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이순신의 스승 정걸 장군

고흥정걸가교지류고문서 중 일부 ▶고흥정걸가교지류고문서: 고흥 압해정씨 정걸가에 전래되는 34건의 교지류 고문서들은 대부분이 정걸과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친 고신교지(告身敎旨)들이란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점에서 이어진 한 무반가의 일괄문서란 점에서, 특히 전라좌도의 해방기지(海防基地)인 흥양출신의 일가 삼대(一家三代)가 남긴 무관 사령장들이란 점에서 가치가 크다. 고신(告身)이라는 용어는 중국 당나라 때 관료의 임용장으로 쓰인 역사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부터 조선말까지 관리의 품계나 관직을 주는 사령장을 고신이라 했다.
영화 ‘명량’이 전무후무할 대기록을 세우면서 새삼스럽게 이순신 장군이 재조명되고 있다. 더불어 이순신 장군 유적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영웅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을 도왔던 민초들의 구국의 항쟁이 있었기에 영웅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창간 특집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인 정걸 장군을 재조명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해인 1592년 9월 부산포해전 당시의 일이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이순신 장군이 조방장 정걸(丁傑) 장군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영공, 정운 부대가 진격을 한다는데 괜찮겠습니까?”
정걸 장군은 이미 이순신보다 20여 년 전에 경상우수사와 전라좌수사를 지낼 정도로 이순신에게는 까마득한 대선배였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보다 31세나 연상인지라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육전과 해전 모두에 능통한 임진왜란 당시의 최고의 무관이었는지라 이순신이 임금에게 청하여 정걸 장군을 파견토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순신은 정걸 장군에게 영공(令公 절충장군 이상에 대해 높여서 부르는 존칭)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날도 저물고 적의 기세가 등등하니 후퇴했다가 내일 다시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정걸의 조언을 구한 이순신이 만류하였는데도 정운은 그대로 적진 속으로 돌격하여 싸우다가 왜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죽었다.
‘호남절의록’에 보면 부산포해전에 참전한 정걸 장군에 대해 “남쪽 해안의 세 수군절도사(이순신, 이억기, 원균), 조방장 정걸 등은 연합작전을 펴서, 왜적을 모두 물리치고 적의 북진을 완전히 차단한 전과를 올렸으나 이 작전에서 정걸 장군의 말을 듣지 않은 정운이 전사한 손실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이순신의 스승으로 알려진 정걸 장군은 또한 철을 뚫고 들어가는 천경장경이라는 병기를 만들어 적의 철선을 부수고, 판옥선을 만들어 가는 곳마다 크게 이겼다. 장군이 판옥선을 개발한 것은 그가 1556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여 1561년에 온성부사로 가기까지의 기간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영조 때에 어사 이이장이 판옥선을 보고 왕께 말하기를 “이 배가 너무 오래되어 쓸모가 없으니 해체함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판옥선은 옛날 명장 정걸 장군이 만든 것이니 그대로 보존하라.”라고 하였다 한다.
마복산과 정걸 장군
고흥에서 가장 유명한 산 가운데 하나가 포두면 차동마을 주변에 길게 늘어서 있는 마복산(馬伏山)이다. 538m 높이의 이 산은 화강암으로 된 바위가 산 전체를 감싸고 있어 외관상으로는 별 볼 일 없이 느껴진다. 마복산은 이름 그대로 말이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형태의 명산 중의 명산이다. 거대한 바위 하나가 아니라 조그마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기암괴석이 얼마나 많으면 금강산에 견주어 소개골산이라 부르겠는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일이다. 고흥 출신인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때까지 팔순 노구를 이끌고 싸우다 2년 전에야 은퇴를 하고 고향인 포두면에 내려와 있었다.
마침 왜군들이 발포함대를 피하여 상포로 침범하여 육상하려 하였다. 그래서 해창만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정걸 장군이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였다.
십여 년 동안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충청도수군절도사와 전라도 방어사로 이순신 장군을 도왔던 백전노장인지라 고흥에서는 영웅 가운데 영웅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흔쾌히 정걸 장군의 지시에 따랐다.
장군이 마을 사람들에게 못 쓰는 놋그릇을 모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에서 놋그릇을 가져왔다. 난리 탓인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양의 놋그릇이 모였다.
“이제 각자 놋그릇을 깨끗하게 닦아주시오.”
