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월파 유팽로

허석/한국설화연구소 소장
2024-12-23 16:17
곡성의 인물
유팽로 정열각.jpg

 

유월파정열각( 柳月坡旌烈閣 )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48번지에 소재한 정열각.

유팽로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인조 3년(1625) 세웠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있다.

 

월파(月波) 유팽로(柳彭老). 본관이 문화(文化)인 월파는 조선 개국공신 유만수(柳曼殊)의 후손으로, 1564년(명종 19년) 옥과면 합강리에서 유경안(柳景顔 1515~?)과 남원 윤씨 사이에 늦둥이로 태어났다.유만수는 위화도회군 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찬성사에 올랐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이방원에게 변을 당했다.아버지 유경안은 충주판관을 지내다가 을사사화(1545)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관직에서 물러나 옥과 합강 상류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유경안은 김인후(金仁厚 1510~1560)가 옥과현감으로 부임하여 자신의 집을 자주 방문하자 그와 시국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청근(淸勤)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유팽로

은거 후에 낳은 늦둥이 아들 팽로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시를 한 수 들려주었다.

 

북유둔산령(北有屯山嶺) 북쪽에는 둔산 고개가 있고

남유지리산(南有智異山) 남쪽에는 지리산이 있네.

원차양산수(願借兩山壽) 두 산의 수명을 빌어

만세봉자안(萬世奉慈顔) 영원토록 부모님 뵙고 싶네.

 

처가의 현조(玄祖 5대조)인 윤효손(尹孝孫 1431~1503)이 여섯 살 때 지었다는 시였다.

“어때. 네 어머니의 5대조께서 여섯 살 때 지었다는 시인데, 너도 여섯 살인데 지어볼 수 있겠니?”

그러자 어린 팽로는 조금도 거침없이 아버지께 시 한 수를 읊었다.

 

전유합강수(前有合江水) 앞에는 합강의 물이 흐르고

후유옥출산(後有玉出山) 뒤로는 옥출산이 있네.

원차강산수(願借江山壽) 강산의 수명을 빌어

단욕열친안(但欲悅親顔) 다만 부모님 기쁘게 하고 싶네.

 

그 후 유팽로는 복재(復齋) 오수성(吳遂性)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얼마나 영민했으면 스승조차도 유팽로가 율곡 이이처럼 소년등과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어머니께서 별세하시어 3년상을 치르는 바람에 결국 1579년(선조 12년) 16세 때 과거를 보러 올라가게 된다.

아버지는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유팽로에게 가동 김충남을 붙여주었다. 아들보다는 여덟살 위인 그는 눈치도 빠르고 충직하여 아들을 보좌하기에는 듬직하였기 때문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유팽로는 당시 함께 급제한 고인후(高因厚 1561~1592)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 고인후는 광주에 살던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둘째 아들인데 유팽로와 고경명의 인연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훗날 고경명 부자와 유팽로가 같은 날 전사하였으니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진사가 된 유팽로는 좌찬성으로 추증된 김침(金琛)의 딸 원주 김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1).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대과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바람에 유팽로와 원주 김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진사가 된 유팽로는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으로 유명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문하에서 공부를 한 후 1588년(선조 21년) 25세 때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게 된다.

홍문관 부정자를 거쳐 성균관 학유로 제수되어 종사하던 중 1589년 아버지 병 간호를 위해 사직을 하고 내려왔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1592년(선조 25년) 3월에 3년상을 마쳤다. 그러자 전라도관찰사가 그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홍문관 박사에 제수되었다.

