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들리지 않는 천둥소리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45
순천설화

조선 영조 때 순천 서문 밖에 정덕중이란 아전이 살았다.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잘 하여 효자 소리를 들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의 잠자리를 살폈으며 새벽으로는 문안 인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침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등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덕중의 부모는 그런 덕중이 오히려 걱정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도 내팽개치고 오로지 부모 섬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섬겼는데도 어느 해 아버지가 그만 음허(陰虛)에 걸리고 말았다. 음허란 오후만 되면 한기가 들고 신열이 나는 병이었다. 그러니 덕중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덕중의 고통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음허로 몇 년 동안을 고생하더니 마침내 고질병이 되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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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중은 그 몇 년 동안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낸 것은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 목욕재계하고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때로는 하늘을 원망할 것도 같았지만 덕중은 묵묵히 아버지 병수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다. 오랜 친구였기에 아버지 병수발을 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이 일시에 풀리는 듯 싶었다. 한참을 친구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깜짝 놀라 뛰쳐나오며 덕중을 불렀다.

오랜만에 친구와 정담을 나누느라 아버지를 깜빡 잊고 있던 덕중이 맨발로 뛰쳐나가더니 아버지의 병세를 살폈다. 잠깐 아버지 곁을 비웠을 뿐인데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뒤따라 나온 덕중의 친구는 얼어붙은 양 그 자리에 선 채 꼼짝을 못하였다. 덕중이 뭔가를 찍어 입에 넣는데 마치 대변 같았기 때문이다. ‘상분(嘗糞)’이라 하여 예로부터 부모의 병세를 살피기 위해 대변을 맛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긴가민가하던 친구는 한참이 지나서야 덕중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덕중이 자네. 혹 아버지 대변을 맛본 겐가?”

그러자 덕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병세가 심할 때는 대변을 맛보아 그 달고 쓴 맛에 따라 병세를 헤아려 그에 맞는 치료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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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중의 효심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만약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의 병세가 더 위중해질까봐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나가 쫓았다. 어느 날인가는 마당가 감나무에 새 몇 마리가 앉아 아름답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러자 새 소리에 놀란 덕중이 뛰쳐나오더니 제발 좀 울지 말라고 빌었다. 그러자 새들도 그의 정성에 감동하였는지 놀랍게도 우는 것을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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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싸움이 나면 소동이 번져 아버지가 심란해하실까 봐 한사코 싸움을 뜯어 말렸고 집 근처 샘에서 아낙네들이 수다를 떨면 제발 아버지를 봐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결국 고을 안팎 샘터에서 물 긷는 아낙네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한다.

하루는 근처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수다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러자 어김없이 덕중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빨래하는 여인들 앞에 덥석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제발 좀 조용히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덕중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여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 후로는 아예 빨래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한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하루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면서 별안간 천둥 번개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에 아버지가 놀라실까 두려워 덕중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맨발로 뜰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장대비를 맞으며 하늘에 빌었다.

“가엾은 제 아버지를 생각하시어 하늘이시여 천둥 번개를 그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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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천둥소리가 요란한데 방안은 유독 쥐죽은 듯 고요한 것이다. 천둥이 치면 하늘 아래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야 옳을 터인데 하늘도 덕중의 효심에 감복한 것이다.

그 후 덕중은 아버지가 시끄럽고 사람이 붐비는 곳에 사는 것을 꺼려하는 기미를 보이자 저천동(苧川洞)에 조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심신이 쇠약해졌는지 덕중의 아버지는 문 여는 소리만 들어도 힘들어 하였다. 그래서 덕중은 문 여닫는 소리를 덜 내려고 오줌 누러 가는 것도 참은 채 표주박을 차고 있다가 오줌을 받아 다시 마시기를 3년이나 하였다.

이렇게 수십 년을 병간호를 하다 보니 살림이 쪼들려 더 이상 약값을 댈 길이 막막하였다. 하는 수 없이 형과 의논하여 집을 팔아 그 돈으로 서울에 가서 몽땅 약을 사 왔다. 그리하여 아예 약방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니 칠순이 넘은 아버지의 30년 묵은 고질병을 고치게 되었다. 덕중의 눈물겨운 효심이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가 약방을 차린 것은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함이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이웃 사람들에게 약값을 헐하게 받았으며 급하게 부모의 약을 지으러 온 딱한 사람에게는 아예 돈을 받지 않았다. 자기 부모에 대한 효심이 남의 부모에까지 미친 것이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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