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하룻밤 사랑과 원혼

한국설화연구소
2024-12-18 14:44
고흥설화

천안 사는 남양 홍씨 집에 늦둥이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였던 막내는 과거에 급제하리라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모는 물론이요 온 집안에서 막내를 애지중지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말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 점차 가족들조차 홍 도령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꿈을 잠시 접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정처 없이 길을 걷던 홍 도령의 발길이 멀리 전라도 고흥 땅에 이르렀다.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은 수려했지만 몰골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먼 길을 그렇게 걸어왔으니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홍 도령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되었다. 점점이 보이는 섬들, 파란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들 하며 그야말로 잡념을 잊게 하는 데는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과거에 얽매어 살아온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난생 처음 아름답고 상쾌한 풍경에 도취된 홍 도령이 마침내 풍남이라고 하는 포구에 이르렀다.

그때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퍼붓는 바람에 홍 도령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 전까지의 감흥은 온 데 간 데 없고, 비에 젖은 초라한 몰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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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둘러보니 멀리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 저편에 작은 초가 한 채가 보였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홍 도령은 단숨에 언덕을 넘어 초가집까지 내달렸다. 양반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길을 가던 중 갑자기 비를 만나 잠시 비를 좀 피하려고 하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양해를 구하는 것인지 통보를 하는 것인지 홍 도령은 말을 꺼내자마자 마루에 걸쳐 앉아 비를 피하였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뭐라 하고는 마루에 걸쳐 앉자 방문이 열렸다. 바느질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인 여자가 내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한눈에 보아도 거지 행색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여인이 말을 하였다.

“먼 길을 가시는 모양인데 걱정 마시고 비가 그칠 때까지 잠시 쉬어 가십시오.”

자태도 고왔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더욱 고왔다. 이런 시골집에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목소리는 청아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하고 외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 하였다.

여인의 말을 들은 홍 도령은 가슴속에 뭔가 이상한 것이 뭉클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더니 점차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하였다.

“식구들은 모두 어디 가셨습니까?”

어색함을 떨치려 느닷없이 질문을 해놓고도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더욱 화끈거렸다.

“다른 식구는 아무도 없고 오직 저 혼자 있사옵니다.”

그나마 대꾸를 해주니 화끈거리는 것이 덜 하였다. 그런데 홀로 지낸다니 홍 도령의 가슴은 다시 더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마루 끝에 앉았지만 그래도 빗방울이 들치는지라 홍 도령의 얼굴에는 연신 빗물이 흘러내렸다. 비록 행색은 초라하였지만 빗물에 씻긴 얼굴은 준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힐끔 홍 도령을 쳐다본 여인이 수건을 내주며 마루로 올라오라고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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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불구하고 마루로 올라온 홍 도령이 수건으로 빗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것 참 안 됐습니다. 어찌 홀로 되신 것입니까?”

빗물을 닦아내는 홍 도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이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여인은 지난 이야기를 술술 끄집어냈다.

여인의 성은 임씨였다. 어릴 적부터 마을은 물론 온 고을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그래서 인근 총각들이 다들 임 여인을 탐냈다고 한다. 딸이 미모로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임 여인의 부모는 딸을 일찌감치 시집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풍남에 사는 평범한 어부에게 시집을 간 임 여인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남편을 잃고 만다. 뱃일을 나갔다가 그만 풍랑에 배가 침몰하여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임 여인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는 세상만사가 귀찮아졌다. 그래서 인적이 뜸한 외딴 대밭 가운데 초가집을 짓고 홀로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홍 도령은 임 여인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임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며 하늘이 준 인연이라 스스로 생각하였다.

금세 그칠 것 같던 소나기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비가 그치기는커녕 점차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음속으로는 뭔가 기대를 하면서도 홍 도령은 겉으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이거 참 큰일 났네. 갈 길은 먼데 비는 그치지를 않으니.”

홍 도령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임 여인에게는 그 말이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임 여인 입장에서도 홍 도령이 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는 더 거세게 오고 날은 어두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인 홀로 지내는 집에 남정네를 묵어가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비 오는 밤길을 나서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만 같았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추하지만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임 여인의 말에 홍 도령이 순간 반색을 하다가 다시 난처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다.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로 작심하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남녀가 유별한데 한 방에서 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을 나설 수도 없으니 정말 난처합니다.”

홍 도령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임 여인이 방을 치우기 시작하였다. 방을 치우고 나서 임 여인이 홍 도령에게 방으로 들어오라 권하였다.

“염려마세요. 저는 부엌에서 자도 되니 도령께서는 어서 방으로 드십시오.”

그러자 홍 도령이 펄쩍 뛰었다.

“주인을 내쫓고 어찌 객이 방을 차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부엌에서 자겠습니다. 이렇게 신세를 끼쳐서 대단히 송구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가 부엌에서 잔다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한방에서 같이 자기로 하였다. 홍 도령은 아랫목에서 임 여인은 윗목에서 자기로 한 것이다. 사실 서로에게 이미 끌린 두 사람이 체면 때문에 옥신각신하였지 처음부터 두 사람 다 한 방에서 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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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잠자리에 들었지만 홍 도령은 물론 임 여인도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을 설칠수록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더욱 세차게 들려왔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홍 도령의 귀에 갑자기 가냘픈 한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임 여인의 한숨소리가 틀림없었다.

순간 홍 총각의 가슴이 후들거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정에 이끌려 살며시 손을 뻗어 임 여인의 손을 잡았다.

