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무신 가문의 후예 진무성 장군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5:29
고흥 설화

고흥 두원 출신 진무성(陳武晟 1566년~?)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장군으로 유명한데, 어려서부터 담력이 남달랐다고 한다. 진무성 장군의 담력은 어른이 되어서도 소문이 났다.

 

마전동(麻田洞)1) 동쪽에 있는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밤만 되면 이 집 저 집에서 가축이 몇 마리씩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처음에는 도둑이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도둑맞은 집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짓이 아니었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야 동네 사람들은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 지금의 고흥군 두원면 동신마을.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려워 떨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자 호랑이의 침입에 대비한 여러 가지 묘책을 짜내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다닐 만한 길목에 함정을 파놓고 덫을 놓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호랑이는 귀신처럼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가축을 해쳤다. 심지어 호랑이에게 당해 부상을 입은 사람도 생겨났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도 밤마다 온통 공포의 도가니였다. 날이 지면 바깥출입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어둠이 오기도 전에 집안에 들어앉아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민심까지 점차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동네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산에 나무하러 가서 호랑이 새끼를 잡아왔기 때문에 밤마다 호랑이 어미가 내려와 해코지를 한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일부에서는 동네에 부정한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며 누가 무슨 부정한 짓꺼리를 하였느니 하며 서로 음해하는 말까지 나돌았다. 밑도 끝도 없는 흉흉한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으면서 사람들끼리 서로 반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동네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나 진후평(陳後平)2)의 집을 습격하였다. 새벽잠이 없는 후평의 아버지 진무성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뜰을 지나 외양간으로 향하였다. 밤새 별 일 없는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2) 진무성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마도진만호(馬島鎭萬戶)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가하였다.

아버지 진무성이 쓰던 칠성검으로 많은 적을 참수한 공으로

개영국공신록(開寧國功臣錄)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런데 외양간 쪽에서 전해지는 공기가 느낌이 이상했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외양간 쪽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 같고 온몸이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진무성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무성은 생전 느껴보지 못하던 이상한 예감 때문에 고개를 갸웃갸웃 했다. 그러면서 외양간 앞에 다가서는 순간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하였다. 외양간 안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꾸미기]고흥설화 - 진무성 만화 01.jpg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한여름이었기 때문에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담력이 세고 용맹스런 호랑이라고 해도 날이 하얗게 밝아오는 새벽녘에 설마 하니 호랑이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무성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하지만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진무성은 무엇보다도 소가 걱정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소가 매우 큰 재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살펴보니 외양간 한쪽 귀퉁이에 몰려있는 소가 꼼짝달싹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호랑이가 천연덕스럽게 배를 쭉 깔고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소를 해치기 위해 들어왔던 호랑이가 자기보다 몸집이 큰놈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던 중에 깜빡 잠이 든 것으로 보였다.

진무성은 어서 호랑이를 내쫓고 소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외양간 바로 옆에 있는 쇠스랑을 번쩍 집어 들었다. 진무성이 쇠스랑을 치켜들고 잠자는 호랑이를 향해 내리치니 날카로운 쇠스랑에 호랑이의 왼눈과 머리통이 찍혀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인근 마을에서는 호환이 사라졌다. 그래서 단신으로 호랑이를 잡은 진무성의 명성은 이웃 고을에까지 떨치게 되었다.3)

 

3) ‘고흥의 전설’(고흥문화원, 1999년) 수록 내용에서 일부를 재구성.

 

담력도 담력이지만 진무성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진무성은 마을 뒷산에 임시로 매장을 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낮이고 밤이고 묘소 곁을 떠나지 않는 진무성에 대해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노승이 진무성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 마을을 지나가다 그대의 효성이 지극하다 말을 들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정말 기특한 일이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진무성이 손을 내저으며 겸손의 말을 하자 노승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의 효심이 대단하여 내 특별히 명당을 알려줄 터이니 내가 일러주는 곳으로 선친을 장례하시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노승은 지금의 고흥군 두원면 학림(鶴林)을 알려주고 떠나면서 “이제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할 사람이 나올 것이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진무성은 노승이 범상치 않아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길일을 택하여 선친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진무성이 어렸을 때 하루는 팔영산 아래를 지나는데 달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 그때 홀연히 도인이 나타나 바위 위에 걸터앉더니 진무성을 불러 세웠다.

