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수석 손 부사와 호호
세계적인 수석박물관을 준비중인 진돗개 전도왕 박병선 집사가 소장하고 있는 수석 가운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문양석이 적지 않다. 이 가운데 일부를 설화와 엮어 소개한다.
1244년(고려 고종 31년) 승평(순천)의 한 저잣거리. 동갑내기 호호와 미미가 장 구경을 나왔다. 우연히 호호가 어떤 사내와 부딪혔는데, 그 일로 미미와 그 사내가 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말을 탄 관리가 사내를 제지하였다.
다음날 승평 부사 집무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상의를 하고 있다. 어제 저잣거리에 나타났던 말을 탄 그 사람이다.
손억(1214~1259). 개경에서 태어난 손억은 무신의 난, 몽골의 침략 등 내우외환의 혼란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나주 출신 유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지만 이번 부임길에는 시종 뭉치만 데리고 혼자 내려왔다.
당시에는 지방 관아에 수령이 새로 부임하면 고을 유지들을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직 중앙권력이 지방에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세 징발을 제대로 하려면 각 고을 유지들의 협조가 절실하였던 것이다.
연회 1 (승무)
(가로28㎝×높이21㎝×폭9㎝, 중국)
관아 별관에서 열린 연회 자리. 그런데 별장을 지낸 허민이라는 원로가 강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조세 징발 독려 이야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주부 벼슬을 지낸 바 있는 황윤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악사들이 들어와 한 바탕 풍악을 울리고 나니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이 하나씩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거의 자리가 정리될 즈음에 뒤늦게 호호가 들어왔다.
풍악 (거문고)
(가로23㎝×높이23㎝×폭7㎝, 중국)
눈치 빠른 황 주부가 그녀를 손 부사 곁에 앉혔다. 손 부사 왼쪽 옆에는 이미 호호의 친구 미미가 앉아 있었다. 호호가 손 부사 오른쪽 옆에 앉자 미미의 미간이 일순 찌푸려졌다.
그날 이후 미미와 호호는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기생이라 할지라도 남자만 잘 만나면 팔자가 바뀌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돈이나 권력만 있으면 면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미미가 손 부사에게 집착할 만하였다.
사실 호호와 미미는 둘 다 승평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미모를 지녔다. 그래서 호호와 미미를 보려고 인근 관아의 수령들까지도 툭 하면 승평에 들러 일부러 연회 자리를 만들곤 하였다.
며칠 뒤 연자루에서 다시 연회가 열렸다. 지난번에 제대로 하지 못한 연회를 열게 된 것이다. 연회가 열리는 내내 손 부사의 눈길은 호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한 낌새를 눈치 빠른 황 주부가 놓칠 리 없었다.
어느 날 황 주부가 아침 일찍 부사를 찾았다. 막 조회를 마치고 집무실에 들어서던 손 부사에게 황 주부가 조세 징발과 관련하여 의논드릴 것이 있다며 용산에서 보자 하였다. 조세 징발과 관련된 황 주부의 협조가 절실하였던 터라 손 부사도 흔쾌히 응하였다.
순천만 용산. 황 주부가 뭔가 은밀한 제안을 할 것이라 생각한 손 부사는 아전 명길과 시종 뭉치만을 대동하고 용산에 올랐다. 그런데 저만치에 황 주부와 함께 호호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손 부사의 눈동자가 용산을 담을 만큼 커졌다.
돗자리를 깔아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서로가 말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황 주부는 잠시 조세 징발과 관련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황 주부가 짱뚱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황 주부가 짱뚱어 요리를 구하러 가자며 명길과 뭉치를 데리고는 자리를 떴다.
순천만 짱뚱어
(가로23㎝×높이24㎝×폭12㎝, 중국)
황 주부 일행이 사라진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 부사의 시중을 드느라 곁에 바짝 붙어 있다가 황 주부가 자리를 뜨는 바람에 둘만 나란히 앉아 있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떨어져 앉자니 그것 또한 어색할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둘 다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가 상대를 보고 다시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포옹하였다. 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였다.
