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쇠머리바위에 얽힌 눈물겨운 형제애
옛날 순천 낙안면 상송(上松)마을에 범준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범준이는 소년이 되어서도 혼자 있기를 즐겼다. 친구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범준이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단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소를 한 마리 사오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여물을 주어도 소가 먹으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려고 범준이 아버지는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소는 여물에 입도 대지 않았다.
그날도 혼자 놀던 범준이가 우연히 다가와서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러더니 말 없이 짚을 한 움큼 쥐고 소에게 다가가 먹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소가 짚을 먹는 것이 아닌가. 언제 그랬냐는 듯 소가 여물을 잘도 받아 먹자 범준이 아버지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날부터 소는 범준이 몫이었다. 더불어 범준이 얼굴도 밝아졌다. 태어나서부터 단 한 번도 웃는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미소를 짓는 일이 잦아졌다.
틈만 나면 범준이는 소를 몰고 뒷산으로 올랐다. 때로는 범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의 눈길이 마치 사람의 눈과 같았다. 소에게 논일이나 밭일을 시킬라치면 범준이는 화부터 냈다. 그리고는 소를 먹여야 한다며 뒷산으로 몰고 올라가곤 하였다. 소에게 일을 못 시키게 하는 범준이가 야속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아들놈에게 웃음을 찾아준 소였기에 범준이 부모는 모른 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범준이가 마을 뒷산 소나무 숲 한적한 곳에서 소를 먹이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소를 먹인다기보다는 소와 함께 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소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범준이는 그 곁에 누워 다리를 꼰 채 풀피리를 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다짜고짜 범준이에게 달려들었다. 누워서 풀피리를 불던 범준이는 깜짝 놀라 소의 다리 밑으로 들어가 벌벌 떨다가 기절을 하고 말았다.

범준이가 깨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쿵 하는 소리에 깨어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소뿔에 받쳐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소는 범준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걱정스런 눈빛으로 곁에서 범준이를 지키고 있었다.
때가 되어도 범준이가 오지 않자 아들을 찾아나선 범준이 부모는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산더미만한 호랑이가 널부러져 있고 소가 마치 범준이를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구해준 소를 대견해 하였다. 만약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죽은 호랑이를 가져와 가죽을 벗기고 호랑이 고기로 마을 잔치를 벌였다.
그 날 이후 범준이네 소는 논일 밭일을 면제받았다. 범준이 부모는 물론 마을 사람들조차 소를 신령하게 여기고 보살폈다. 그러니 이제 범준이와 소는 하루 종일 한데 어울려 지냈다.
며칠 후, 그 날도 어김없이 마을 앞에서 범준이가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소가 달려가더니 뿔로 뭔가를 몇 차례 들이받고는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앞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마침 그 바위 위에 며칠 전에 잡은 호랑이 가죽을 널어놓은 것을 소가 그만 호랑이로 잘못 알고 바위를 받다가 머리가 깨져 죽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도 범준이를 지키려했던 소를 애석해하였다. 그래서 소를 그 바위 밑에 묻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이 바위를 쇠머리바위라 불렀다.

그날 밤 범준이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속에 소가 나타나더니 느닷없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으로 변신한 소는 범준이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범준이와 소는 전생에 형제였다는 것이다. 소는 범준이의 형이었다고 한다. 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던 형제는 어느 날 벼랑 끝에 있는 석이버섯을 따려다 그만 미끄러졌는데 동생이 형을 살리기 위해 형을 밀치고 대신 떨어졌다. 간신히 동생의 손을 잡은 형이 동생을 끌어올리려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둘 다 떨어질 판이었다. 한참을 형을 바라보던 동생이 떨어져 죽고 말았다. 형을 살리기 위해 동생이 스스로 손을 놓은 것이었다.
동생이 죽고 나서 눈물로 지새던 형은 동생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하지만 다음 생에서라도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결국 소가 되어 동생 곁으로 온 것이다.
전생에 형을 위해 목숨을 버린 동생, 그리고 그 동생을 위해 이승에서 소가 되어 동생을 지켰던 형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지금도 상송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쇠머리바위는 상송저수지를 막으면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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