분위기로 보건데 말없이 이끌릴 것으로 알았는데 임 여인이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망측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내침 김에 홍 도령은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부인, 저는 부인을 보고 첫눈에 설레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소. 제발 저를 거부하지 말아주시오. 우연히 만나 신세를 지는 처지이지만 이것 또한 큰 인연이라 생각하오. 저는 총각이니 저와 부부의 연을 맺어주시오.”

홍 도령의 목소리는 떨리고 가슴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일어나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임 여인의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누운 채로 말을 건넸다.

“부부의 연이라니요. 그런 농담 마십시오. 어찌 총각의 몸으로 불행한 과부를 아내로 맞겠다는 것입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단호하였다. 그런데도 임 여인 역시 일어나 홍 도령을 쫓아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녀 역시 누운 채로 홍 도령의 말에 대꾸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총각은 꼭 처녀와 혼인해야 한다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수절할 것을 결심한 지 오랩니다. 더구나 저 때문에 구만 리 같은 도령의 앞길을 막아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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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하면서도 약간의 여운을 남기는 임 여인의 말에 홍 도령의 몸은 바짝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여인의 마음 역시 흔들리는 것 같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어붙여보자.’

생각이 이에 미치자 홍 도령은 덥석 여인을 안았다. 임 여인은 저항을 하는 것 같았지만 완강하지는 않았다. 아니 된다는 말만 하지 몸은 이미 홍 도령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자 홍 도령이 임 여인의 귓볼에 대고 속삭였다.

“하늘을 두고 나의 사랑을 맹세하오. 장부 일언은 중천금이라고 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다.”

임 여인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슬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절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 슬픔이었다면,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는 여인의 기쁨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결심을 한 듯 임 여인이 홍 도령에게 물었다.

“분명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옵니까?”

“그렇소. 하늘이 무너져도 결코 변하지 않겠소.”

홍 도령의 단호한 대답에 임 여인은 눈물을 멈추더니 홍 도령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말하였다.

“만일 저를 버리면 이 몸은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말려 죽일 것이오.”

장난스런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임 여인은 홍 도령에게 다짐 또 다짐을 받고 싶은 것이었다.

“공연한 걱정을 하십니다. 날이 새면 즉시 고향에 가서 혼인 차비를 해가지고 올 것이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홍 도령과 임 여인은 밤새 만리장성을 쌓았다.

날을 꼬박 샌 홍 도령은 오전 내내 임 여인의 품에 안겨 잠을 자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길을 떠났다. 1년 동안 내릴 비가 밤새 다 내린 탓인지 하늘은 맑기만 하였다.

천안까지 다녀와야 하니 혼인 준비하는 시간 등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돌아온다고 약속하였다. 비록 하룻밤의 인연이었지만 홍 도령을 떠나보내는 임 여인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산 남편을 떠나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홍 도령이 떠나면서까지 임 여인을 안심시켰다.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꽃가마를 가지고 모시러 오겠소.”

홍 총각이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임 여인의 마음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더니 급기야 해가 바뀌었다. 홍 도령의 소식은 점점 아득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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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려도 흘려도 끝이 없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기다렸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배신을 당하였다는 생각에 때로는 증오의 불길이 일면서도, 그래도 돌아오기만 하면 얼른 뛰어가서 안기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결국 배신감과 상사병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운 임 여인은 홍 도령과 만난 지 꼭 1년이 되던 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온 홍 도령은 부모님께 임 여인과 혼인을 하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크게 혼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무작정 반대만 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홍 도령의 부모는 과거에 급제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노라는 말로 달랬다. 그래서 홍 도령은 과거 공부만 열심히 하였다. 그렇게 글공부에 여념이 없던 홍 도령은 이내 임 여인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운이 좋았는지 이듬해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양가의 규수를 맞아 장가까지 든 데다 아들 딸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던 차에 홍 도령이 함평현감으로 부임했다. 함평현감으로 부임해서도 가까운 고흥 땅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현감이 술에 취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이상한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깨어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방으로 기어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구, 구렁이가. 게 누구 없느냐? 빨리 저 구렁이를 때려잡아라!”

아닌 밤중에 현감의 호령소리가 나자 당직 중이던 사령들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려고 해도 현감의 침실 방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몽둥이로 문을 부수려 했지만 모두들 손에 쥐가 내려 몽둥이를 놓치고 말았다.

“이놈들! 무엇하고 있느냐? 빨리 저 구렁이를 때려잡지 못할까? 아악!”

현감은 말을 미처 마치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현감의 몸뚱이를 구렁이가 칭칭 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숨이 막혀왔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구렁이가 머리를 치켜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구렁이의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모르겠소?”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구렁이가 말을 하다니, 게다가 자기를 모르겠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신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다가 상사병으로 죽었소. 맹세를 저버리면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죽이겠다는 그날 밤의 언약을 잊었구려.”

구렁이의 목소리는 바로 고흥 땅에서 하룻밤을 같이 한 임 여인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러더니 구렁이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 내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구나.’

현감은 총각 시절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탄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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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밤만 되면 그 구렁이가 현감의 침실로 찾아왔다. 물론 새벽녘이 되면 온 데 간 데 없이 구렁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밤마다 구렁이에게 몸을 칭칭 감긴 채 날을 새야 하는 현감의 삶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병자처럼 몸이 말라만 갔다. 용하다는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한다 야단법석이었지만 그래도 구렁이는 밤마다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스님 한분이 길을 가다 함평 관아에 들렀다. 현감의 사정을 들은 노스님은 임 여인이 살았던 초가집을 헐고 아담한 암자를 지은 후 크게 위령제를 올리라고 알려주었다. 노스님의 가르침대로 현감은 임 여인이 살던 풍남 땅 초가집 자리에 암자를 짓고 위령제를 정성껏 모셨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구렁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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