“그대는 마전동 진무성이로구나.”

갑자기 나타난 도인이 자신을 알아보자 진무성이 깜짝 놀라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시기에 저를 아시는지요.”

그런데 도인은 진무성의 물음에 대답하기는커녕 들고 있던 편자4)를 바위 아래로 던지더니 주워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진무성이 도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없이 편자를 집어 도인에게 주었다. 그런데 도인이 다시 그 편자를 바위 아래로 집어 던지고는 다시 주워오라 하였다. 진무성이 다소 불쾌한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편자를 집어서 갖다 주었다. 그런데도 도인은 다시 그 편자를 바위 아래로 집어 던졌다. 진무성은 꾹 참고 다시 그 편자를 도인에게 집어 주었다.

그러자 그때서야 도인이 말하였다.

“그대의 나이가 삼십이 되면 반드시 크게 성공하리라.”

그 말을 남기고 도인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진무성은 하늘이 무언가를 계시한 것으로 보고 그 뒤로도 글공부와 무술 연마에 정진하였다고 한다.5)

 

5) 이 내용은 중국 전국시대 장량(張亮 ?~기원전186)이 황석공(黃石公)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해 받게 된 과정을 기록한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의 일부분과 비슷하다.

이하습리(圯下拾履 흙다리 아래에 신발을 줍다)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 하였다.

아마 진무성을 흠모한 누군가가 그를 찬양하기 위해

장량과 황석공의 고사에 빗대어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꾸미기]고흥설화 - 진무성 만화 02.jpg

진무성 장군의 기개는 이순신 장군 측근과의 일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장군이 처음 말단 병사(농사를 지으며 지역을 방위하는 병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순신 장군의 측근이 월권행위를 하는데도 그가 이순신 장군의 측근이라는 점 때문에 다들 어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무성이 나서서 그를 저지하였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의 위세를 등에 업은 측근이 진무성을 공격하였다. 진무성이 반격을 하더니 그를 흠씬 두들겨 팼다. 이 사실이 이순신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놀랍게도 진무성의 기개를 장하게 여겨 오히려 패장(牌將)6)으로 삼았다.

 

6) 관청이나 일터에서 일꾼들을 거느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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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는 적장의 머리를 베어 큰 공을 세웠다.

얼마 뒤 진주(晋州)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 장군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막중한 직임을 받아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를 내어 구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저 외로운 성이 날로 위급해지고 있는 것을 내가 차마 앉아서 볼 수만은 없으니, 내가 사람을 시켜 그쪽의 형세를 관찰하고 또 그 성중에 있는 장졸들에게 나의 뜻을 전하려고 하는데, 그곳에 갈 자가 누군가?”

그러자 한 사람이 자원하였다.

그런데 왜군의 포위가 삼엄한지라 그가 다시 돌아왔다. 이순신 장군이 크게 화를 내더니 그를 물러가라 하고는 다시 눈물을 흘리었다. 그러자 진무성이 나섰다.

“장군께서 이렇게 걱정을 하시는데, 어찌 살기만 도모하겠습니까. 원컨대 제가 서신을 받들고 가서 반드시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크게 기뻐하며 진무성에게 서신을 주어 보냈다.

진무성이 며칠 동안 험난한 길을 가던 중 적장을 해치고는 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풀숲에 숨어 몰래 적의 암호를 알아낸 다음, 남강을 헤엄쳐 건너 진주성 아래에 당도하였다.

성루를 지키는 자에게 신호를 보내니 그가 물었다.

“네가 적의 간첩이 아닌 줄을 어떻게 알겠느냐?”

이에 진무성이 말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보낸 문서가 여기에 있다.”

마침내 성루에서 줄을 내려주어 진무성은 그 줄을 타고 올라갔다.

