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103)

넘겨 보는 설화 구슬을 쥐고 태어난 아이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조선시대 초 전라도 창평군에 우성해(禹性海)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도 많았지만 음주가무와는 거리를 둔 채 치산(治産)을 잘 해 젊은 나이에 우성해는 거부가 되었다. 아무런 부러움도 없을 것 같은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10대 후반에 은(殷)씨 처녀와 혼인을 하여 몇 년 만에 겨우 얻은 딸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그 딸이 시집을 안 가려 하기 때문이다. 우성해의 딸은 적적해하실 부모님을 생각하여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집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스물이 다 되어서야 우성해의 딸은 낙안의 주(朱)씨에게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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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한해방죽의 슬픈 사연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축두마을은 지리적으로 해상 방비의 요충지로, 관방이 설치되어 입출항하는 선박을 감시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몽중산 아래에 있다 하여 몽중이라 불렀는데, 몽중산의 형세가 소의 모습과 같고, 마을이 소 머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축두(丑頭)라 하였다. 축두마을에 저수지가 하나 있다. 지금은 축두저수지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한해방죽이라 불렀다. 축두저수지의 옛 이름이 한해방죽인 것은 방죽을 쌓을 때 스스로를 희생한 한해라는 이름의 스님 때문이다. 기록에는 1937년 축조되었다고 하나 옛날부터 있었던 방죽을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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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앵무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봉두(鳳頭)마을은 위씨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위효징의 집터가 있는데, ‘봉황포란지혈(鳳凰抱卵之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명당)’이라고 한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으로 알려진 위효징의 집터. 15세 종손인 위상복(83) 씨가 1982년 초가집을 기와로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이다.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활동하였던 위대경(魏大經 1555~1597)은 충렬공(忠烈公) 위계정(魏繼廷 ?∼1107)의 후손이다. 위계정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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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용왕이 보낸 말하는 거북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보성읍에서 한 3km 가면 용문리라는 곳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한 500년 전쯤 용문리에 아주 가난한 자매가 살고 있었다. 두 자매가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얼마나 가난했는지 자매가 나무도 하고 나물도 캐고 밭도 가는 등 하루도 몸이 편할 날이 없었다. 용문마을 앞 개울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무를 하러 다녀오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연세가 드셔서 잔병치레는 많이 하셨지만 갑자기 쓰러지시니 자매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산에서 캐 온 약초로 응급조치를 한 다음 가까운 의원에게 달려가 아버지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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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다로 왕자와 상아 공주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삼한시대가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그것이다. 삼국시대 초기에도 그랬지만 삼한 역시 부족 사회였다. 부족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마한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삼한 사이에는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됐다. 그래서 마한의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진왕(辰王)이 되어 느슨한 연합체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는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나와 있다. 형식적으로는 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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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원홍장과 성덕 설화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옛날 백제 때 충청도 대흥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았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던 그는 어찌어찌 하여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야 늦장가를 들게 되었다. 앞을 못 보는 원량을 측은하게 여긴 마음씨 착한 처녀가 원량에게 시집을 온 것이다. 늦복이 터졌는지 아내는 곧바로 잉태를 하였고 딸까지 낳았다. 백제 고이왕 11년(274년)의 일이다. 딸의 이름을 홍장(洪莊)이라 지은 원량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가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던 원량을 시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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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천 년을 기다린 명당

2024년 12월 17일 한국설화연구소

고려초, 지금의 고흥 도덕면 한적마을에 박씨 성을 가진 가난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박씨는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시는지 동네 사람들이 다들 칭찬하느라 입이 마를 정도였다. 박씨는 매일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지만, 파도가 세게 치거나 안개가 짙은 날이면 마을 뒤에 있는 중뫼산에 올라 밭을 일구었다. 밭이라도 몇 마지기 일구어야 그나마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박씨의 밭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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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마녀목의 슬픈 전설

2024년 12월 3일 한국설화연구소

여수시 화정면 개도에 있는 화산마을 앞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하나 있다. 수령이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인데 마을사람들은 그 느티나무를 마녀목(馬女木)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숙종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화양면을 곡화(曲華)라고 했는데 말을 사육 관리하는 목관(牧官)이 있었다. 화양면 일대는 물론 인근 백야도, 개도, 제도, 낭도까지 나라에서 제공한 말을 사육하여 목관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말이 병에 걸려 죽거나 잘 크지 않으면 목관으로부터 질책이 대단하였고, 때로는 그 손해를 배상해야 했다. 목관 역시 다른 지역 목관들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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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까막골의 구미호

2024년 12월 3일 한국설화연구소

순천시 낙안면 금산(金山)마을이 생기기 전 이곳에는 까막골이라는 곳에 조그마한 촌락이 있었다. 까막골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숯을 굽고 질그릇을 굽던 가마가 많이 있어서 ‘가마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까막골’로 된 것이다. 까막골에서는 숯을 굽고 질그릇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까막골에는 과부가 많아 과부골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몇 집 살지 않는 조그마한 마을에 과부가 여덟 명이나 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까막골에 과부가 여덟 명이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순천시 낙안면 금산마을 맞은편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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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 보는 설화 탐욕스러운 형의 최후

2024년 12월 3일 한국설화연구소

조선 후기 구례 문척면 어떤 마을에 박씨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우애가 깊었지만 유독 큰아들을 예뻐하는 할머니나 부모님 때문에 동생은 항시 뒷전이었다. 어려서는 형도 그런 동생을 위해주는 것 같더니 나이가 들면서 점차 형은 동생에게 군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오냐 오냐 하니까 형의 심성이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둘 다 장가를 가게 되었다. 형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동생은 옆 마을로 분가를 하였다. 말이 모시고 사는 것이지 사실은 부모님이 형 내외를 보살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생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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