포옹
(가로27㎝×높이38㎝×폭14㎝, 중국)
손 부사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며 호호의 옷고름을 풀려는 순간 호호가 다급하게 손 부사를 저지하였다. 정신이 번쩍 든 듯 손 부사가 호호에게서 떨어지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런데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두 사람이 옷매무새를 고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황 주부 일행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용산을 다녀온 후 호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미미가 신경이 쓰이는지 눈치를 보곤 하였다. 호호를 알게 된 뒤 저렇게 밝은 모습은 처음이다. 그래서 미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어느 날 오후, 늦을 지도 모른다며 나간 미미가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미미가 없는 것이 편했는지 호호는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호호의 방에 침입하여 다짜고짜 호호를 겁탈하려 하였다.
미미의 친오라비인 영수였다. 저잣거리 철물가게에서 노비로 일하고 있는 영수는 오래 전부터 동생 친구인 호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호호와 사또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차에 미미의 사주를 받고 호호를 범하려 한 것이다.
희롱당하는 여인
(가로15㎝×높이22㎝×폭7㎝, 중국)
호호가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이내 슬피 울자 영수가 불에 데인 듯 갑자기 몸을 떼었다. 그러더니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는 한 동안 특별한 일이 없이 지나갔다. 조세 징발 문제도 무난하게 진행되고 해서 손 부사 역시 골치 아플 일도 없었다. 가끔 호호를 동반하고 나들이를 다녔는데 남들 눈도 있고 해서 뭉치만 멀리서 수행시킨 채 인근 명소들을 다녀왔다.
그러던 어느 날 손 부사 부인이 개경에서 내려왔다. 친정인 나주에 볼 일이 있어 다니는 길에 이곳 승평에 들른 것이다.
호호는 유씨 부인이 몹시 궁금하였다. 궁금하기는 유씨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유씨 부인이 뭉치를 시켜 호호를 불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유씨 부인이 부른다는 말에 호호는 잔뜩 긴장을 하였다.
호호를 이모저모 뜯어보던 유씨 부인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단아한 미모도 미모였지만 호호의 머리에 묶여 있는 노란 댕기 때문이었다. 손 부사가 선물한 것이 분명하였다. 노란 댕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유씨 부인이 호호에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다.
며칠 뒤 관사에 괴한이 침입하여 유씨 부인을 해하려다 도망갔는데 마침 순찰 중이던 나졸들에게 붙잡혔다. 영수였다. 동헌에서 영수를 신문하려 하자 영수는 사또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다 하였다.
영수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며칠 전 유씨 부인에게 혼이 난 호호가 자신에게 찾아왔는데, 마님께 겁을 줘서 개경으로 돌아가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 부사는 부인을 불러 없던 일로 하자고 이야기하였다. 호호를 불러 혼을 낸 부인을 영수가 해꼬지 하려 했던 것인데, 소문이 나면 부인이 투기를 하였다는 소문이 날 것이고 자신에게도 불이익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씨 부인이 손 부사에게 앞으로는 더 이상 호호를 만나지 말 것을 전제로 없던 일로 하기로 하였다. 손 부사가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말하자 유씨 부인도 더 이상은 어찌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잠시 후 호호가 손 부사를 찾아가서 영수를 선처해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순간 손 부사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고 며칠 동안 손 부사는 호호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부인과의 약조도 약조였지만 호호와 영수의 관계에 대한 오해가 더 컸다. 호호가 영수를 껴안고 있다가 손 부사를 돌아보고 씨익 웃는 꿈을 꾸기도 하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고민하는 여인
(가로19㎝×높이26㎝×폭10㎝, 중국)
며칠 후 유씨 부인이 개경으로 돌아가자 다음날 호호가 곧 바로 손 부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호호의 얼굴은 창백해지다 못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였다.
호호가 손 부사 문제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즈음 강화에서 감사가 내려왔다. 경향각지를 돌아다니며 조세 징발을 독려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감사가 오면 뇌물은 물론이요 각종 향응을 베푸는 것이 관례처럼 이뤄졌다.
승평부에서도 어김없이 연자루에서 환영 연회가 마련되었다. 연회만 열리면 호호가 손 부사의 옆 자리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멈칫거리고 있다. 손 부사 왼쪽 옆에는 여느 때처럼 미미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손 부사가 호호에게 감사를 접대하라 일렀다.
