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한해방죽의 슬픈 사연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축두마을은 지리적으로 해상 방비의 요충지로, 관방이 설치되어 입출항하는 선박을 감시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몽중산 아래에 있다 하여 몽중이라 불렀는데, 몽중산의 형세가 소의 모습과 같고, 마을이 소 머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축두(丑頭)라 하였다. 축두마을에 저수지가 하나 있다. 지금은 축두저수지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한해방죽이라 불렀다. 축두저수지의 옛 이름이 한해방죽인 것은 방죽을 쌓을 때 스스로를 희생한 한해라는 이름의 스님 때문이다. 기록에는 1937년 축조되었다고 하나 옛날부터 있었던 방죽을 현대식으로 축조한 것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축두저수지 전경. 마을 단위 저수지 가운데 꽤 큰 편에 속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축두마을에 갑자기 가뭄이 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뜩이나 살림이 피폐한데 가뭄까지 겹쳐 마을사람들은 살 길이 막막하였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대책회의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외지에 나가 식량을 구해오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해산물로 당분간 버티자는 주장도 제기하였다. 그때 마을 청년 가운데 한명이 저수지를 확장하자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친 김에 방죽을 높여 저수지를 크게 확장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원로 가운데 한 분이 곧바로 맞받아쳤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방죽을 쌓는다고? 누가 쌓을 건데? 자네 혼자 쌓을 건가?”
원로의 이야기에 흔들린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지만 청년은 차분하게 어른들을 설득 하였다.
“당장 힘든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내년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일수록 이를 악물고 대책을 세워야지 나중에 우리 후손들도 덕을 볼 것 아니겠어요?”
청년의 끈질긴 설득에 마을사람들이 점차 수긍하기 시작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식량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마을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동원되어 방죽을 높이는 작업에 나섰다.
가을에 시작한 방죽 공사가 겨울이 다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이제 비만 오면 된다. 겨울에 비가 내려 저수지에 물이 어느 정도 차자 마을사람들은 뿌듯하였다. 가을에 땀 흘린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봄에 겨우 모내기를 하고 비를 기다렸다. 마을사람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정말 비가 내렸다. 이제 풍년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마을사람들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비가 계속해서 내리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처럼 마을사람들의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튼튼하게 쌓은 방죽이 보름 가까이 내린 장마로 불어난 물 때문에 한순간에 터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차라리 가뭄이 더 나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거대한 방죽 너머 저수지 가득한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축두마을은 물난리가 나고 말았다. 겨우 몸을 피한 마을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임진왜란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고 말했다.
방죽을 쌓자고 제안한 청년만 졸지에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괜히 방죽을 쌓자고 바람을 잡아서 마을사람들 생고생만 시키고, 괜한 물난리를 불러왔다는 것이었다.
물난리가 겨우 수습이 되자 마을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방죽을 다시 쌓자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쫓겨날 걱정까지 하였던 청년은 의외의 반응에 오히려 깜짝 놀랐다.
어차피 농한기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방죽을 더욱 튼튼하게 쌓아서 제 아무리 장마가 지더라도 끄떡없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역시 처음 제안하였던 청년이 앞장서서 바로 방죽 재건에 나섰다. 다소 힘이 들더라도 기초부터 커다란 돌멩이를 가득 채우고, 그 위에 흙으로 꼼꼼하게 채워나갔다.
이번에는 겨울이 다 되어서야 방죽이 완성되었다. 누가 봐도 예전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보였다. 예전과는 달리 방죽 한쪽 끝에 수문을 만들어, 물이 일정 수위 이상 차면 방류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니 비가 많이 오더라도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었다.
축두마을 사람들에게 봄이 그토록 기다려지기는 처음이었다. 매서운 추위가 꼬리를 감춘 곳에 봄이 피어오르고 마을에서는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하늘에 구멍이 나서 물을 쏟아 붓더라도 끄떡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다시 여름을 기다렸다.
드디어 여름이 시작되고 어김없이 장마가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가뭄 걱정에 무더운 여름이 길고 길었는데, 이제는 가뭄 걱정은 온 데 간 데 없고 비가와도 방죽이 견뎌낼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장마가 열흘을 넘어가는데도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방죽은 정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멈춘 것 같았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물이 저수지에 가득 차기 시작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수문을 열기 위해 서둘러 방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방죽 위로 오르려 하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일더니 방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급하게 몸을 피했기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2년 연속 공들여 쌓은 방죽이 무너지고 말자 마을은 온통 초상집 분위기였다. 누구보다 청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잘해보자고 나선 것이 도리어 곤란한 입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너진 방죽 근처에서 침울하게 앉아 있던 청년에게 젊은 스님 한 명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청년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시주께서는 무슨 일로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갑작스런 스님의 등장에 청년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딱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하소연 하는 투로 스님에게 저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청년의 말을 듣고 나더니 스님이 한참을 뭔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더니 청년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소승을 이곳에 빠뜨리고 제방을 다시 쌓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제방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무심코 듣던 청년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일어섰다.
“아니, 스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스님을 빠뜨리다니요? 아무리 방죽을 쌓고자 한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청년은 스님이 농을 던진 줄 알고 화를 냈다. 그러나 스님의 표정 그 어디에서도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청년이 다시 물었다.
“스님,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우리 마을을 위해 희생하신단 말입니까?”
“연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그렇게 하십시오. 방죽을 만들 때 소승을 희생시키면 방죽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청년이 마을로 돌아가서 원로들에게 스님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자 전부터 청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어른 한 사람이 청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를 버럭 냈다.
“자네가 이젠 실성을 한 것인가? 자네 때문에 마을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는데, 뭐? 이제는 스님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고?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야?”
그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스님이 나타났다. 스님은 마을 원로들에게 인사를 하더니 청년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소승은 한해라고 합니다. 방죽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저를 희생시켜야 합니다. 소승이 희생되어 마을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 할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스님이 떠난 후 마을 원로들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스님을 희생시키면 방죽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런다 할지라도 어찌 사람을 희생시켜 방죽을 완성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달리 방도가 없기에 사람들은 속는 셈 치고 방죽을 다시 쌓기로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방죽의 기초를 다지고 있는데 예의 그 스님이 나타났다. 설마 했는데 정말 스님이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고민을 하기도 전에 스님이 바위를 쌓아놓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릴 틈조차도 없었다. 스님이 스스로를 희생시킨 후 마을사람들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방죽을 완성시키자고 의견이 모아져 결국 스님의 주검 위로 방죽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후로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방죽은 끄떡없었다.
남해 용왕에게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연로한 용왕은 막내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다. 그래서 막내의 나이가 열 살이 넘도록 항상 곁에 끼고 지냈다.
어느 날 우연히 인간 세상에 구경 나온 한해는 인간 세상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용궁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나갔다. 용왕도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런 막내가 하는 일이라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재미에 푹 빠진 한해가 사람으로 변하여 지내다 용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한해는 축두마을에 있는 방죽에 기거하였다. 사람이 되어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반드시 사흘에 한번은 물속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스님으로 변하여 돌아다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방죽에서 기거하였다.
그런 막내를 그리워하던 용왕은 마을사람들이 방죽을 높게 쌓아 한해가 자유롭게 지내게 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방죽을 쌓기만 하면 허물어버린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한해가 자신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고통을 받자 자신이 돌아갈 테니 방죽을 무너뜨리지 말아달라고 용왕에게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결국 축두마을 사람들을 위해 희생을 한 후에 한해는 다시 용왕의 아들로 돌아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두마을 저수지를 한해방죽이라 부르는 것이다 ♠
한해 스님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 오는 한해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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