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박물관에서 한창기의 숨결을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생전의 한창기 선생
<사진제공: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순천 낙안읍성 매표소를 끼고 왼쪽으로 100여m 가다보면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하 ‘뿌리깊은박물관’)이 있다. 뿌리깊은박물관은 벌교 출신인 한창기(韓彰璂 1936~1997) 선생이 평생 모은 유물 6,500여 점이 전시 보존돼 있다.
박물관은 전시동과 한옥, 그리고 야외전시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해마다 2회 기획전시를 개통해 한창기 선생이 남긴 방대한 유물을 주제별로 공개하고 있다.
한옥은 단소 명인 김무규(1908~1994) 선생의 생가로, 구례군 구례읍 산성리 절골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 여성들이 기거하던 안채, 노부모를 위한 별채,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 등 여덟 채로 전형적인 한옥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창기 선생은 낡음과 투박한 것에서 문화를 찾고자 했다. 월간 <설화와 인물>은 출판계의 거목이신 한창기 선생을 보다 널리 알리고자 고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평생 모은 유물 박물관에 기증
한창기 선생은 벌교출신 언론인으로 한글 전용 및 가로쓰기를 주장했고,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에도 앞장서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1997년 운명을 달리한다. 생전에 유언집행인들을 지명해 둔 탓에 유언집행인 4인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한창기 선생의 사후대책을 논의했다. 문화계의 저명한 인사들과 갑론을박을 거듭한 끝에 (재)뿌리깊은나무를 설립한다. 박물관과 출판사업의 병행 여부 등 진로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한창기 선생이 ‘내가 죽으면 <샘이깊은물>은 땅에 묻을 수밖에 없겠지?’라고 자주 언급했던 방향으로 결정지어진다. 즉 출판업은 한창기 선생이 없으면 책이 변질될 수 있으니 폐간을 결정하고, 선생의 소장품은 개인이나 민간단체가 아닌 공공기관에 맡겨 공익성을 확보하자고 최종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순천시립 뿌리깊은박물관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 한창기, 그는 누구인가?
한창기 선생은 광주고교를 거쳐 1957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로가 법조계가 아님을 깨닫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8군 영내에서 미군들에게 귀국용 비행기 표와 영어 성경책을 팔았다. 미국사람들에게 영업을 하고, 한국사람들에게 영문 백과사전을 판매하느라 그의 영어 실력은 당시 한국 최고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오죽하였으면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험프리로부터 “내가 만난 동양인 중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란 극찬을 받았겠는가. 그는 미국 브리태니커사에서 한국에 영문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급하는 권리를 받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1970년 사장이 되었다. 그 때부터 1985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한국 직판업 제1세대의 전설적인 수장으로 추앙받았다.

<사진제공 :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최초로 한글전용, 가로쓰기 시행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사업적인 성취가 순조롭던 1970년대에 들어 그는 기존 잡지와는 전혀 다른 문화잡지의 창간 구상에 골몰한 끝에 1976년 <뿌리깊은나무>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잡지는 최초의 한글전용 잡지이자, 가로쓰기를 시도한 잡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한 전문 미술집단이 편집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탐색정신이 묻어난 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입말과 글말, 지식인 언어와 민중 언어의 조화로운 합일, 국어의 얼개와 어휘에 두루 유념한 편집·교열 등으로 혁신적인 간행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잡지는 한편으로 출판·언론인으로서 그의 지향을 선언한 물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뿌리깊은나무>는 한글세대를 중심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해가던 1980년 8월에 신군부 세력에 의해 공식적인 이유 없이 강제 폐간되었다. 사실에 기반한 전방위적인 사회비판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70~80년대 한국 탐사기자의 대표주자였던 조갑제가 <뿌리깊은나무>에 자주 기고를 하였다는 점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한글전용 잡지 <뿌리깊은나무>.
<뿌리깊은나무>가 강제 폐간되고 나서부터 한창기 선생은 출판활동에 온 힘을 기울여 1983년, 종합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11권을 완간했다. 이 지리지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이후 최초로 간행된 본격적인 인문지리지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제1회 ‘오늘의 책’ 수상작 선정, <한국일보>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스승은 근대화의 세례를 덜 받은 ‘무식한’ 촌노인들이라고 통찰해 그들이 구술한 ‘나의 한평생’을 엮어내기로 하고, <뿌리깊은나무 민중 자서전> 시리즈를 1982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했다. 1991년까지 모두 20권이 나온 이 시리즈도 <한국일보>의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판소리 보존에도 앞장서
전통음악을 음반에 담고, 그 해설과 함께 악보, 사설, 가사를 완벽히 채록해서 수록한 해설집을 낸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유파가 서로 다른 판소리 다섯 마당을 각각 모은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을 비롯해 <뿌리깊은나무 산조 전집>, <뿌리깊은나무 슬픈 소리>, <브리태니커 팔도소리 전집>, <해남 강강술래> 등을 만들어 선보였다. 이 가운데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은 한국방송공사(KBS) 국악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미 1974년부터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100회가 되던 1978년에 끝냄으로써 판소리의 보존과 보급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 11월에는 잡지 <샘이깊은물>을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뿌리깊은나무>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되, 주된 독자를 여성으로 상정한 종합 여성문화잡지로 출발했다. 이 잡지는 한국의 기존 여성잡지와는 달리 여성잡지의 긍정적 지평을 열어 보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제국주의 일본의 잔재를 미처 털어내지 못하고 있던 한국 출판물의 내용과 형식에 진정한 근대성과 주체성을 부여한 최초의 출판 언론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출판활동을 통해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한글학회·외솔회·한국박물관회의 회원이었으며, 재단법인 언어교육의 이사를 지냈다.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전통문화의 뿌리를 지키고자 했던 한창기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난 2월 순천 출신 언론인인 우리글진흥원 강상헌 원장이 박물관을 방문해 <뿌리깊은나무> 문화상품이었던 ‘판소리 전집’(LP 23장)을 순천시에 기증한 바 있다 ♠

서울대 법대 졸업하던 날(오른쪽)
<사진제공: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한창기 선생 연표
1936년 보성군 벌교읍 지곡리 출생
벌교초, 순천중, 광주고,
서울대 법대 졸업
1970년 브리태니커 한국지사 사장
1972년 판소리음악회 개최
1976년 <뿌리깊은나무> 창간
1980년 <한국의 발견> 11권 완간
1984년 <샘이깊은물> 발행
1997년 별세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