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호암마을 범바위 전설
고려 중엽 때의 일이다. 광양읍 죽림리 호암마을에 할머니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 개울 건너 오두막에 홀로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 뒤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큰개울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밤만 되면 호랑이가 나타나 할머니 집에 머문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가 나타나는지 지켜보려 했지만 할머니를 해치려 했던 도둑이 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돌자 말만 무성하지 누구 하나 나서서 확인해 보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꼬마 하나가 밤에 용변을 보러 나갔다가 이상한 소리에 이끌려 개울 건너 할머니 집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꼬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덩치가 산만큼 큰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물레질하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고, 할머니는 마치 호랑이가 할머니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호랑이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마을사람들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밤에도 거리낌 없이 마실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밤중에 호랑이가 울음소리가 났다. 크게 세 번이나 우는 호랑이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을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호랑이 울음소리에도 놀랐지만 그 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 모두 일어나자 도둑들은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이듬해 봄에는 지독한 가뭄이 들었다. 농사를 지어야 할 때 비가 내리지 않아 마을사람들이 곤경에 빠졌는데 호랑이가 하루 종일 하늘을 향해 울자 신기하게도 비가 내렸다. 그해 여름에는 사흘 밤낮을 비가 내려 마을이 떠내려갈 위기에 처했다. 물론 가장 위험한 곳은 할머니의 오두막이었다. 역시 호랑이가 하늘을 향해 꼬박 반나절을 울었다. 그러자 비가 그쳤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마을의 수호신이자 하늘에서 내려온 산신령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실 호랑이는 할머니 아들이 환생한 것이었다. 호암마을 출신인 할머니가 하동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할머니 댁에 우환이 깃들었다. 이웃에 살던 강씨 집 아들이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할머니 아들을 다치게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악화되더니 급기야 할머니 아들이 죽고 말았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분노가 되는 법인데, 분노의 화살은 반드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를 시댁에서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자식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아들이 죽은 슬픔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할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시댁에서 쫓겨나 친정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마저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마을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개울 건너에 오두막을 짓고 거기에서 혼자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에서 떨어져 혼자 사는 할머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 워낙 흉년인지라 먹고 살기조차 힘든 때여서 가진 것 없는 집일지라도 먹을 것이라도 훔치기 위해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도둑들이 할머니 집을 뒤지다 별로 먹을 게 없자 할머니를 윽박지르기 시작하였다. 숨겨놓은 식량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내놓으라니 답답할 지경이었지만 며칠을 굶은 도둑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시꺼먼 그림자가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도둑들을 해치웠다. 커다란 호랑이였다. 혼비백산한 도둑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망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도둑만이 아니었다. 할머니 역시 집채만한 호랑이에 놀라 기절 직전이었다. 그런데 도둑이 눌러간 후 호랑이는 신기할 정도로 온순해지더니 할머니 곁에 다소곳하게 웅크렸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할머니는 그때서야 호랑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때로는 산나물을 물어다 주기도 하고 때로는 값비싼 약초를 물어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에게 호랑이는 말동무가 되어준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때로는 어린 아이처럼 보채는 호랑이에게 옛날이야기도 들려주고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할머니와 호랑이는 점차 잠시라도 떨어지면 안 될 그런 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호랑이는 할머니의 죽은 아들이 환생한 것이었다. 호랑이로 환생한 아들이 멀리서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도둑이 들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할머니도 호랑이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먹을 것을 내어주는 할머니의 손길이며 눈길이 영락없는 어머니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병환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전과 달리 할머니 댁에 드나들며 병간호를 하였다. 호랑이가 갖은 약초를 물어다 주고 마을사람들이 정성으로 간호하였지만 할머니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할머니가 죽자 호랑이는 사흘 내내 계속하여 울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며 친근감을 느끼고 있던 마을사람들조차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놀랄 정도였다. 그러더니 호랑이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오두막 집을 둘러보니 집 뒤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는 호랑이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호랑이 바위는 그날 이후 새벽녘이면 으레 호랑이가 살아서 그랬듯이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어 전과 같이 시간을 알려주었고, 마을에 재앙이 생기면 막아주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호랑이의 정기가 서린 바위에 해마다 감사의 제를 올리고 마을 이름도 호암(虎岩)이라고 지었다.
지금도 호랑이의 혼이 살아 있다고 해서 강(姜)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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