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살인을 부르는 엽전
조선시대 때 보성군 벌교읍 어느 마을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제법 농사를 짓는 편이어서 살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소를 몇 마리 키워서 가끔 목돈을 손에 쥐는 재미로 살았다.
어느 날, 조씨가 소를 팔러 장터에 가려는데 큰아들이 따라 나섰다. 이제 큰아들 나이도 열여섯이니 세상 물정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조씨는 아들을 데리고 소시장으로 갔다. 여기저기 장터 구경도 시켜주고 흥정하는 것도 지켜보게 하였는데, 조씨도 결국 소를 팔게 되었다. 조씨는 소 판 돈의 일부를 아들한테 줬다.
“이제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 이 돈으로 어찌 할 지 궁리를 해 보거라.”
그렇게 해서 각자 소 판 돈을 옆구리에 차고 돌아왔다. 그런데 벌교로 넘어오는 재를 지나는 길에 아들 뒤를 따라가던 아버지한테 갑자기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을 죽여버리면 저 돈이 다 내 것인데...’
그래서 앞서가는 아들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쳤다. 정신을 차린 조씨가 흠칫 놀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뒤를 돌아보던 아들이 묻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아버지는 아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더니 전대를 풀어 아들을 주며 말했다.
“애야, 이 돈도 네가 가지고 가도록 해라. 나이가 드니 엽전 뭉치조차 무겁구나.”
돈 때문에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조씨는 돈을 아들에게 다 넘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이까짓 돈뭉치가 뭐가 무겁다고 그러세요? 아버지도 참.”
엽전 뭉치가 무겁다는 아버지를 아들이 쳐다보며 피식 웃고는 아버지 전대마저 허리춤에 찼다. 그렇게 한참을 앞서가던 아들의 눈빛이 갑자기 묘해졌다. 그러더니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여버리면 이 돈을 내가 다 차지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살짝 뒤를 돌아본다는 것이 그만 아버지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자 아들 역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찜찜했는지 조씨가 아들에게 일렀다.
“애야. 저 건너 가서 술 한 말 받아 와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술 심부름을 시키자 아들이 되물었다.
“술요? 갑자기 술은 뭐 하시려고요?”
“우리 동네 사람들 좀 불러야 쓰겄다.”
“아니, 이 밤중에 갑자기 왜 그러세요?”
“소를 팔았으니 한 턱 내야할 것 아니냐?”
아무리 소를 팔았다 한들 이 밤중에 막걸리를 사서 집안 어르신들을 부른단 말인가. 보성 장에 다녀오느라 힘든데 도착하자마 또 심부름을 시키니 귀찮을 법 하였지만 아들은 집에 오기 전 흉측한 생각을 했던 까닭에 두말 하지 않고 심부름을 다녀왔다.
그렇게 해서 막걸리 한 말을 받아다가 동네 사람들을 죄다 불렀다. 옛날에는 집성촌이 대부분이어서 한 동네에 문중 사람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밤중에 사람을 부르자 다들 의아해 하면서 조씨 집으로 모였다.
소를 팔아서 한 턱 낸다 하니 비록 늦은 밤이기는 하지만 다들 기분 좋게 마시는데 아무래도 조씨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있느냐 물어도 대답이 없던 조씨가 술이 한 잔 들어가 얼굴이 불콰해지자 속생각을 털어놓았다.
“아니, 세상에 소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아들놈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내가 나이가 들어서 망령이 난 것이지.”

그러더니 느닷없이 잠자고 있던 아들 둘까지 부르더니 문중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였다.
“아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 놈이니 더 이상 살아서 뭐 하겠소.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니, 집하고 논은 큰아들 니가 가지고, 산하고 밭은 작은 아들 니가 가지고, 재 너머 전답은 문중에서 알아서 관리하시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큰아들이 깜짝 놀라 만류하며 물었다.
“아이고, 아버지.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아까 돌아올 때 니가 돈을 갖고 오는데 니를 죽이고 싶더라.”
그러자 아들도 그때서야 털어놓았다.
“사실 저도 아버지가 돈을 가지고 오실 때 그런 생각이 듭디다.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그 말을 듣고 있던 마을 어르신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아 그러면 필경 돈에가 뭔 조화가 붙은 것 아녀?”
그래서 소 판 돈을 전부 가지고 와서 불빛에다 비쳐보니까 엽전 가운데 하나에 검붉은 자국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피 묻은 돈이 틀림없었다. 그러자 아까 그 어르신이 다시 이야기하였다.
“봐. 분명 이 엽전이 조화를 부린 것이여. 이 피 묻은 돈이 살인을 부르는 돈이 틀림없다니까?”
“아니 어르신,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멀리 내다버려야지. 누구도 이 엽전을 보지도 못하게 동구 밖에다 깊이 묻어버리는 것이 좋겠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길로 피 묻은 엽전을 가지고 동구 밖 멀리 가서 깊숙이 묻어버렸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어느 해,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마을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집도 많이 들어선 데다 길도 대부분 넓혀져서 마을의 면모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다.
동구 밖에서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다.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 가운데 한 명이 땅을 파다가 신기하게 생긴 것을 발견하였다.
“어? 이게 뭐지?”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아이가 잽싸게 빼앗더니 소리쳤다.
“이거 엽전 아냐? 옛날 돈 같은데?”
돈이라는 말을 하자 엽전을 처음 발견한 아이가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자 엽전을 손에 쥔 아이가 깔깔깔 웃으며 멀찌감치 달아나버렸다. 엽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신이 나서 돌아오던 아이의 눈에 동네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그러자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이 묘하게 변하였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 이 이야기는 순천대학교 총장을 지낸 故 최덕원 선생님께서 채록한 설화에서 기본 뼈대를 취하였음을 밝힙니다.)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