감사라는 사람을 보니 한눈에 봐도 탐욕스럽게 생겼다. 연회가 무르익어 가자 감사라는 사람이 호호를 희롱하기 시작하였다. 호호가 애원하듯 손 부사를 쳐다보았는데 무심코 호호를 바라보고 있던 손 부사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손 부사가 외면하자 감사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더니 아예 호호의 젖가슴을 만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호호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감사의 얼굴에 술잔을 끼얹고 뛰쳐나간 것이다.
연자루 연회 사건 이후로 호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삶의 의욕을 잃은 듯 시선마저 불확실하였다.
어느 날 해질 무렵 용산 자락에 호호가 앉아있었다. 언제 보아도 용산의 일몰은 아름답다. 하지만 오늘 따라 해그름판 용산의 낙조는 슬퍼보였다. 마치 호호의 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시뻘건 불덩어리가 까만 산등성이 너머로 지고 있었다.
순천만 일몰
(가로26㎝×높이20㎝×폭11㎝, 중국)
갑자기 호호가 일어나 낭떠러지로 다가갔다. 우는 듯 웃는 듯 흐느끼며 호호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호호를 나꿔챘다. 영수였다. 요 며칠 호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자나 깨나 호호를 뒤따라 다녔던 것이다.
다음날, 영수는 손 부사를 찾아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미가 손부사와 호호를 갈라놓기 위해 자신을 사주하여 유씨 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하였고, 그 죄를 호호에게 뒤집어씌우게 했다는 것이다. 영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손 부사의 표정이 계속 변하였다.
계속해서 영수는 호호가 부사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용산에서 몸을 던지려 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런 호호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용산에 비가 내리면 세상이 모두 깨끗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티끌 하나 없이 씻어 내리려는 듯 장대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보슬비로 바뀌었다. 보슬비 내리는 용산에 손 부사와 호호가 마주 서 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호호는 용산에서 보자는 손 부사의 전갈을 받고 나왔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손 부사가 사과를 하자 호호는 깜짝 놀랐다. 더구나 손 부사는 미안한 마음에 호호를 면천시켜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뒤범벅 상태에서 호호는 손 부사에게 안겼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서로의 가슴으로 느껴지는 심장소리만이 진심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용산에서 하나가 되었다.
어느 해 초파일에 손 부사와 함께 수선사(지금의 송광사)를 다녀오던 호호는 능주(지금의 화순) 쌍봉사 주지에게 봉변을 당하였다.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인 만전이었다. 만전은 말이 승려지 능주 일대에서 갖은 악행을 일삼는 무뢰배나 마찬가지였다. 호호를 희롱하던 만전이 알 수 없는 야릇한 웃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며칠 후 연자루 위에서 만전 일행이 술판을 벌였다. 만전이 일행을 시켜 호호와 가장 가깝다는 미미를 불렀다. 미미에게서 호호가 면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만전은 미미에게도 면천을 시켜준다는 제안을 하였다. 장차 고려의 1인자가 될 수도 있을 만전의 약속에 미미는 잔뜩 고무되었다.
만전의 술병
(가로23㎝×높이31㎝×폭18㎝, 중국)
다음 날에도 역시 대낮부터 연자루 위에서 만전 일행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호호가 연자루로 올라갔다. 미미가 거짓으로 호호를 불러낸 것이다. 만전이 장정들을 시켜 호호를 술상 앞에 무릎을 꿇리더니 술을 따르게 하였다. 하지만 호호가 술을 따르지 않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만전이 호호를 덮쳤다.
그때 어디선가 손 부사가 나타나 한 달음에 연자루로 오르더니 호호로부터 만전을 떼어놓았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만전의 수하들도 어찌해 볼 틈이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만 3년이 되자 손 부사가 강화로 올라가게 되었다. 전시인지라 부임을 한다 해도 가족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손 부사는 다시 돌아오마 약속만 남긴 채 강화로 떠났다.
손 부사가 강화로 떠난 후 호호는 고지(古旨)마을(지금의 순천 가곡동)에 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지냈다.