 

세 번의 상소를 올리다

홍문관 박사에 제수되자마자 남쪽의 왜구가 걱정되니 국방 강화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문을 4월 6일 임금께 친히 올렸다. 그러나 동인 등의 반대 세력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균관 학유로 좌천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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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팽로가 이틀 간격으로 2차 상소와 3차 상소를 올리자 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동인 세력에 의해 유팽로가 화를 당할까 우려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동인 세력들의 주장이 빗발쳤다. 그러나 성혼과 정철, 윤근수 등의 서인 세력이 나서서 이를 저지하여 성균관 학유로 유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인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팽로는 벼슬을 버리고 내려오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이 전쟁 대비를 주장한 유팽로를 떠올리고 그의 소재를 내시에게 물었다. 그러나 내시 김기문(金起文)이 “유팽로는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고, 또 나이가 젊어서 일에 경험이 없으니 믿고 쓸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중용될 기회를 잃었다 한다 2).

유팽로가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틀 뒤인 4월 16일의 일이다.

“스승님! 큰일 났어요!”

유팽로가 기거하는 곳에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스승을 찾았다. 진주판관 김시민의 아들 김치(金緻)였다. 유팽로보다 13년 연하인 김치는 아버지 추천으로 유팽로에게 글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훗날 과거에 급제하여 경상감사 등을 역임하게 된다. 유팽로는 우연한 기회에 동갑내기 김시민을 알게 되었는데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과거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간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진주판관으로 있던 김시민이 아들에게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만에 유팽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월파록> 4월 16일자를 살펴보면 ‘월전기서우진주금승답서즉왜적선군이도해(月前寄書于晉州今承答書則倭賊先軍已渡海)’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달포 전에 진주에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기를 왜군의 선봉이 이미 바다를 건넜다는 것이다 3).

며칠 뒤인 4월 18일, 남쪽으로 내려보냈던 가동 김충남이 서울로 돌아와 이르기를 “어제 경상순찰사가 장계를 올렸는데, 4월 13일에 왜군이 쳐들어와 14일에 부산이 함락되고 15일에 동래가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50만에 달하는 적병이 삼도를 덮치려 합니다.” 하였다 4).

그런데 그 전날인 4월 17일, 유팽로는 고조인 안양공(安襄公), 5세조 영상공(領相公), 증조 서은공(西隱公) 등 조상묘를 참배한다. 이미 그때 마음의 정리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의마(義馬), 오려를 얻다

연이어 동래성이 왜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팽로는 4월 19일 도성을 떠나 내려온다. 그날 밤 꿈에 고조부인 안양공(安襄公)이 나타나 공주사람에게서 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현몽한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공주를 지나던 중 양씨 성을 가진 처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처사의 말이 어찌나 사나운지 주인에게조차 대든다는 것이다. 더구나 발이 다섯 개나 된다 하니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오려(烏驪). 오려라는 이름의 말 소문을 들은 유팽로가 찾아가자 그를 본 오려는 거짓말처럼 온순해졌고 유팽로를 따랐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말은 필경 그대의 것인 것 같구려. 내 그대에게 오려를 줄 테니 잘 조련시켜 보도록 하시오.”

양 처사는 유팽로에게 오려를 내주면서 특별히 대검 한 자루까지 주었다 5).

“왜놈들이 쳐들어와 강토가 유린당하고 있다는데,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보낸 것 같소이다. 오려를 타고 이 대검으로 왜놈들을 물리쳐주길 바라오.”

오려를 얻게 된 유팽로는 발 하나를 절단하고 조련시켜 준마로 키웠다. 1592년 4월 20일의 일이다.

오려를 타고 고향에서 가까운 순창에 도착하였는데 대동산 앞에 수백의 무리가 운집해 있었다. 왜놈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일어난 의병으로 생각한 유팽로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대검을 찬 유팽로를 경계하면서 다가왔다.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시오!”

“나는 조정에서 일을 하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내려오는 중이오.”

유팽로의 말을 들은 우두머리가 몇 사람과 의논을 하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유팽로를 에워싸고는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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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는 당신 같은 벼슬아치들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오. 맨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이 모양 이 꼴 아니오! 차라리 당신 같은 사람들을 왜놈들에게 바치고 우리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편이 낫겠소!”

