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발포만호 황정록과 열녀 송씨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54
고흥설활

새벽 일찍부터 부산하다. 장수로 보이는 남편은 군장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고 아내는 그 뒷수발을 하느라 정신없다. 아직 단잠에 빠져있을 법한 어린 아이들 역시 잠에서 깨어 물끄러미 그런 엄마 아빠를 쳐다보고 있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닌 듯싶다.

황정록. 발포만호인 그는 부임 초부터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많은 해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오늘도 한산도 쪽으로 왜적 해군을 방어하기 위해 나선다. 왜적 해군을 방어하는 것은 왜적의 군량을 막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역할이었다.

남편과 아빠를 전장에 내보내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황 만호의 가족들은 왠지 느긋하다.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길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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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포 포구 전경. 먼 옛날 황정록 장군이 발포 함대를 이끌고 출전하였을 당시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유군장으로 한산도해전에 참전한 황정록은 발포 함대를 이끌고 나아가 왜선 1척을 불태우고 적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얼핏 보기에는 전과가 별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군을 담당하는 황 만호의 신출귀몰한 작전은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황 만호는 이후에도 안골포해전을 비롯하여 부산해전 등의 해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발포만호 황정록.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발포만호로 부임하였다. 1441년(세종 23년)에 고흥 도화면 발포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었으니, 그로부터 150년 가까이 지나 황정록이 발포만호로 부임한 셈이다. 수군 만호는 육군의 병마동첨절제사와 함께 종4품 무관직이었으니 상당히 높은 직급이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수군 만호가 경기도 5명, 충청도 3명, 경상도 19명, 전라도 15명, 황해도 6명, 강원도 4명, 영안도(함경도) 3명, 평안도 4명이었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인 1597년(정유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여전히 갈팡질팡하였고, 급기야 이순신 장군은 간신들의 시기와 중상모략으로 파직을 당하였다.

1남 2녀의 어린 자식들을 둔 황 만호는 전투에 나아갈 때마다 세 자녀와 부인 송씨에게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혹시 자신이 잘못 되더라도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는 길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잦은 해전에도 불구하고 부인 송씨는 전투에 나가는 남편을 격려하였으나 늘 어린 자식들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칠천량 전투에 나가기 전날 밤에는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온 몸을 감쌌다.

그래서 막 잠자리에 든 남편을 깨웠다. 그러나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바람소리에도 잠이 깨던 그였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금세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다.

그런 남편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부인 송씨는 아침에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송씨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잠에 빠졌다 일어나보니 언제 일어났는지 황 만호가 갑옷으로 갈아입고 전장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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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하지만 불러놓고도 부인 송씨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였다. 남편의 결연한 모습을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남편을 말려볼까도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까 저어하여 송씨는 그렇게 말없이 남편을 보냈다.

남편이 전장에 나간 후 송씨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마음 조리며 지내던 송씨에게 날아든 비보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사실 요 며칠 동안 송씨는 뭔가 꺼림칙한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기분 나쁜 생각 때문에 혹시라도 남편에게 정말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멀리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한눈에 보아도 남편의 전령이 분명하였다. 늘 소식을 전해주던 전령이기에 멀리서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먼발치서 전령의 모습을 보던 송씨는 그 자리에 덜컥 주저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송씨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발포 함대를 이끌고 칠천량(漆川梁 거제도 칠천대교 밑 해협)으로 출동한 황 만호는 예전처럼 유전을 통해 왜적을 유린할 궁리를 하였다. 그런데 전투를 지휘하던 원균을 비롯한 장군들이 놀라 도망가다 원균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수들이 죽는 바람에 조선 수군의 대오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조선 판옥선이 도망을 가는데도 발포 함대만 끝까지 버텼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황 만호는 부하들에게 피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대부분의 부하를 피신시킨 뒤 황 만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끝까지 버티다 결국 왜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소식을 전하던 전령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문을 열었다.

