니 처녀가 다시 나타났다. 훈장 선생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유혹에 넘어가는 것처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처녀가 입맞춤을 하는데 구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순식간에 빨아들여 삼켜버렸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름다운 처녀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로 변하더니 크게 울며 멀리 사라져버렸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그 동안 많은 사람의 기를 빼앗아 구슬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최산두에게 빼앗겨버렸으니 기가 모두 빠져버린 것이다. 구슬을 삼킨 최산두는 더욱 더 총명해졌다.
호남 유림의 거목 최산두
최산두(1482~1536). 호는 신재(新齋). 그의 부친은 한성판윤에 추증된 한영(漢榮)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 여덟 살 때부터 시를 지어 보이는 등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학사대에서 10년 공부를 마친 후 잠시 서당에 다니던 최산두 선생은 훈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18세에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조광조·김정·김안국 등과 교유하니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洛中君子)’라 하였다.
22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년)에 진사가 되어 25세에서 30세 되던 해까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 명성을 듣고 김인후·유희춘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
31세 되던 해인 1513년(중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 홍문관저작, 1516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의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최산두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 혁신정치에 뜻을 같이 하여 기존의 집권세력인 훈구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았다.

최산두 선생의 영정.
37세 되던 기묘년(1519년)에 당시 의정부 사인(舍人 정4품)으로 있던 최산두는 화순 동복에 유배된다. 그의 유배 기간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학문을 교류하였다. 특히 인종 때 대학자였던 김인후가 최산두를 찾아와 배우는 등 후학 교육에도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배당한지 15년째 되던 1533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의 유배 기간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1520년), 부인인 이천 서씨가 죽었으며(1527년), 1534년에는 어머니 청주 한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급기야 최산두 역시 그 2년 후인 1536년에 54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 하고 만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윤구와 함께 ‘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재집(新齋集)’이 있다.
그가 죽은 뒤인 1578년, 지금의 광양읍 우산리에 봉양사가 세워져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화순 동복에도 도원서원(道源書院)이 세워져 사액되었다. 묘소는 봉강면 부저리에 있다.
후인들이 최산두 선생을 추모해 바위에 ‘학사대 백류동’이라고 글씨를 새긴 바위굴 내부는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넓이다. 굴 안에는 한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우물이 있으며, 바위굴 밖에는 기암괴석이 노송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최산두 선생이 배향되어 있는 화순 동복의 도원서원

최산두 선생이 배향되어 있는 광양읍 우산리 봉양사.

봉양사 입구에 있는 최산두 선생의 유허비.

봉강면 부저리에 있는 최산두 선생의 묘.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