그러자 유팽로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보시오들. 아버지가 문제가 있다고 자식이 아버지를 내칠 수 있단 말이오? 조정이 아무리 썩었다 한들, 그것을 뜯어 고칠 생각을 해야지 나라를 팔아먹겠다는 말이오? 나도 또한 조정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오. 하지만 어쩌겠소. 우선을 나라를 지키고 봐야 할 것 아니오.”

유팽로의 절절한 설득에 자칫 반란군이 될 뻔하였던 무리가 순식간에 의병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팽로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대장이 되었다.

 

임란 최초의 의병을 세우다

1592년 4월 20일. 유팽로는 순창 대동산 아래에서 5백여 명의 무리들과 함께 ‘전라도의병진동장군유모(全羅道義兵鎭東將軍柳某)’라는 커다란 깃발을 세웠다.

사실 그 동안 임진왜란 발생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로 알려져 있다. 그가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 4월 22일이다. 그러니 유팽로는 그보다 이틀 앞서 의병을 일으킨 셈이다.

유팽로는 의병 창의 소식을 순창군수 임백영에게 알리고 성안에 머물렀다. 성안에 머무르며 의병을 훈련시키던 유팽로는 5월 1일 격문을 작성하여 김충남을 시켜 전라도 각 고을에 보냈다. 5월 11일 임실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갈담역 전투가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의병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5월 15일 유팽로 소식을 들은 양대박, 안영 등이 합류하였다. 양대박은 유팽로의 스무 살 위 이종형이었다.

그들 역시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담양으로 이동하여 고경명 부대와 합류하였다. 당시에 유팽로가 기호지방에 돌릴 격문을 지었는데, 그 격문이 <정기록(正氣錄)>에 실려 있다. 그리하여 6월 8일 담양 추성관에서 무려 8천여 명에 이르는 호남연합의병군이 결성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최대 규모의 의병이라 할 수 있다. 의병장으로는 고경명, 좌부장에는 유팽로, 우부장에는 양대박이 추대되었다.

유팽로는 고경명, 양대박과 더불어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혈맹을 맺었다. 또한 속옷에 이름을 적어 전사하면 찾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처음과는 달리 의병 규모가 만 명에 육박하자 유팽로 등은 군량미를 모아가며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의병을 대하는 백성들의 환대로 인하여 식량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무기에서의 열세는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불리함을 극복하였다. 자신의 고향 산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6월 23일, 고경명 장군이 양대박과 유팽로를 불렀다.

“지금 어가가 의주로 향하고 있다 하오. 우리도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계시는 곳)로 가서 임금을 호위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유팽로가 반대하였다.

“임금을 호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의 왜적 먼저 물리치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위로 보나 나이로 보나 고경명 장군의 뜻을 거스르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호남연합의병군이 행재소로 가기 위해 북상하다 여산에 머물렀다. 그런데 왜적이 대대적으로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유팽로 등이 다시 왜적을 막자는 주장을 펼쳤고, 결국 고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부대를 진산으로 옮겼다. 그때 왜적들이 금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7월 6일, 전주에 머물던 양대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유팽로는 오려를 타고 당일 전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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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의 왜적을 향하다

왜적이 금산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규대사 등 다른 의병부대들이 진산으로 집결하였다. 여기저기에서 의병부대들이 합류하자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래서 당장 금산으로 진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유팽로가 신중론을 펼쳤다.

“당장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수만 명이 넘는 왜적을 오합지졸인 의병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요지에 나뉘어 있다가 적이 느슨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팽로의 주장에 유팽로의 인품과 실력을 아는 고경명 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합류한 의병대장들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유 장군은 칼을 잡아보기라도 한 것이오? 적들이 뭐가 무섭다고 기다린단 말이오!”