고지마을 초가집
(가로34㎝×높이16㎝×폭7㎝, 영월)
그해 겨울 어느 날 미미가 찾아왔다. 미미 역시 면천되어 양민의 신분이었다. 지난 여름 만전의 사주를 받고 호호를 함정에 빠뜨렸던 미미는 그 이후로 만전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미미가 다녀간 며칠 후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만전이 고지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무뢰배들을 이끌고 나타난 만전은 호호를 겁탈하려 하였다. 그러나 호호가 죽기로 저항하자 뜻을 이루지 못한 만전이 일어섰다.
비록 원나라의 말발굽 아래 강토가 침탈당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녀자를 겁탈한 경우 잡히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제 아무리 만전이라 해도 공공연하게 부녀자를 겁탈할 수는 없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던 만전이 언젠가부터 발길이 끊겼다. 병세가 심해진 최우가 후계를 이을 목적으로 둘째인 만전을 환속시켜 강화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호호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화에 있는 손 부사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미가 다시 호호의 처소에 찾아왔다. 만삭이었다.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막상 미미의 사정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호호는 일단 미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교정별감이 부른다는 말에 손억은 서둘러 교정도감으로 갔다. 승평부사를 지낸 손억은 진작 정4품 벼슬인 시랑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직까지도 정5품 관직인 이부낭중에 머물러 있었다. 만전의 장난 때문이었다. 이름조차 최항으로 바꾼 만전은 최우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 권력자인 교정별감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 최항이 손억을 부른 것이다.
최항에게 수모를 당하고 오는 길에 김준이 손억을 불렀다. 그는 최충헌의 노비인 윤성의 아들로 태어나 박송비의 추천으로 최우에게 발탁되었다. 그 뒤 최항(만전)이 최우의 후계가 되는데 공을 세워 정7품 별장이 되었다.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훌쩍 10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호호를 잊지 못해 죽고 싶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지자 눈코 뜰 새 없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호호 생각도 갈수록 덜 나게 되었다. 이제는 세월 속에 빛바랜 그림처럼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얼굴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히던 최항이 죽자 손억도 족쇄가 풀렸다.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흉년이 계속되어 민심이 동요하였다. 이에 김준이 삼별초를 앞세워 최의를 죽임으로써 최씨 정권을 타도하고 왕권을 회복시켰다. 이 공으로 김준은 벼슬이 수직 상승하여 정3품인 우부승선이 되었다. 김준 덕분에 손억의 벼슬도 정4품인 이부시랑으로 올랐다.
김준에게 부탁하여 손억은 전라 감사가 되었다. 개경에 잠시 들러 가족들과 회포를 푼 손억은 곧바로 전라도로 향하였다.
승평에 도착하자 문득 손 감사는 10여 년 전 용산에서 호호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추억에 사로잡혔다. 꿈길처럼 아련한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손 감사가 도착하자 승평부사가 연자루에서 환영 연회를 마련하였다. 남문 밖 연자루에 오르니 호호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연자루
(가로45㎝×높이45㎝×폭18㎝, 영월)
그때 곁에 있던 늙은 아전 한 명이 그를 기억하고는 말을 붙였다. 아전은 마치 호호를 추억하는 손억의 심중을 꿰뚫는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자세히 보니 명길이었다. 명길로부터 호호 소식을 들은 손 감사는 서둘러 호호를 데려오게 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다 허튼 말이었다. 10년 만에 오르는 용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은 사람이었다. 한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낙조만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손 감사는 애써 변명하려 들지 않았고 호호 역시 애써 물으려 하지 않았다. 용산은 그냥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손억은 그 동안의 무정함을 사과하고 같이 올라가자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호호는 끝내 사양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 올라가고 싶었지만 자신으로 인해 혹시라도 낭군이 곤란해질까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만전이 죽었다는 사실을 호호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 감사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접한 미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호가 끝내 손 감사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미미의 속내는 단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 성주가 들어왔다. 미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들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감사가 떠난다고 하자 연자루에서 연회가 벌어졌다.
연회 2 (상모돌리기)
(가로18㎝×높이20㎝×폭9㎝, 중국)
그런데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 미미가 손 감사를 찾아왔다. 그러더니 길 저편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호호의 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호호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저 아이를 위해서라도 호호를 그냥 내버려두라 하였다. 손 감사는 그 아이가 만전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이라 생각하였다.
