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진도 뽕할머니 전설

진도 고군면 회동리에 있는 뽕할머니상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에는 뽕할머니상이 있다. 뽕할머니상은 회동과 모도 사이 바닷길이 열리는 회동 바닷가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뽕할머니는 진도군에서 열리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의 주신이다. 이곳은 한국판 ‘모세의 기적’, ‘신비의 바닷길’로 명명되어 널리 이름난 곳이다.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를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2.8km 정도의 길이다. 폭은 30m 내외로 회동리와 모도리가 물 밖에서 신비로운 해후를 하는 곳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일 년에 몇 차례 일어나며 음력 2월말쯤 펼쳐진다.
조선 초기인 1480년 경, 손동지(孫洞知)라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제법 잘 나가던 그는 정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지는 한양에서 가장 멀다는 제주도였다.
그런데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풍파를 만나 타고 가던 배가 표류하게 되었다. 그러다 호동(지금의 회동마을) 앞바다에 밀려와 호송하던 나졸들은 물론 선원들까지 모두 다 죽고 손동지만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라 여긴 손동지는 그곳에 정착하여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냐 물어도 손동지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바다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뻔하였다가 새로 얻은 목숨인데 고향이 무슨 소용이며 직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갈 뿐이지요.”
마을사람들은 그런 손동지가 측은하였는지 먹을 것이며 입을 것 등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런데 겪으면 겪을수록 손동지가 예사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마을 아이들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속는 셈치고 맡겨보았는데 그에게 배운 마을아이들이 잇달아 초시에 급제하는 것이 아닌가. 급기야 마을사람들이 아예 서당을 차려주었고 손동지는 졸지에 훈장이 되었다.
손 훈장 소문이 퍼지자 인근에서 자기 아이들을 가르쳐달라고 보내는 바람에 호동마을 서당은 점차 줄을 서야 입학할 수 있는 명문이 되었다.
그러다 손동지는 인근 마을에 사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뒤 손동지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호동마을은 점차 커다란 마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호동(虎洞)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손동지가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이 마을에는 호환이 끊이질 않아 아예 마을 이름마저 호랑이 동네(호동)라 이름 지었던 것이다.
2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조선 중기, 호동마을에 뽕할머니가 살았다. 누에를 많이 쳐서 뽕할머니라 부른 것인지 방귀를 많이 뀌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진도군 군내면 누에 농가에서 음력 2월 초하룻날 아침 떡을 해서 솔가리(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 같은 것으로 장식하고 누에 형상을 만든 후 그것을 집 안의 벽에 걸어놓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을 누에떡걸기라 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진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잠업이 성행하였을 것으로 보이기에 뽕할머니는 아무래도 누에를 많이 쳤던 분이라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날, 호동마을에 호환이 심해지면서 가축은 둘째 치고 사람 목숨까지 위험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은 잠시 바다 건너 모도(茅島)라는 섬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급히 도망을 가는 바람에 그만 뽕할머니 혼자만 마을에 남게 되었다. 아마 누에를 치다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혼자 남겨진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 용왕님께 기원하였다.
“용왕님, 제발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렇다고 가족들이 저를 구하기 위해 다시 마을에 나타나지는 않게 해주세요. 저 혼자는 호랑이 밥이 되어도 상관없지만 가족들은 무사하게 해주세요.”
밤낮 없이 빌고 또 빌던 뽕할머니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용왕님이 나타났다.
“내일 무지개를 바다 위에 내릴 것이니 바다를 건너가라.”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뽕할머니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용왕님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일찍부터 뽕할머니가 모도와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기도를 하였다. 그러자 해가 뜨기 직전 호동의 뿔치와 모도의 뿔치 사이에 무지개처럼 바닷길이 나타났다.
바닷길이 열리자 모도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뽕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호동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몇날 며칠을 밤을 새며 기도를 한 탓인지 뽕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기진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뽕할머니 영정. 진도 출신 동양화가 옥전 강지주 화백이 그렸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뽕할머니의 소망이 바닷길을 드러내게 하였고, 모도에서 다시 돌아 왔다하여 호동(虎洞)마을 이름을 회동(回洞)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한 진도 군민들은 뽕할머니가 신령이 되어 올라갔다고 해서 영등(靈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비의 바닷길. 1975년 주한프랑스 대사가 진도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신문에 ‘모세의 기적’이라고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바닷길이 열리는 이곳에서 풍어와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고 회동과 모도 사람들이 바닷길 현장에서 서로 만나 바지락, 낙지 등을 잡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오던 풍습이 축제로 승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는 자식이 없는 사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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