사용하지도 못할 놋그릇을 닦으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즉각 재와 지푸라기를 가져와서 놋그릇을 반짝반짝 닦았다. 그 만큼 장군의 신망이 컸던 것이다.
놋그릇을 다 닦고 나자 장군은 놋그릇을 손톱 크기로 작게 자르라 지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망치며 끌 등을 가져와 놋그릇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놋그릇을 다 자르자 장군은 놋그릇 조각을 자루에 담아 마복산으로 올랐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바위마다 잘 보이는 곳에 놋그릇 조각을 놓아두게 하였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정걸 장군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난 후 장군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이게 한 뒤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잔치를 벌였다.
“아니, 장군! 왜군들이 쳐들어온다는데 이렇게 잔치를 벌여도 됩니까?”
오랜만에 술과 음식을 먹게 되어 기분은 좋았지만 뭔가 찜찜하였던 것이다.
“마음 푹 놓으시오. 자, 고생했으니 다들 한 잔 쭉 들이킵시다.”
장군께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고 마을사람들은 이내 술과 음식에 푹 빠졌다.
마을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을 즈음 왜군 병선들이 해창만 인근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왜군 장수로 보이는 사람이 배를 멈춰 세웠다.
“멈춰라!”
그러더니 해창만 너머 지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멀리 동남으로 뻗어 있는 마복산의 산세가 마치 수천 마리의 군마가 매복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걸 장군이 놓아둔 놋쇠 조각들이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 무슨 일입니까? 어찌할까요?”
“분명 수많은 군마들이 매복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단 물러서자!”

발포함대를 두려워하여 해창만 쪽으로 진입하려던 왜군들이 급기야 마복산을 보고 놀라 물러서는 바람에 한 동안 고흥 일대에는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얼마 있지 않아 정걸 장군은 향년 84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총명하고 용감했던 어린 시절
1514년(중종 9년) 고흥 포두면 길두리에서 태어난 정걸 장군은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 선생의 6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어른 이상의 담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였다.
장군이 여섯 살 때 일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여가 마복산으로 향하였다. 번제등 언덕을 넘던 중 상여를 내리고 노제를 지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걸인 한명이 다가왔다. 다들 거들떠보지 않는데 어린 걸이 말하였다.
“어머니, 이분 먹을 것 좀 주세요.”
어린 아들이 부탁하자 걸의 어머니가 걸인에게 먹을 것을 내주었다. 음식을 먹고 난 후 상여꾼들이 일어서는데 그만 상여 손잡이가 부러지는 것이 아닌가. 다들 불길한 징조라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자리가 명당인데 어디로 가려 하는고.”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너무도 또렷하여 둘러보니 조금 전 그 걸인이 하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어차피 상여를 더 이상 들고 가기도 힘들게 되었기에 그 자리에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예의 그 걸인이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쇠갓을 쓴 여자가 지나가거든 하관을 하시오.”
그러더니 걸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마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어린 걸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지금 하관하십시오. 쇠갓 쓴 여자가 지나갑니다.”
아버지가 돌아보니 일꾼들에게 새참을 주려고 오는 여인의 머리 위에 솥뚜껑이 얹혀 있었다. 그래서 하관을 하고 장례를 치렀는데, 그 일로 인해 어린 정걸의 이야기는 고흥 바닥에 파다하게 퍼졌다.
의녀 대장금과의 만남
1533년(중종 28년) 봄, 정걸 장군은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한양 구경을 가게 된다. 정극인 선생의 6세손인 정걸의 먼 친척이 한양에서 기별을 보냈는데, 아버지께서 한양에 올라가는 길에 아들 걸을 데려간 것이다.
걸은 태어나서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잠시 시간이 나서 장에 갔는데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이후로 고흥에서만 자랐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때 갑자기 인파를 뚫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가다가 어린 걸과 부딪쳤다. 정작 어린 걸이 넘어졌는데도 의원으로 보이는 지체 높은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그때 예쁜 의녀 한 사람이 걸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니?”
“멀리 흥양(지금의 고흥)에서 오는 길입니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전하께서 병에 걸려 우리가 정신없이 움직이다보니 어린 너를 다치게 하였구나.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그러고 보니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아왔다. 막상 대답을 하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총명하게 생겼구나. 상을 보아하니 너는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겠구나. 무예 훈련에 힘쓰도록 해라.”
