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죄를 뉘우친 아들
옛날 고흥 도화면 어느 마을에 나이 많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무엇 하나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딱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홍수가 났다. 고흥에도 큰물이 져 부부가 사는 마을 어귀까지 물이 들어찼다.
노부부가 나가보니 뱀 한 마리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징그럽기는 하였지만 한낱 미물인 뱀 역시 생명을 가진 존재. 그래서 할아버지는 뱀을 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기다란 대나무를 내밀어 뱀을 살려주었다. 지쳐서 그런지 뱀이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뱀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노부부가 다시 하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사슴이 떠내려 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부부는 애처롭게 보이는 사슴을 어찌할 바 몰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사슴이 천우신조로 강 가까이로 떠밀려오자 건져주었다.
사슴은 얼마나 오랫동안 떠내려 왔는지 기진맥진하여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사슴이 노부부를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사슴이 떠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웬 청년이 떠내려 오는 것이 아닌가. 뱀이나 사슴 때와는 달리 노부부는 잔뜩 긴장을 하였다. 청년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정신을 잃은 청년은 물살에 따라 이리저리 출렁거리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할아버지가 밧줄을 엮어 던져보았지만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강물을 따라 뛰어가며 밧줄을 던지고 또 던졌는데 마침내 밧줄이 청년의 몸에 걸려 할아버지가 청년을 구하게 되었다.
한참을 등을 두드리고 인공호흡을 한 뒤에야 청년이 정신을 차렸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청년에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가?”
청년은 말이 없다. 충격이 커서 기억을 잃은 것일까? 그런데 잠시 후 청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 먹여 주고 재워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부부는 하늘이 아들 대신 보내준 청년이라 생각하고 그 청년을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살 때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는데 막상 청년과 함께 살다 보니 부족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처음과 달리 청년은 일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것은 할머니의 한숨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사슴이 나타나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예전에 구해주었던 그 사슴이었다.
사슴이 돌아서서 가다가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였다. 마치 할아버지에게 따라오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여긴 할아버지가 사슴을 따라나섰다.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지만 난생 처음 가보는 산길이었다. 한참을 산길을 가던 사슴이 한곳에 서서 할아버지를 뒤돌아보더니 발을 쿵쿵거리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괴이하게 여긴 할아버지가 사슴이 서있던 곳을 파보니 놀랍게도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항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구해준 데 대한 보은으로 사슴이 금은보화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한 노부부는 그 금은보화 가운데 일부를 팔아 커다란 집도 마련하고 살림도 넉넉하게 장만하였다. 청년과 함께 살아가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여보, 우리 이 정도면 먹고 살 만하니 이 항아리는 다시 그 자리에 묻어둡시다.”
애초에 욕심이라고는 하나 없이 순박하게 살아왔던 노부부는 항아리를 원래 있던 자리에 묻었다.
그런데 먹고 살 만해지자 청년이 점차 이기적으로 변하더니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하고 다녔다. 남의 집 장독대를 죄다 깨부숴 변상을 해주는가 하면 술을 마시다 사람들을 때려 돈을 물어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청년은 할아버지가 돈이 어디에서 나는지 궁금하였다.
“아버지,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아버지는 어디에서 돈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청년은 언젠가부터 할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다. 노부부 역시 청년을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아들이 물을 때마다 할아버지 대답은 한결 같았다.
“이제는 남은 게 한 푼도 없다.”
나이가 들어 변변한 경제활동도 못하면서 어디선가 계속 돈이 나오자 궁금증이 생긴 아들이 하루는 사고를 쳐놓고는 아버지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호젓한 산길을 가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땅을 파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곳에 항아리가 있는데 그 속에서 금은보화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건만 아들 때문에 마지막이라 다짐하며 항아리 뚜껑을 연 것이 몇 번이었던가. 할아버지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느닷없이 아들이 나타났다.
“아버지! 여기에 이렇게 막대한 금은보화를 숨겨놓고 저에게는 숨긴 이유가 뭐예요? 저를 못 믿는 거예요? 저도 한 번 떵떵거리고 살고 싶다구요!”
당황한 할아버지가 아들을 막아서며 말하였다.