“참, 부인.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만호께서 끝까지 저항하자 왜적들이 발포로 응징하러 온다고 합니다. 황 장군의 가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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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를 듣고 하루 종일 넋을 잃고 있던 송씨는 어린 자식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누구에게 들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편이 왜놈들 총탄에 맞고 죽음을 당하였는데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더러운 왜적의 손에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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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절벽 위에 고흥군에서 설치한 송씨 동상. 먼 바다를 바라보는 송씨의 뒷모습이 비록 동상이지만 무척이나 처량해 보인다.

송씨의 두 눈에는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두 아이는 양팔에 낀 채 마을 동쪽에 있는 우암 절벽에서 깊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슬픔이 담긴 사연을 전하며 그곳을 열녀절벽이라 부른다. 지금은 고흥군에서 절벽 위에 송씨 부인의 동상을 세워 발포를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그런데 정유재란이 끝난 몇 년 뒤부터 발포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고 주민들은 질병에 걸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논하고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를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팔순 노인이 선몽을 하였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어젯밤 자신의 꿈에 정유재란 때 숨진 발포만호 황정록과 그를 따라 순절한 부인 송씨, 그리고 어린 자식 세 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마을이 편안하려면 동영산 상봉에 제당을 짓고 동제를 지내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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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고흥 동영산 상봉에 오르면 열녀 송씨를 기리는 제각과 비석이 있는데, 이제는 제각을 찾는 발길이 뚝 끊어진 채 비석조차 쓰러져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노인의 말에 따라 곧바로 동영산 상봉에 제각을 짓고 비석을 세운 후 동제를 지냈더니 질병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이듬해부터 풍년이 되었다고 한다. 발포에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400여 년 동안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그래서인지 해마다 풍년은 물론이요 지금까지 동네가 평온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동제를 지낸 후 구천을 헤매던 황 만호 가족이 모두 왜가리로 환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동제를 지낸 지 5년 후부터 해마다 봄이 되면 왜가리들이 남쪽에서 이곳까지 날아와 보금자리를 삼고 새끼를 번식한 다음 가을에 다시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왜가리 떼가 1000마리가 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얗게 단장하고 창공을 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 왜가리 도래지는 현재 지방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황정록 장군의 실체에 대하여

 

선조실록이나 광해군일기를 종합해보면 황정록(黃廷祿)에 대해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부친은 동래도호부사 황박(黃博)인데 문음(文蔭: 조상의 공훈으로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에 나감)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1581년(선조 14년) 기장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수령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 벼슬을 갈아냄)되었다.

이후 발포만호를 거쳐 1600년(선조 33년)에 전라우수사에 올랐으나, 역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체차(遞差: 어떤 직위에 있던 관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 되었다. 그 뒤 용천군수·황해도병마절도사·덕원부사·강계부사·원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광해군 초 70세에 가까운 나이로 간성(杆城)의 조방장(助防將) 겸 군수에 제수되어 거의 평생 동안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고 나온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발포만호를 지낸 황정록이 정유재란 때 사망하였다는 열녀 송씨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설화는 설화로서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증이나 분석이 조금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하다. 이 설화의 주인공이 황정록이 아니라 열녀 송씨이기 때문이다.

 

유군장(遊軍將)에 대하여

 

발포만호 황정록이 한산도해전에서 유군장을 맡았는데, 유군은 오늘날의 유격전을 담당하는 부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의 전투 편제는 오위진법을 따랐다. 오위(78,175명)의 최고지휘관은 대장(大將)이라 부르고, 각 위(15,625명)의 지휘관은 위장(衛將)이라 불렀다. 위장은 각부(3,125명)의 지휘관인 부장(部將)과 유군(3,125명)의 지휘관인 유군장을 호령하였다. 부장과 유군장은 각각 통(統 625명)과 영(領 625명)의 지휘관인 통장과 영장을 호령하였고, 통장과 영장은 여(旅125명)의 지휘관인 여수(旅帥)를, 여수는 대(隊25명)의 지휘관인 대정(隊正)을, 대정은 오(伍 5명)의 지휘관인 오장(伍長)을, 오장은 자기의 오졸(伍卒)을 각각 호령하였다.

5위의 편제에서 통령 이상의 상위체계는 중앙에서 파견된 경관이 맡았으나, 여수 이하의 하위체계는 토착 군사로 조직되었다. 최하위 전투부대는 125명으로 조직된 1여 단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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