결국 논쟁이 벌어졌지만 강경파의 의견이 지배적이고 유팽로의 신중론은 묵살되고 말았다. 고경명 역시 다수가 주장하자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6) ‘유팽로’ 편에서는 유팽로가 “한쪽 눈이 멀었고 용모가 잘 생기지 못하여 막하의 군사가 모두 업신여겨 끝내 그의 계책은 쓰이지 아니하였다.”7)고 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안방준(安邦俊 1573~1654) 8)이 쓴 <호남의록(湖南義錄)>에도 기록되어 있다 9).

그리하여 7월 10일, 고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다. 그런데 곽영이 먼저 날랜 병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고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적을 위축시키고 성 안으로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다시 진격하여 곽영의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고경명 부대는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아차린 왜적들이 북문으로 나와 총공격을 하였다. 관군의 선봉장이었던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타고 도망치는 바람에 관군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고경명 부대가 서문을 공격하고 있는데 의병 한 명이 달려오며 부르짖었다.

“방어사의 군대가 패하였다!”

그러자 고경명 부대의 대오가 일시에 흩어졌다. 그 순간 고경명이 탄 말이 갑자기 앞발을 들고 우는 바람에 고경명 장군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말이 달아나 버리자 종사관 안영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자신은 걸어서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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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포충사에 전시된「금산구국혈전도(오승우 그림)」부분. 금산에서 벌어진 전투장면이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 근거해 그려졌다. 포충사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장군, 종후, 인후 3부자와 안영, 유팽로 장군 등을 모신 곳이다.

대장을 살리려 목숨을 버리다

관군은 물론 의병 대부분이 달아나자 유팽로 역시 어쩔 수 없이 퇴각을 하려다가 멈칫하였다. 그러자 유팽로를 곁에서 지키고 있던 김충남이 오려를 채찍질하려 하였다.

“가만 있거라.”

유팽로가 저지하였다. 그러자 김충남이 물었다.

“일이 급하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떠나지 않습니까?”

유팽로가 되물었다.

“고경명 장군은 어디에 있느냐?”

눈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충남이 거짓으로 아뢰었다.

“고경명 장군은 먼저 빠져나가신 듯합니다.”

김충남의 말을 들은 유팽로가 안심하고 말을 달리려는데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멀리 고경명 장군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곧바로 말을 돌려 고경명 장군에게로 가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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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김충남이 말고삐를 잡고 울며 청하였다.

“나리, 제발 그냥 가시지요. 어찌 사지로 들어가시려 하십니까?”

“내 어찌 연로한 장군을 홀로 두고 떠날 수 있단 말이냐! 너라도 빠져나가 부인을 모시도록 해라.”

“그래도 나리, 제발...”

김충남이 말고삐를 잡고 다시 간청하자 유팽로가 격분하여 칼을 뽑더니 김충남의 팔을 내리쳤다. 김충남은 팔에 흐르는 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말고삐를 놓았다.

퇴각을 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유팽로를 보고 고경명 장군이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은 씩씩한 말을 탔는데 어찌하여 먼저 피하지 않았소?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재빨리 빠져나가시오!”

그러자 유팽로가 말하였다.

“어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끝까지 고경명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완강하게 버티던 유팽로는 왜적의 칼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러자 안영이 재빨리 장군의 머리를 오려의 안장에 묶었다. 오려는 크게 한번 울더니 옥과를 향해 내달렸다. 안영 역시 왜적의 칼에 쓰러지고 고경명 장군 역시 쓰러지자 멀리서 지켜보던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도 달려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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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끝까지 의를 지키다 숨진 의마 오려를 기리기 위해 곡성군 입면 송전리 내동마을에 세워진 의마총비.

주인의 머리를 등에 싣고 수백 리 길을 달려온 오려는 장군의 부인을 보고 세 번 슬피 울더니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장군의 머리를 받아든 부인은 장사를 마친 뒤 부군의 뒤를 따르기 위해 자결을 하였다.

살아남은 김충남은 한쪽 팔을 잃었는데도 주인을 버리지 않고 옥과로 돌아와 유팽로 부인을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부인마저 자결을 하자 두 사람의 무덤을 지키며 평생을 함께 하였다.