“애야, 욕심이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이란다. 없어도 우리끼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쟎니.”
“없이 사는 것이 어찌 행복하단 말이에요! 저는 싫어요! 이 금은보화 저 주세요!”
막아서는 할아버지를 아들이 억지로 떠미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뒤로 넘어지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는 본 체 만 체 항아리를 들고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밤이 깊은데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가 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샜다. 날이 밝자마자 동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던 할머니는 불현듯 생각이 떠올라 항아리가 묻혀 있는 산골짜기로 가보았다. 그런데 항아리가 있는 곳은 파헤쳐져 있고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할머니의 눈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영감!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집으로 돌아와 의원의 치료를 받은 뒤에도 할아버지는 어찌된 일인지 함구하였다. 그런데 어젯밤부터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의구심이 생겼다.
“영감, 혹시 아들놈 짓이에요? 맞아요?”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다그치자 할아버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샌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일찍 관아로 가서 아들을 고변하였다. 아버지를 다치게 한 뒤 방치해두고 재산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패륜사건을 접한 관아에서 나졸들을 풀어 아들을 찾아보니 어느 기방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아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잡혀 관아 옥사에 갇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아버지를 다치게 하였고 재산을 강탈한 죄로 옥사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막상 고변은 하였지만 할머니는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은 자신의 손으로 옥사에 갇히게 하였다는 죄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할아버지 역시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영감, 비록 제 손으로 집어넣기는 하였지만 옥사에서 고초를 겪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워 죽겠어요.”
“임자도 그리 생각하오? 나도 그래요. 그러니 사또께 말씀드려 아들놈을 풀어달라고 그럽시다.”
할머니가 관아에 가서 사또에게 청을 드렸다.
“사또. 비록 제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피해자도 지 애비이고 저희 부부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니 부디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할머니를 묵묵히 바라보던 사또가 말하였다.
“그것은 안 됩니다. 비록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직계 존속에 대한 폭행은 절대로 방면할 수 없는 죄입니다.”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곧바로 풀어줄지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고 하자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사또, 사실은 저희 친자식이 아닙니다. 오래 전 큰물이 났을 때 우연하게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양자로 삼은 아들입니다. 그러니 직계존속이 아니지요.”
“그러니, 그러니 더 죄질이 나쁜 것 아니오! 그런 패륜아를 풀어주면 나라꼴이 뭐가 되겠소! 그러니 절대로 아니 될 일이오!”
절망감만 안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할아버지 때문에 애써 눈물을 참고 있던 할머니의 눈에서도 빗물이 흐르듯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편, 옥사를 지키고 있던 나졸이 아들에게 면박을 주었다.
“어이구, 한심한 화상 같으니라구. 야, 임마! 니가 니 아버지를 다치게 하고 재산까지 훔쳐 달아났지만 니 어머니는 너를 살리려고 사또께 애걸복걸하더라. 그런데도 지은 죄가 중하여 절대로 풀어줄 수 없단다. 짐승만도 못한 놈! 살려주고 키워준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나졸의 이야기를 들은 아들의 퀭한 눈에서는 마른 것 같았던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을 부디 용서치 마세요.“
그때였다. 옥사 어디에선가 갑자기 뱀 한 마리가 스르르 기어들더니 갑자기 아들의 발목을 물고는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아들의 발목이 풍선처럼 부어오르더니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죽는 건가? 그래. 천벌을 받은 게야. 아버지, 어머니. 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아들이 눈을 감고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데 또 다시 뱀이 나타나더니 아들의 발목에 처음 보는 나뭇잎을 붙여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상처가 가라앉더니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감쪽같이 나았다.
다음날 아침 사또의 관사에서 난리가 났다. 사또의 딸이 뱀에게 발을 물려 다 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은 옥사에까지 전해져 나졸들끼리도 수군거렸다.
“저, 사또의 딸이 뱀에게 발을 물렸다구요? 그래서 지금 상태가 어떻답니까?”
“니가 그건 알아 뭐하게!”
나졸들이 면박을 주는데도 아들이 집요하게 묻자 나졸 한 명이 귀찮다는 듯 알려주었다.