대장금(大長今)이었다. 중종 임금이 몇 달 동안 앓다보니 내의원과 내의녀들이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약재를 구하러 도성 안팎을 뛰어다니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대장금을 만나게 된 정걸은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매일같이 무예 훈련을 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정걸은 비봉산 중턱에 있는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하였다.
하루는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이 걸을 시험해보기 위해 초분골에 다녀올 수 있겠느냐고 부추겼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선산에 묻지 않고 가매장 하는 곳이 초분골이다. 제 아무리 담력이 세다 한들 감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이 어두운 밤에 갈 수 있을까?
“무덤마다 앞에 넓적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콩알을 하나씩 놓고 올 수 있겠니? 무서우면 그만 두고.”
그런데 거절할 줄 알았던 정걸이 태연하게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친구들이 더 동요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여럿이기에 용기를 내어 미리 초분골로 가서 숨어 있었다. 잠시 후 정걸이 나타났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마다 앞에 넓직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콩알을 하나씩 놓고 다녔다. 숨어있던 아이 가운데 한 명이 걸을 놀래주려고 귀신 흉내를 내었다.
“배고파~ 배고파~”
그 소리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 제법 음산하게 들렸다. 그런데도 정걸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배가 고프냐? 그러면 콩알 하나씩 더 먹어라!”
그러더니 돌 위에다 콩알을 하나씩 더 얹어 놓았다 한다.
무과에 급제한 정걸
1544년(중종 39년), 31세의 정걸은 늦게야 과거길에 올랐다. 과거도 중요하였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남해안 일대를 침범하는 왜구들과 맞서 싸우다보니 정작 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 한 흥양현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걸은 한양으로 올라갔다.
북쪽에서는 여진족의 도발이 만만치 않고,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만만치 않은 까닭에 이번 무과 별시는 궁궐에서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치러졌다.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있던 중종 임금이 의녀들의 부축을 받은 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다. 먼발치서 임금을 바라보던 정걸이 깜짝 놀랐다. 임금을 직접 부축하는 내의녀가 오래 전에 보았던 바로 그분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 바로 앞에까지 간 정걸 장군을 내의녀 대장금이 바라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오래 전에 보았던 정걸을 기억하였던 것일까?
무과에 급제하자마자 장군은 훈련원 봉사(종8품)를 맡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훈련원 봉사로 임직하자마자 곧바로 선전관(宣箋官)으로 발탁된다. 지금으로 보면 청와대 무관쯤으로 볼 수 있다. 동기들은 물론 상관들조차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임금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니 출세는 시간문제였다.
장군이 선전관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종 임금이 지나가다 물었다.
“자네가 정걸인가?”
“네, 전하. 소인이 정걸이옵니다.”
“음. 듬직하게 생겼구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써주게. 내의녀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랬다. 정걸을 눈여겨보아온 대장금이 정걸 장군을 임금에게 추천하여 곧바로 선전관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장군은 대장금의 후원으로 선전관으로 무려 9년을 근무하게 된다.
남북의 오랑캐를 물리치다
1553년(명종 8년), 지금의 의주 일대에서 오랑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자 병조에서 정걸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정걸은 서북면 병마만호로 간다. 정걸 장군이 부임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오랑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주춤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인 전라도 영암의 달량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했다.
1555년(명종 10년)의 일이었다. 당시 영암군 달량포와 어진포에 왜선 60여 척이 침입하여 영암, 강진, 장흥. 해남 등을 휩쓴 대변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전라도 순찰사 이준경이 임금께 장계를 올려 군관 중 정걸을 숙배(임금께 인사드림)없이 보내주도록 간청하였다.
“서북면 병마만호 정걸 장군을 보내주시옵소서. 너무도 급하옵니다.”
임금께 인사드리는 것도 없이 임지로 가는 것이 무례하다는 일부의 지적도 있었지만 당시의 사태가 얼마나 화급했는가, 그리고 장군에 대한 안팎의 믿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걸 장군은 내려오자마자 왜구를 격퇴하였다. 더구나 멀리 고흥 나로도까지 쫓아가 왜구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달량왜변의 평정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장군은 그해 8월 남도포(진도) 수군만호로 부임한다. 장군의 나이 42세 되던 해이다.