성 안에는 김천일ㆍ고종후ㆍ황진ㆍ최경회 등의 여러 장수가 촉석루에 함께 앉아서 진무성이 올려보낸 이순신 장군의 서신을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이곳은 외로운 성이므로 하루 이틀 사이에 함락이 되고 말 것이다. 애석한 것은 온 성중의 군민(軍民)들이다. 그러나 호남의 백성들은 공을 의지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국가를 회복시키는 책임도 모두 공에게 달려있으니, 공이 어찌 한 발자국이나마 그곳을 떠나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무성을 떠나보내며 다시 말하였다.

“돌아가서 장군께 이렇게 여쭈어라. 우리들은 이제 다 끝났고, 국사는 오로지 공에게 기대할 뿐이니, 이 왜적들을 조속히 섬멸하여 이 치욕을 씻어주기 바라노라고.”

돌아오는 길에 적의 머리 수십 급을 베고 무사히 복귀하자 이순신 장군이 진무성 장군을 장하게 여겼다. 진무성은 뒤에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7)

 

7) <백호전서> 제23권 ‘제장전(諸將傳)’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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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성 장군은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34세가 되던 1599년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였다. 유원진(柔遠鎭)8) 첨사(僉使)9)·경흥부사·통제영 우후(虞候)10)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있은 뒤에 그 전공이 거듭 인정되어 다시 북방요지 구성(龜城)11) 군수에 임명되었다. 훗날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흥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8)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던 옛 고을.

9)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어로 종3품의 무관직.

10) 조선시대 각 도 절도사(節度使)에 소속된 종3품의 무관직.

11) 평안북도 중서부에 있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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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사에 있는 진무성 장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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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사를 계승한 고흥 무열사(武烈祠)에 있는 진무성 장군 동상

용강사는 오늘날 무열사(武烈祠)로 재정비되었는데, 무열사에는 진무성 장군의 영정, 칠성검(七星劍)과 일산(日傘), 그리고 진무성 장군이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와 1614년, 1633년, 1647년에 각기 관직을 제수 받았던 교지와 호구단자(戶口單子) 등 총 79매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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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두원면에 있는 진무성 장군 묘소

여양 진씨 진무성의 가계

 

진무성 장군은 여양 진씨로 시조는 여양군(驪陽君) 진총후(陳寵厚)이다. 진총후의 선대는 중국에서 귀화하였는데, 북송(北宋) 말엽 우윤(右尹) 벼슬을 지내던 복주(福州) 사람 진수(陣琇)가 난을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고려에 건너와 여양(驪陽)12) 덕양산 아래에 정착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진수의 후손 진총후가 고려에 출사해 예종 때 상장군(上將軍)13) 겸 신호위대장군(神虎威大將軍)에 이르렀다. 진총후는 1126년(인종 4년) 김향, 이공수 등과 함께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진총후를 시조로 하고 여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12)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13) 고려시대 중앙군의 최고지휘관. 무관으로는 최고위직인 정3품이다. 

 

시조 진총후의 아들 진준(陳俊 ?~1179)은 판병부사(判兵部事)14) 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문신들의 가족까지 대량 학살이 자행되자 학살에 적극 반대해 많은 사람들을 구한 덕장으로 유명하다.

 

14) 고려시대 상서병부(尙書兵部)의 으뜸 벼슬.

 

그의 아들 진광순(陳光恂 대장군), 진광수(陳光修 병부상서), 진광경(陳光卿 대장군), 진광의(陳光儀 대장군), 진광현(陳光賢 상장군) 등 5형제 또한 고려의 무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전통적인 무신의 가문에 문장의 꽃을 피운 사람은 진화(陳華)이다. 진한림(陳翰林)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213년(강종 2년)에 한림학사를 거쳐 서장관(書狀官)15)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그의 시재(詩才)는 고려의 대문장 이규보와 쌍벽을 이루어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이라고 할 정도로 이규보와 함께 글을 빨리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15) 정사(正使)·부사(副使)·기록관(記錄官) 등의 3사신 중 기록관으로 외교문서에 관한 직무를 담당하였다.

