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우도의 정절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44
고흥설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흉흉하던 어느 해, 고흥 어느 산골에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가난에 쪼들려 살아 갈 길이 막막하였으나 선비는 오직 글 읽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자기 앞가림조차 하기 힘들 정도여서 장가를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선비는 이웃마을 중신아비의 중매로 겨우 장가를 가게 되었다. 비록 가난한 선비였지만 기품이 있어 보여 그랬는지 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규수는 천성이 착하고 얼굴이 절세가인이었다.

알콩달콩 달콤한 신혼 생활도 어느 덧 3년이 흘렀다. 임진왜란도 끝나고 다소 평화로워지자 글공부만 하던 선비도 이제는 생활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미안하오. 가난한 서생에게 시집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 이 산간벽지에서는 더 이상 살아가기가 힘들 것 같소. 더구나 당신이 험악한 산과 들로 헤매며 애쓰는 꼴을 더 이상 그대로 볼 수만 없소.”

“달리 방도가 있으신가요?”

아내의 물음에 선비가 답하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섬이 하나 있으니 차라리 그곳에 가서 갯것을 뜯어먹고 살더라도 이 보다는 더 낫지 않겠소?”

그 말을 들은 아내 역시 남편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되어 이튿날 얼마 되지 않은 짐을 꾸려 가지고 작은 섬마을로 이사를 갔다.

작은 섬마을이기는 하지만 수목이 아름답고 간혹 조수에 따라 바닷물이 빠지면 바다 가운데로 길이 나 건너 마을로 왕래할 수가 있었다. 또 섬을 둘러싼 갯벌에는 여러 가지 패류가 서식하고 있어서 그것을 잡아다가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살아가기가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고흥-1-1.jpg

소문에 듣자하니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도 선비는 전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무심히 글공부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건너 마을에 볼 일이 있다며 잠간 다녀온다 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밤이 깊은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뜬눈으로 밤을 샜다. 그렇게 이틀 밤이 지났으나 남편은 소식이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건너 마을에 산다는 어느 아이가 남편이 쓴 서찰을 가지고 찾아왔다.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내 당신 곁을 잠시라도 떨어져 살 수 없지만 사전에 당신에게 말 못하고 떠나는 심정을 헤아려 주기 바라오. 내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듯 쓰라리고 아프다오. 지금 나라에 변난이 일어나 모든 젊은이들이 분연히 나서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것이오. 지난 임진년에도 나 몰라라 지낸 것이 너무도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소. 글 읽는 선비로서 도저히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어 분연히 일어나 출전하는 것이니 내가 살아 돌아올 때까지 부디 몸조심하기 바라오.”

고흥-1-2.jpg

너무도 뜻밖의 일을 당하여 아내는 한 동안 넋이 나간 듯하였다. 그러나 사내대장부로서 마땅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장한 일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그 후 매일같이 남편이 승전하고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그다지도 애타게 기다렸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청천벽력같은 전사 소식이 전해졌다. 아내는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 통곡하다가 그만 지쳐 쓰러졌다. 이웃 사람들의 부축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전사 기별을 받은 날을 기일로 정하여 상을 치른 후 삼년상을 치르겠다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그녀의 미색이 인근에 자자하였던지라 시묘살이를 하는 그녀의 주변에 불길한 기운이 일기 시작하였다. 건너편 육지 마을 부잣집 아들이 이 청상과부의 소식을 듣고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날 밤늦게 그녀가 시묘살이를 하는 초막으로 찾아갔다. 그녀를 본 젊은이는 욕정에 사로잡혀 성난 이리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완강하게 반항하는 바람에 한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흥-1-3.jpg

간신히 위기에서 빠져 나온 그녀는 젊은이에게 위엄 있게 말하였다.

“내 남편은 살아 생전 내 말이라면 다 들었소. 당신도 내 남편처럼 무슨 일이든 해낼 수가 있겠소?”

부인의 기품에 눌린 젊은이는 자기의 실수를 크게 깨우치고 말하였다.

“부인이 시키는 일이라면 이 목숨 다 바쳐서라도 무엇이든 다 하겠소.”

“그러면 됐습니다. 앞으로 또 다시 그와 같은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마시오.”

그러면서 부인은 젊은이에게 속히 집으로 돌아갈 것을 타일렀다. 그러나 한 번 달아오른 젊은이의 몸은 쉽게 식지 않았다. 기어코 욕정을 채워보겠다는 생각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지만 철석같은 부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참다못한 젊은이가 또 다시 덤벼들려고 하자 그녀가 재치 있게 말하였다.

“정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나와 약속한대로 하시오. 그러면 내 모든 것을 그대에게 바치겠소.”

“부인. 내 무엇이든 하리다.”

젊은이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조하자 부인이 말하였다.

“지금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 동쪽을 바라보고 큰 소리로 소 울음소리를 세 번 내고 돌아올 수 있겠소?”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젊은이는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뜨릴 뻔하였다. 부인의 요구가 특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인이 자기에게 승복하여 체면치레로 요구조건을 내건 것으로 생각한 젊은이는 쏜살같이 뒷산 봉우리로 올라가 그녀가 시킨 대로 크게 소 울음소리를 냈다.

“움머! 움머! 움머!”

깊은 밤 고요한 산속에서 소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어떻게 산에 올랐는지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게 젊은이는 산 꼭대기에서 소 울음소리를 낸 후 초막으로 돌아왔다.

고흥-1-4.jpg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사이에 위기를 모면한 부인이 옷고름을 풀어 나무에 걸고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젊은이는 부인의 시신을 보고 기겁하여 도망을 쳤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넋을 달래주기 위하여 남편의 묘 옆에 그녀를 묻어주었다.

 

이름 없는 섬 마을을 우도(牛島)라고 부르게 된 데는 바로 이러한 사연이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섬의 생김새가 소가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도라고 한다고도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고흥-우도.jpg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 글

카테고리

인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