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누에가 된 공주
삼한시대 지금의 장성군 진원 지역에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이라는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 나오는 이 나라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경덕왕 때 진원(珍原)으로 이름을 바뀐 뒤에도 고려 때까지 이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다.
‘구사오단’은 664년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구획한 주(州)·현(縣) 가운데 분차주(分嵯州)의 속현으로서, 본래 ‘구사진혜(仇斯珍兮)’이었던 ‘귀단현(貴旦縣)’인 것으로 보인다. 구사오단의 줄임말로 ‘귀단’이 사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한연맹체의 일원이었던 구사오단국은 토착 세력을 유지한 채 3세기 중엽까지 유지되다가 백제에 귀속되었다.
구사오단국 왕은 비록 작은 나라의 왕이기는 하지만 부임한 이래 전쟁도 겪지 않은데다 풍년이 지속되어 아쉬울 게 없었다. 다만 아들이 없이 딸 하나만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공주의 이름은 수애였다. 수애공주는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다 보니 자칫 비뚤어질 수 있었을 텐데도 얼굴은 물론 심성마저 고와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아랫사람들에게도 공주가 아닌 듯 다정다감하게 대해 더욱 인기 만점이었다. 수애공주는 날 때부터 피부가 백옥처럼 하얘서 뭇 여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자라서는 뭇 사내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았다. 특히 수애공주가 나이가 들어 제법 아가씨 티가 나자마자 이 나라 저 나라 왕자들이 수애공주에게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데도 수애공주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수애야. 이에 너도 좋은 짝을 만나 혼인을 해야지 평생 혼자 살 생각이니?”
어느 날 왕이 공주에게 묻자 공주가 부끄러운 듯 볼이 붉어지더니 이내 다짐하듯 말하였다.
“아바마마. 저는 평생 아바마마를 모시며 살래요.”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수애공주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왕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말없이 껄껄 웃기만 하니 말이다.
수애공주는 자수가 취미였는데 말이 취미이지 그녀가 수놓은 자수 작품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다들 수애공주가 수놓은 자수 작품을 탐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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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기만 하던 이 나라에 어느 해 가을 이웃 나라가 쳐들어왔다.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연맹에 속해 있었기에 전쟁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구사오단국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 하는 등 나라가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당연히 왕은 근심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그러자 보다 못한 수애공주가 왕에게 건의를 하였다.
“아바마마. 적장의 목을 베어오면 부마로 삼겠다고 공포하옵소서.”
그렇게도 시집가기 싫다고 버티던 공주가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자와 혼인하겠다고 하자 왕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금지옥엽 키운 공주를 전쟁 통에 쉽게 시집보낼 수도 없겠지만 왕의 생각은 따로 있었다. 왕자가 없기 때문에 공주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부마가 될 사람을 함부로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생각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왕이 공주를 불렀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니? 혼인... 혼인 얘기 말이다.”
“네, 아바마마. 당장 어명을 내리소서.”
![[꾸미기]장성설화 - 누에가 된 공주 만화 02.jpg](/gears_pds/editor/news-fd74aeda-551d-4863-92ef-1648da2422af/1736438201512.jpg)
왕이 공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어명을 내리니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러나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목을 베어오면 어떻게 하지?’
말은 하지 못하였지만 왕은 물론 수애공주 역시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전쟁에 져서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누가 되었든 적장의 목을 베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령이 궁궐로 뛰어오더니 승전보를 알렸다.
“왕이시여! 적들이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갑작스런 승전보에 다들 기뻐 뛰고 얼싸안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왕과 수애공주는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막상 전쟁에 이겼다고 하니 혼인 문제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백마 한 마리가 궁궐로 들어오는데 적장의 목을 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꾸미기]장성설화 - 누에가 된 공주 만화 03.jpg](/gears_pds/editor/news-fd74aeda-551d-4863-92ef-1648da2422af/1736438255448.jpg)
왕은 비록 약속은 하였지만 공주를 말과 맺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비록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사람을 부마로 삼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낱 미물인 말이 적장의 머리를 물어왔으니 없던 일로 하겠다!”
왕이 서둘러 없던 일로 하겠다고 발표하고 돌아서려는데 수애공주가 나서며 왕에게 말하였다.
“아바마마. 어찌 한 번 하신 약속을 어기시려는 것입니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더구나 일국의 왕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사람의 말을 믿겠습니까?”
“아니, 그럼 어찌 하겠단 말이냐?”
“약속은 약속이니 제가 평생 말을 키우며 살겠습니다.”
듣고 보니 공주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공주가 말과 함께 살겠다니 누가 그것을 두고 보겠는가. 왕이 달래보기도 하고 윽박질러보기도 하고 백방으로 공주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지만 끝내 소용이 없었다.
수애공주는 백마를 자신의 처소로 데려가더니 마치 새신랑 대하듯 공손하게 대하며 돌보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왕은 어느 날 밤 신하를 시켜 몰래 말을 죽이고 말았다.
![[꾸미기]장성설화 - 누에가 된 공주 만화 04.jpg](/gears_pds/editor/news-fd74aeda-551d-4863-92ef-1648da2422af/1736438334400.jpg)
말이 죽자 수애공주가 사흘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백마를 어루만지더니 사람들을 시켜 말가죽을 벗기고는 뒤뜰에 말리는 것이 아닌가. 왕이 보기에도 너무 기가 막히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고 두고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그 말가죽이 수애공주를 감싸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졸지에 수애공주를 잃어버린 왕은 슬픔에 잠겨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꾸미기]장성설화 - 누에가 된 공주 만화 05.jpg](/gears_pds/editor/news-fd74aeda-551d-4863-92ef-1648da2422af/1736438355732.jpg)
이듬해 어느 산골 나뭇가지에 백마의 말가죽이 걸려 있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전하! 공주마마를 감싸고 사라진 말가죽을 찾았다 합니다!”
왕이 벌떡 일어나 신하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보니 하얗게 빛나는 것이 과연 그 말가죽이 틀림없었다.
신하가 가서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그 속에서 이상한 벌레들이 수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자 다른 신하가 다가가서 이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하였다.
![[꾸미기]장성설화 - 누에가 된 공주 만화 06.jpg](/gears_pds/editor/news-fd74aeda-551d-4863-92ef-1648da2422af/1736438463160.jpg)
“전하! 이 벌레는 아무래도 공주마마의 화신인 것 같습니다. 입은 말을 닮고, 나뭇잎을 먹는 모습도 마치 말이 풀을 뜯는 모습과 같으며, 몸은 희고 고운 공주님의 살결을 꼭 닮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벌레들을 가져다가 소중히 기르도록 하였다. 비록 수애공주를 다시 찾지는 못하였지만 신하의 말 대로 그 벌레들을 수애공주의 화신이라 생각하고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뽕잎을 먹고 있는 누에
그 벌레가 바로 누에였으며 말가죽이 걸렸던 나무는 뽕나무였다고 한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는 것은 공주의 자수 솜씨를 본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진원 지방에서는 누에나 번데기를 먹으면 공주처럼 살결이 고와지고 바느질 솜씨도 좋아진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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