 

특히 금나라에 갔을 때 지은 ‘봉사입금(奉使入金)’ 시는 유명하다.

서화이소삭(西華已蕭索) 서쪽 송나라는 이미 쓸쓸해졌고

북채상혼몽(北寨尙昏蒙) 북쪽 진영은 아직도 혼몽한 상태일세.

좌대문명단(坐待文明旦) 앉아서 문명의 새 아침을 기다리노라니

천동일욕홍(天東日欲紅) 우리나라 쪽 태양은 붉게 동트려 하는구나.

 

이 시는 당시 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앞날을 예언한 시로 유명하다.

 

-시조 진총후(陳寵厚) 여양군(驪陽君)

-2세 진준(陳俊) 참지정사(參知政事). 판병부사(判兵部事)

-3세 진광수(陳光脩) 병부상서(兵部尙書)

-4세 진화(陳澕) 지공주사(知公州事)

-5세 진영헌(陳令獻) 한림학사(翰林學士)

-6세 진경(陳鏡)

-7세 진호문(陳好文)

-8세 진재기(陳再起) 병조참판

-9세 진창수(陳昌壽) 군수(郡守)

-10세 진웅도(陳雄道) 길주목사(吉州牧使)

-11세 진여훈(陳汝勳) 진사

-12세 진시우(陳時遇) 이조참판

-13세 진취정(陳就政)

-14세 진문(陳汶)

-15세 진세륜(陳世輪) 덕포수군첨절제사

-16세 진인해(陳仁海)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17세 진무성

 

여양 진씨 현대 인물

 

현대 인물은 진헌식(내무부장관, 제헌국회의원), 진의종(8·9·11·12대 국회의원, 보사부장관, 국무총리), 진필식(외무부차관, 캐나다대사), 진봉현(농림부차관), 진승록(고시위원장), 진형하(국회의원, 변호사), 진태구(서울고법부장판사), 진갑덕(약학박사, 영남대환경대학원장), 진종채(육군대장, 제2군사령관), 진두정(육군소장), 진치범(공군소장, 국회의원), 진념(해운항만청장), 진동식(의학박사, 연세대부총장), 진성규(서울고법부장판사), 진태하(문학박사, 명지대인문사회대학장), 진용철(서울시교위부교육감), 진계호(전주대법정대학장), 진우석(삼익공업 회장), 진봉섭(태백산업 사장), 진재철(부래당, 평리사장), 진인권(인권학원이사장), 진형근(동양전기사장), 진덕규(정치학박사, 이화여대법대교수), 진강백(동양화가), 진광수(이학박사, 부산대교수), 진광학(안전기획부서기관), 진광호(합천군문화원장), 진교근(서호주정공업 회장), 진국홍(국방부이사관), 진국환(서울대교수, 변호사), 진규영(영남대교수), 진근찬(공학박사, 국방부과학연구실장), 진기남(강릉경찰서장), 진기배(국회의원), 진기정(공주전문대학장), 진기영(영광군수), 진기풍(전북일보사장), 진기홍(광주체신청장), 진대제(전자공학박사, 미IBM연구원), 진덕호(청주세무서장), 진동수(재무부서기관), 진병춘(부산고법판사), 진복기(민주정의당당수), 진석중(국회의원), 진선주(충북대교수), 진성계(국토통일원교수), 진성진(수원지검검사), 진세인(건국대교수), 진영(변호사), 진영길(경상대교수), 진영철(공학박사, 전북대교수), 진영한(연세대교수), 진용상(변호사), 진용옥(경희대교수), 진용우(문학박사, 경희대교수), 진원숙(문학박사, 계명대교수), 진원중(교육학박사, 서울대교수), 진위교(철학박사, 경북대교수), 진현수(서호주정공업 전무이사), 진일섭(미국오클라호마종합대학교수), 진윤구(원주고교장), 진성섭(신일여고교장), 진경종(삼양사상무) 씨 등이다.16)

 

16)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 82- 여양진씨(驪陽陳氏)>에서 인용.

 

여양 진씨는 2000년 인구센서스 기준으로 전국에 97,3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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