“뭐, 뱀에게 발을 물렸는데 퉁퉁 부어오르더니 새까맣게 변하더래. 용하다는 의원들이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찾아오는데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손을 내젓고 돌아간다지 뭐야?”
“저, 사또를 만나게 해주세요. 제가 사또의 딸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자신 있게 말하자 나졸들이 피식하고 일제히 콧방귀를 뀌었다.
“니까짓 게 뭐라고 용하다는 의원들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친단 말야?”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아들이 사정사정하자 나졸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사또께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러자 사또 역시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옥사에 갇혀 있는 죄수를 데려오라 명하였다.
“네가 내 딸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사또!”
“만약 거짓이라면 어찌 하겠느냐!”
“어차피 죽을 목숨 거짓을 고해 무엇 하겠습니까? 제가 고치지 못한다면 당장 제 목숨을 거두어도 좋습니다.”
사또는 속는 셈 치고 아들에게 어디 한 번 해보라 명하였다. 그러자 아들이 이리저리 치료를 하는 시늉을 내면서 살며시 나뭇잎을 꺼내 사또 딸의 발목에 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면서 멀쩡하게 변하였고, 딸 역시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을 계기로 아들은 옥에서 풀려난 것은 물론 사또의 총애를 받아 사또의 사위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면서 글공부도 열심히 하여 몇 년 뒤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고흥 도화면에 사시는 김영진 前 교장선생님께서 어렸을 적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의 얼개를 간략하게 들려주셔서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뼈대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끝내 뉘우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끝까지 패악한 아들에 관한 비슷한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전반부는 흡사하지만 후반부에서 조금 달라집니다.
청년이 흥청망청 지내며 점점 버릇이 나빠지자 노부부는 할 수 없이 청년을 쫓아냈다.
“내가 물에 빠진 자네를 건져준 것은 자네를 살리려는 것이었네. 그런데 자네는 지금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이래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 이 집을 나가게.”
그러자 청년이 그만 앙심을 품고 거짓으로 관가에 고발을 했다. 할아버지가 도둑질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고을 사또에게 고해 바쳤던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
“사또!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도대체 도둑을 맞았다거나 금은보화를 잃어버렸다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어디 가서 그런 것들을 훔쳤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아무리 호소해도 사또는 들어주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할아버지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욕심 많은 고을 사또가 할아버지의 재산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갇혀 있는 옥에 뱀이 나타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할아버지가 살려준 뱀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뱀이 갑자기 할아버지 발을 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다시 스르르 옥문 밖으로 기어나가 버렸다.
‘사람이나 뱀이나 배은망덕하기는 마찬가지구나.’
뱀에게 물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린 발목이 퉁퉁 부어 허벅지만 해졌다. 나중에는 독이 온몸에 퍼져서 살이 시커멓게 죽어갔고, 점점 숨쉬기가 곤란해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옥문을 지키고 있던 옥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의원을 데리러 가는 동안 아까 그 뱀이 다시 스르르 기어 들어왔다. 그런데 풀잎사귀를 물고 와 아까 물었던 자리에다 갖다 대었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물린 상처가 아물고 부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았다.
옥사장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와 할아버지를 보더니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을 것 같았던 할아버지가 멀쩡하게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갑자기 동헌이 시끄러워졌다.
“사또가 뱀에게 물렸다! 급히 의원을 불러라! 급하다 급해!”
옥에 있던 의원이 급하게 뛰어갔지만 어찌 손을 써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서야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옳거니, 그 뱀이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까닭을 이제야 알겠구나.’
할아버지가 옥사장을 불러 자기를 사또에게 데려다 주면 당장 고쳐보겠다고 했다. 옥사장 역시 할아버지가 뱀에 물려 살아난 것을 목격한 바 있으므로 할아버지는 곧바로 고을 사또에게 인도되었다. 다 죽어가던 사또가 할아버지의 풀잎사귀 덕분에 목숨을 살리게 되었다.
살아난 사또에게 할아버지는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그러자 사또는 자신 역시 할아버지의 재산에 욕심을 부렸던 것을 뉘우치고는 할아버지를 옥에서 풀어주는 대신 패륜을 저지른 청년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어버렸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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