장군이 내려온 이후 남도포 관내 영암, 진도, 해남, 강진, 흥양(고흥) 일대에는 왜구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때 초도에 왜구가 침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장군은 멀리 여수 앞바다에까지 출정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56년(명종 11년)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라우수사 최호는 왜적이 몰래 초도에 정박하였을 때 적의 선봉을 보고는 지레 겁을 먹고 후퇴하여 피하고 진격하지 않았고, 남도포 만호 정걸이 홀로 진격하여 힘껏 싸워서 모든 배의 왜적을 전부 잡았습니다. 그런데 최호가 계문할 때에 공을 자기에게 돌려서 가선대부에까지 올랐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지금도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이 일로 최호는 파직을 당한다.
정걸 장군이 남서해안을 지키자 더 이상 노략질을 하기 힘들게 된 왜구들이 이번에는 서쪽으로 돌아 태안반도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정걸 장군을 1556년(명종 11년) 부안현감으로 보냈다. 장군은 부안현감으로 있으면서 역시 태안반도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은 정걸 장군은 종6품 현감에서 일약 종3품인 부사로 고속 승진을 한다. 그리하여 온성도호부사로 부임한다.
온성과 종성은 함경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군사요충지로서 이에 조정에서도 이곳에 도호부를 설치하여 가장 믿을 만한 장수를 파견하였다.
온성도호부사로 발탁된 정걸 장군은 온성에서 7년간 근무한 후 1568년(선조 1년)에 종성부사로 옮겨 4년을 근무하였다. 장군이 맡고 있던 11년 동안 북방에는 단 한 번의 변란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 백성들은 장군의 그러한 공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웠다. 북방의 안정을 도모한 공을 인정받아 장군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임금을 호위하는 정3품 무관)이 된다.
정걸 장군의 파직과 복직
잠시의 평화가 지나간 뒤 또 다시 왜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1572년(선조 5년) 장군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보낸다. 그런데 이듬해 하동 백성이 왜구에게 잡혀갔는데도 보고하지 않은 현감 이광준 등을 추고하는 과정에서 장군도 연루가 되고 만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동에 사는 백성 9명이 왜적에게 잡혀간 것을 숨기고 아뢰지 않았으니, 현감 이광준, 우후 정승복은 나추(拿推 구속수사)하고 수사 정걸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推考 불구속수사)하도록 명하소서.”
억울하게 파직된 장군은 2년 후인 1575년(선조 8년) 서용(敍用 죄가 있어 벼슬을 박탈했던 사람을 다시 임용)된다.
그 후 전라좌수사, 경상우수사, 절충장관, 장흥부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창원부사, 전라우수사 등을 두루 역임하던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때에 전라좌수영 경직(京職)으로 부임한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것이 1591년(선조 24년)의 일이니 정걸 장군은 이순신의 14년 전관(前官)인 셈이다.
경직(京職) 일명 ‘조방장(助防將)’이란, 누구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임금 직속으로 절도사의 조언자 및 감독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난중일기 등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휘하 전투 조직에 정걸 장군의 기록이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산대첩에서 정걸 장군은 불행히도 적군의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게 된다. 이에 대해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정걸 장군은 총탄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 않았는데 그들은 포탄을 무릅쓰고 죽음을 각오하며 나가 싸우다가 혹은 죽고, 혹은 상하였으며”라고 하고 있고, <임진전란사>에는 “정걸이 총탄을 맞아 전상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주대첩의 조력자 정걸
옥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이순신을 도와 커다란 전과를 남기고도 정걸 장군은 또다시 79세의 나이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다. 그때 행주산성에서는 평양에서 퇴각한 왜군 3만여 명의 병력과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 병력이 서로 밀고 밀리면서 혈전을 벌인다.행주대첩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 낸 정걸 장군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날 묘시에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함을 구해주었다.”고 했고 ‘연려실기술’에는 “전투 중에 화살이 다 되어 진중이 위기인데 정걸이 배 두 척에다가 화살을 실어와서 같이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정걸 장군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권율 장군, 김천일 장군과 함께 왜적을 섬멸하러 나섰다. 1593년(선조 26년) 4월 20일 서울을 탈환한 정걸 장군이 한강으로 도망가는 왜적을 끝까지 쫓아가 섬멸하자 이에 겁먹은 왜적은 화의편지를 보낸다. ‘임진전란사’에는 소서행장이 화의를 위해서 2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하나는 예조판서 윤근수에게, 다른 하나는 충청수사인 정걸에게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도체찰사 유성룡이 정걸로부터 이 서신을 받아보고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것을 곧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에게 보내고 말았다.