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지리산의 여신 마야고

한국설화연구소
2024-12-17 10:29
구례설화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는 예로부터 많은 신령들이 살았다. 그 가운데 반야(般若)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여신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불교에서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또는 팔리어 ‘빤냐’를 음역한 낱말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지혜(智慧)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반야는 지혜로운 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에는 많은 여신들이 있었는데, 여신 가운데 마야고(麻耶姑)라는 여신이 있었다. 마야고는 옥황상제가 ‘지리산을 수호하라’는 명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지리산 성모(聖母) 마고할미의 딸이었다.

어느 날 세석평전에서 놀던 마야고가 고약하기로 소문난 남신 몇 명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마고할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터라 예쁘장한 마야고를 남신들 몇이 둘러싸고 희롱을 하였던 것이다. 마야고가 막 마고할미의 도움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남신들을 저지하였다. 반야였다.

“이 무슨 짓들이오! 성스러운 지리산에서 여인을 희롱하다니!”

반야가 나타나 개입을 하자 남신들이 반야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끼어드는 게냐? 너부터 혼나고 싶은 게냐?”

남신들이 반야를 향해 다가가자 마야고가 소리쳤다.

“그만 두세요! 그만 두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런 마야고를 바라보며 남신들이 희죽거렸다. 반야부터 처치하고 나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막상 나서기는 하였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을 상대하려니 반야도 어찌 할 바를 몰라 멈칫거렸다. 그러다 마야고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남신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순식간에 반야가 돌진을 하자 남신들이 당황하더니 이내 반야를 내동댕이쳤다. 그런 반야를 보며 마야고가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쇳소리같은 소리가 허공을 가르더니 사위가 캄캄해졌다. 다들 깜짝 놀라 주춤하는 사이 하얀 옷을 펄렁거리며 누군가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성모 마고할미였다.

“누가 내 딸을 괴롭히는 게냐!”

나지막하지만 귀청을 울리는 소리였다.

마고할미가 나타나자 남신들은 언제 사라진 줄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반야는 처음 보는 마고할미를 보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마고할미가 제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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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시오. 보아하니 반듯한 청년인데 의협심까지 있구려. 내 딸 마야고를 위해 나서 주다니 어미로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마야고?’

저 여인이 마야고라는 말인가? 마고할미의 딸 마야고? 남신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한 마야고를 직접 보게 되다니. 반야는 마야고라는 말에 연신 마야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까는 경황 중에 제대로 보지 못하였는데 역시 소문대로 예쁜 얼굴이었다.

“내 기회가 되면 오늘의 일에 감사하는 차원에서 그대를 한 번 초대하리다.”

마고할미는 반야에게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하면서 초대하리라는 기약을 남긴 채 마야고를 안고 멀리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반야와 마야고는 서로 뭐라 말 한 마디 붙여볼 틈도 없었다.

그날 이후 마야고는 반야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야는 달랐다. 마야고가 생각날 때면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애써 생각을 지워버리려 하였다.

사실 반야는 옥황상제의 아들이었다. 일이 있어 지리산으로 내려온 아들에게 옥황상제가 신신당부를 하였다.

“네가 다시 나를 보려거든 깨끗해야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을 더럽힌다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명심하도록 해라.”

그러니 반야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마야고를 생각하자니 하늘나라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자니 마야고가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 결국 반야는 마야고를 잊기로 하였다.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마야고에게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에 마야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반야를 생각하는 마야고의 마음은 갈수록 강해졌다. 더구나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반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산 위에 있는 샘물을 마실 때였다. 샘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숙이던 마야고가 흠칫 놀라 일어섰다. 샘물에 반야의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샘물을 마시기는커녕 마야고는 샘가에 앉아 반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목이 메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마야고가 마고할미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난 번 그 사람을 초대한다더니 언제 할 거예요?”