함께 떠나자는 자신의 제안을 호호가 거절한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 생각한 손 감사는 마지막으로 호호를 만나보고자 미미에게 호호의 처소를 물었다. 그러자 미미가 고지마을을 알려주고는 곧바로 아들에게 무언가 이르더니 고지마을로 떠나보냈다.
호호가 빨래를 널고 있는데 미미의 아들 성주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한참을 숨을 고르던 성주가 호호에게 손 감사가 온다며 몸을 피하라 이야기하였다. 함께 가자는 제안을 거절하였더니 여기까지 온다는 것인가? 호호는 손 부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손 부사 일행이 호호의 집에 도착하였다. 호호의 처소로 들어서던 손 감사가 성주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호호가 어디 멀리 다니러 간 줄 알고 기다릴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빨랫줄에 널린 빨래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 손 감사가 발길을 돌렸다.
이듬해 가을, 손억은 급병을 얻어 병석에 누웠다. 감사를 마치고 강화로 돌아가자마자 원나라의 마지막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무리를 하였는지 그만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병을 얻은 손억은 김준의 배려로 개경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 요양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경에 돌아온 손억은 병석에 누워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의원의 말로는 얼마 버티기 힘들 것이라 하였다.
숨지기 직전 손 감사가 뭉치를 불러 뭔가를 쥐어주었다. 노란 비녀였다. 그러더니 뭉치의 귀에 대고 마지막 힘을 다해 몇 마디 하였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미미가 호호의 집에 찾아갔다. 그러더니 손 감사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손 감사가 죽었다는데도 호호가 별 다른 반응이 없자 미미가 일어서서 나가며 쐐기를 박듯 한 마디 남긴다.
“너 때문이래...”
미미로부터 손 부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호호는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 며칠 후 자리를 털고 있어난 호호가 용산에 올라 한참을 허공을 향해 울부짖더니 이내 몸을 던졌다.
순천만 용산
(가로19㎝×높이29㎝×폭9㎝, 중국)
호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미미는 처음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하였다. 자책하면 할수록 어렸을 때 호호와 보냈던 꿈같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질투에 눈이 멀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느 날 오후, 호호가 올랐던 길을 미미가 올랐다. 호호가 몸을 던졌을 곳에 다가가서 미미는 호호를 불렀다. 그 소리가 메아리쳐 다시 미미의 귓볼을 울렸다.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를 저승길로 내몬 자신에 대해 자책하면서 미미 역시 호호를 따라 몸을 던졌다. 미미의 손에는 노란 비녀가 쥐어져 있었다.
이후 순천만에는 해마다 8~9월이면 칠면초와 퉁퉁마디가 꽃을 피운다. 칠면초는 나서 질 때까지 일곱 가지 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칠면초라 한다. 퉁퉁마디는 함초라고도 하는데, 여름까지는 줄기와 가지가 진한 녹색이었다가 흑두루미가 오는 가을이 되면 부끄러운지 빨갛게 단풍이 든다.
순천만 갯벌
(가로37㎝×높이30㎝×폭12㎝, 영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희로애락을 한 몸에 간직한 호호가 칠면초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산에서 몸을 던진 호호의 넋이 칠면초로 환생하였다는 것이다. 퉁퉁마디 역시 호호와 절친하였던 미미가 환생한 것이라 한다. 비록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기는 하였지만 죽어서라도 함께 하고자 퉁퉁마디는 항상 칠면초 군락지 근처에 자생한다.
순천만 칠면초
(가로32㎝×높이33㎝×폭13㎝, 영월)
해마다 10월 하순이면 칠면초와 퉁퉁마디 꽃이 진 후 흑두루미가 멀리서 날아와 칠면초를 희롱하는데, 흑두루미는 손억 부사가 환생한 것이라 한다.
순천만 흑두루미
(가로20㎝×높이15㎝×폭9㎝, 중국)
손 부사와 호호는 살아서도 엇갈린 운명이었는데,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슬픈 운명인 셈이다 ♠
2015년 2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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