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상사소(想思沼)와 상사암(想思岩)

황전천을 따라 새롭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사진 오른쪽이 옥녀봉이고 왼쪽이 관암산 자락이다.
건구 칠동. 순천시 황전면 죽청리 일대 7개 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마을 뒷산이 귀호와룡(歸虎臥龍)이라서 개를 키우면 절름발이가 된다고 하여 절름발이 건(蹇), 개 구(狗)를 써서 건구라 한다.
그런데 아주 옛날 건구 칠동 처녀가 시집을 가자마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시집을 가자마자 원인모를 병에 걸려 죽자 아무리 출가외인이라 해도 시댁에서 처녀의 시신을 돌려보냈다. 마을 사람들도 꺼림칙하여 처녀의 시신을 마을로 들일 수 없다고 막았다. 결국 처녀의 가족들은 옥녀봉 자락에 딸의 시신을 묻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멀리 구례로 시집을 갔던 이 첨지네 둘째 딸이 역시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그 쪽에서 장례를 치러 친정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건구 칠동에 액운이 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문을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술자리 이야기 꺼리로 나도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나무 골 김씨네 딸이 시집간 지 이틀 만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 마을에 액운이 끼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거나 나름대로 원인을 파악하느라 다들 난리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속 시원하게 원인을 짚어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신애비로 유명한 쌍봉댁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시집간 처녀들이 연이어 죽어 돌아오자 중매를 한 쌍봉댁 입장에서도 속이 탔을 것이다. 그랬는지 별의별 궁리를 다 하더니 마침내 그럴싸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최근에 죽은 처녀들이 시집갈 때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뭔지 아슈?”
쌍봉댁 말에 다들 가까이 다가앉았다. 빨리빨리 이야기하라 다그치듯 아낙네들은 하나같이 쌍봉댁을 주시하였다.
“바로 옥녀봉 샛길로 갔다는 거여. 옥녀봉~”
아무래도 옥녀봉 샛길로 간 것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귀담아듣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옥녀봉 샛길로 간 것이 뭐가 문젠디?”
누군가가 반문을 하자 쌍봉댁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평리에는 옥녀봉이 있다. 옥녀봉 건너편에는 관암산이 있고, 그 사이로 황전천이 흐르고 있다. 옥녀봉 샛길이라면 바로 그 황전천을 따라 난 길을 말하는 것인데, 그 길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사람들은 쌍봉댁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점차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로 탁발을 왔던 노 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황전천으로 안내를 해달라고 하였다. 반신반의하던 마을 사람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스님을 모시고 황전천으로 갔다.
황전천에 가서 여기저기를 살피던 스님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상사암이었다. 옥녀봉 중턱에 100여m 가까운 절벽이 있는데 그 바위가 상사암이고 그 절벽 아래에 있는 소(沼)가 상사소다.

전면에 보이는 절벽이 상사암이고 그 아래로 상사소가 있다. 절벽 위로는 나무가 우거져 접근이 쉽지 않다.
“저기 저곳에 액운이 끼어 있소이다. 저곳에서 제를 지내 원혼을 다시 한 번 달래야 합니다.”
그랬다. 마을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전설이 스님 때문에 되살아났다.
옛날 백제 때 황전면 백야(白也) 마을에 버들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고운 자태 때문에 뭇 총각들이 버들이를 사모하였지만 버들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축제가 열렸다. 놀이패들도 불러오고 한바탕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는데, 삽재 팔동에 사는 삼돌이라는 총각도 한 데 어우러졌다. 그러다 버들이와 삼돌이는 한 눈에 서로 반하였고, 그 날 이후 둘은 몰래 만나며 사랑을 꽃피웠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버들이 부모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급기야 버들이를 방안에 가둔 채 바깥 출입도 못하게 하였다.
몇 달째 버들이를 만나지 못하게 된 삼돌이는 상사병으로 앓아 눕게 되었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며칠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버들이 방문을 열고 삼돌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버들이는 깜짝 놀라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삼돌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데 버들이 부모는 버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구렁이를 보고 곧장 따라 들어가 구렁이를 막대기로 내쫓았다. 버들이는 구렁이를 삼돌이로 알고 울며불며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돌이는 가끔씩 버들이를 찾았다. 그러나 버들이 부모 눈에는 구렁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은 삼돌이의 원혼이 구렁이로 변해 버들이를 찾은 것이었다. 구렁이가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버들이는 수척해지고 마침내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그래서 버들이 부모는 삼돌이의 원혼을 달래려고 유명한 무당을 불러 버들이를 가마에 태우고 옥녀봉 중턱 바위 위로 올랐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의 그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다. 깜짝 놀란 무당이 가마를 놓쳐 버들이가 탄 가마가 절벽 아래 소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 구렁이가 절벽을 타고 내려가더니 버들이를 감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구렁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굿을 했던 바위를 상사암이라 하고 구렁이가 버들이를 감고 빠진 소를 상사소라 불렀다. 지금도 바위에는 구렁이가 바위를 타고 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가까이서 본 상사소. 구렁이가 타고 오르던 흔적처럼 일정하게 홈이 패어 있다.
절벽 아래로는 물살에 패인 흔적이 크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물이 휘감고 돌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상사암에서 버들이와 삼돌이의 혼을 달래는 제를 지냈는데 언젠가부터 흐지부지 되었다더니 다시 그 원혼이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다시 두 사람의 명복을 비는 제를 지냈고 다시는 액운이 깃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건구 칠동 처녀들이 시집을 갈 경우 순천으로 시집가면 마당재나 건구재를 넘어 갔고, 구례로 시집을 가면 저촌재를 넘어 험한 산길로 갔다. 괜히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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