그런 마야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고할미가 무심한 눈빛으로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초대하려 하였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구나. 옥황상제께 올려 보낼 약재를 채취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누구든 남녀 간의 만남을 금하고 있단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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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야고는 그런 저런 사정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야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더 이상 가다가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지경이었다. 그러자 마고할미가 딸의 딱한 처지가 안타까워 넌지시 알려주었다.

“옥황상제께 간절히 빌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제석봉에 올라가 빌어보렴.”

반야를 그리는 사모의 정을 참을 수 없었던 마야고는 제석봉에 올라 단을 쌓고 옥황상제께 치성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기도 끝에 기진맥진해진 마야고가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말하였다. 옥황상제였다.

“내 너의 정성이 갸륵하여 특별히 만남을 허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느니라. 억새로 옷을 만들어 그 옷을 반야에게 주면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옥황상제의 허락이 있었던 것이다. 언제 기진맥진했느냐 싶을 정도로 마야고는 벌떡 일어나 제석봉 아래로 달려갔다. 억새가 많은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억새를 한 아름 꺾어온 마야고는 그날부터 반야의 옷을 짓기 시작하였다. 옷을 짓는 내내 마야고는 반야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그 사이 반야에게도 옥황상제의 음성이 들렸다.

‘억새로 만든 옷을 입게 된다면 내 너의 특별한 만남을 허용해 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올 때 그녀와 반드시 함께 와야 한다.’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은 반야는 펄쩍 뛸 듯이 기뻤다. 내색도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마야고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함께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옥황상제의 이야기를 엿들은 사람이 있었다. 마고할미였다. 마고할미는 반야와 마야고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였지만 막상 마야고가 반야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드디어 옷이 완성되었다. 옷을 만들 때는 몰랐는데 막상 옷을 완성하고 보니 걱정이 생겼다. 반야를 어떻게 만날 것인지, 그리고 만나더라도 옷을 어떻게 전해줄 것인지 암담하였기 때문이다.

반야에게 옷을 전해줄 기회를 찾지 못해 마음만 태우고 있던 마야고에게 마고할미가 다가왔다.

“애야. 반야를 만날 일 때문에 고민이니? 며칠 후 보름날 밤에 내가 알려준 곳으로 가면 반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반야에게로 가서 마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며칠 후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마야고는 마고할미가 알려준 지리산 중턱에 앉아 억새옷을 품에 안고는 반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꿈에도 기다리던 반야가 저쪽에서 손짓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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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고는 반야의 옷을 든 채 반야를 향해 달려갔다. 달리는 마야고 위로 꽃잎이 바람에 나부껴 흩뿌려졌다. 흩뿌려진 꽃잎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너무도 황홀한 장면이었다.

이내 반야에게 다가간 마야고가 덥석 안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반야는 보이지 않고, 쇠별꽃(나도개미자리과의 다년생 풀. 줄기가 연약하여 땅에 눕고, 흰 판화가 여러 꽃대에서 피어난다)들만 달빛 아래서 바람에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반야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쇠별꽃의 흐느적거림을 반야가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야고는 너무나 실망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없이 울었다.

사실은 마야고와 생이별을 하게 된 마고할미가 반야와 마야고를 속였던 것이다. 서로에게 다른 장소를 알려주고 허탕을 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반야는 마야고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하늘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마야고는 쇠별꽃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는 자신을 속인 쇠별꽃이 다시는 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정성껏 지어 두었던 반야의 옷도 갈기갈기 찢어서 숲 속 여기저기에 흩날려 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춰보던 산상의 연못도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찢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아났는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天王峰 높이 1915m)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반야봉(般若峰 지리산의 제2봉. 높이 1734m)은 마야고가 늘 바라보며 반야를 생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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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와 마야고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는 쇠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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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의 옷이 되살아난 지리산 풍란.

또, 마야고가 메워 버렸다는 연못은 누군가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山姬)샘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야고의 한과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하여 고려 때 천왕봉에 사당을 세우고 여신상을 모셨는데 일제 때 한 왜병이 군도로 그 코와 귀를 잘라 버리려다가 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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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반야봉. 마야고와 관련된 슬픈 전설이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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