옥과천 하류 합강리에 있는 마을 가운데 합강사가 쓸쓸하게 서 있다. 그리고 옥과천 건너 송전리에는 의마총이 외롭게 보인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1)<옥과읍지(玉果邑誌)>. 부인원주김씨증좌찬성침녀(夫人原州金氏贈左贊成琛女)

2)<월파집>‘일기’임진년 4월 19일. 김기문대왈유모특일문사차년소이미유경사즉무족신용(金起文對曰柳某特一文士且年少而未有經事則無足信用)

3)<월파집>의 기록이 유팽로의 직접적인 기록에 의거하여 훗날 정리된 것이기에 착오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4)<월파집>‘일기’임진년 4월 18일.

5)<월파집>‘일기’임진년 4월 20일 편에는‘철장(鐵杖)도 받았는데 받고 보니 지팡이가 아니라 칼이었다. 양쪽에 칼날이 있어서 세우면 지팡이가 되고 휘두르면 칼이 되는 신물(神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 조선 정조 때 건국으로부터 숙종 때까지의 주요 인물에 관한 사항을 항목별로 나누어 편집한 책. 2,065명이 수록되어 있다.

7) <국역 국조인물고>, 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8) 호는 은봉(隱峰).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24년)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사헌부 지평,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9) <호남의록·삼원기사>, 안방준 원저, 신해진 역주, 1999. 역락. 60~61쪽.

 

1554년생인가, 1564년생인가?

유팽로 장군의 출생년도가 1554년인가 1564년인가 하는 논란이 아직까지 있다. 곡성군 기록에는 1564년생으로 되어 있다. 1564년생이라면 16세 때 진사시, 25세 때 식년시에 합격한 것이 되는데, 신동으로 불렸기에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60세 된 고경명, 49세 된 양대박과 함께 29세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월파집> 권1에는 가정갑자생(嘉靖甲子生)이라고 나와 있다. 가정(嘉靖)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인데, 그 때 갑자(甲子)년이 1564년(명종 19년)이다. 유팽로 자신이 1592년에 올린 1차 상소문에 보면 당시 자신의 나이가 29세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옥과읍지>나 <곡성군지>에도 유팽로가 임진년에 사망할 당시 29세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를 기록한 사마방목이나 문과방목 등에는 모두 갑인년(甲寅年 1554년) 생으로 되어 있다.

 

유팽로의 묘.jpg

유팽로 장군 가묘. 합강에 있다.

<월파집> ‘일기’ 임진년 4월 14일자에 보면 유팽로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문병 온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이상홍(李尙弘 1559~1596), 이경전(李慶全 1567~1644), 신흠(申欽 1566~1628), 박동량(朴東亮 1569~1635), 오윤겸(吳允謙 1559~1636), 조존성(趙存性 1554~1628), 홍서봉(洪瑞鳳 1572~1645), 이시직(李詩稷 1572~1637), 이안눌(李安訥 1571~1637), 구굉(具宏 1577~1642) 등이 ‘유팽로 아래로 10년 사이[후어공십년간야(後於公十年間也)]’라고 하고 있다.

이상홍, 오윤겸, 조존성만 빼면 사실과 부합한다. 그러니 유팽로가 1564년생이라는 데 대해 다소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사실일 확률이 더 높다. 또한 유팽로 장군의 후사에 대해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도 1564년생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월파집> ‘일기’ 임진년 4월 19일자를 보면 서울에서 종친들이 화수회를 연 기록이 있다. 이 때 유팽로가 목사로 있던 유경례(柳敬禮)에게 “제가 자식이 없이 난리를 당하였는데 죽을 것만 같고 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대를 이어줄 분은 오직 목사 형님뿐입니다. 형님의 세 아들 중에 하나를 제가 아낍니다.” 하였다. 그러자 화수회장으로 있던 참판 유희림(柳希霖)이 “마땅히 약속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유팽로는 1564년생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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