소서행장이 정걸 장군에게 보낸 화의 편지가 조정에 전달되지 않고 유성룡에 의해 오히려 명나라 군대에게 정보가 유출됨으로써 조정이 명나라 군대의 수중에 들어가게 만들고 왜적들은 쉽게 도망가도록 퇴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에서 퇴각한 왜적들이 남해안쪽으로 집결하자 이순신 장군은 정걸 장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한 장계를 두 차례 올린다.이순신 장군이 5월 10일에 보낸 장계 내용을 보면 “삼가 아뢰옵니다. 도망가는 적을 섬멸해야 하는 이 때 병력이 극히 외롭고 약함은 참으로 딱하고 걱정되는 바이기도 하며, 또한 적의 도망해 돌아감이 더딜지 빠를지 예측하기도 어렵사오니 엎드려 청하건데 충청도 해군이 밤낮을 가리지 말고 뒤따라와서 힘을 합해 적을 무찔러 하늘에 닿는 치욕을 씻게 하소서.”라고 쓰여 있다.6월 1일 어명을 받고 한산도에 도착한 정걸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합세하여 한산도를 지키자 왜적들은 이에 놀라 창원에서 함안을 거쳐 퇴각을 한다.이를 지켜본 이순신 장군은 장계를 올리기를 “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의 진중에 머물렀다고 들었습니다. 이분에게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필시 감동할 것입니다.”라고 높이 치하했다.그해 12월 전라방어사로 부임한 정걸 장군은 남서해안을 오가며 왜적토벌에 나섰는데 ‘호남절의록’에 보면 “정걸 장군은 전선의 갑판을 궁(弓)자형으로 만들고 철로 만든 불화살과 큰대포 등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고 쳐부수니 적들은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서로 놀래 도망갔다. 선무원종공신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정걸과 이순신의 운명적인 만남
1580년(선조 13년)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전라좌수사는 성박 장군이었다. 하루는 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이순신에게 발포 진영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이순신은 관아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니 함부로 베어 사사로이 쓸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발끈한 좌수사가 급기야 좌수영으로 이순신을 호출하였다.
“감히 만호 주제에 내 명령을 거역한단 말인가? 명령불복종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오?”
그러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순신 장군은 비록 좌수사 앞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부당한 명령은 들을 수 없소이다.”
그러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의 좌수사가 급기야 칼을 빼어들고 마치 이순신을 칠 듯이 달려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우레와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 무슨 짓이오!”
장군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흰 수염을 날리며 뛰어들더니 좌수사를 막아섰다. 당시 경상우수사로 있던 정걸 장군이 지나는 길에 전라좌수영을 방문하였다가 이 광경을 보고 개입한 것이다.
정걸 장군이 막아서자 좌수사도 물러섰다. 같은 수사의 직분이었지만 연배 차이가 커서 감히 말도 함부로 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정 장군이 다음 날 발포로 이순신을 찾았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두 사람은 마치 친구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이순신으로서는 아버지 같은 정걸 장군의 옛이야기들이 하나하나 금과옥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왜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이순신은 실전 경험이 많은 정걸 장군의 조언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580년(선조 13년) 발포만호로 잠깐 복무하였을 뿐 해전 경험이 거의 없는 반면, 정걸 장군은 해전과 육전을 두루 섭렵한 백전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 정걸 장군을 조방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전라좌수영에는 5관 5포가 설치되어 있는데, 정걸 장군의 고향인 고흥에만 1관 4포가 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다양한 경험이 축적된 정걸의 경륜은 실전에서 매우 유용하였을 것이다. 또한 정걸 장군이 판옥선을 개발하였던 점에 비추어볼 때 다양한 무기개발과 사용 등에서도 많은 조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92년(선조 25년) 옥포해전, 이순신과 정걸은 1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도록 결정적인 조언을 한 정걸 장군은 한산대첩은 물론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조방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런데 한양에서 퇴각한 왜군이 한산도 쪽으로 집결하려 하자 이순신 장군이 충청수사로 가있던 정걸 장군을 보내달라고 장계를 보낸 것이다.
정걸 장군과 이순신 장군은 태어나기는 31년 차이가 나지만 묘하게도 한 해에 죽었다.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종4품)로 있을 당시 정걸 장군은 경상우수사(정3품)였다. 그러니 직계가 3단계나 차이가 났던 셈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사단장과 중대장 차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도움을 요청한 이순신이나 팔순 노구를 이끌고도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간 정걸 장군의 운명적인 만남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어쩌면 예비된 만남이었을 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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