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하늘도 감동한 효자 박윤하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거문도(巨文島). 청나라 정여창 제독이 거문도에 자주 상륙하여 섬 주민과 회담이 있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자 한문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하여 거문도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거문도에는 예로부터 명망 있는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귤은(橘隱) 김류(金瀏)가 가장 많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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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순조 14년)에 태어난 김류는 과거를 보려고 한양으로 가던 도중 전라도 장성 땅에서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학문에 감화되어 과거를 포기하고 문하생이 되었다고 한다. 노사의 학문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류는 고향에 낙영제를 세우고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말년에는 완도의 청산과 신지도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84년(고종 20년) 세상을 떠났다.
1805년 거문도에서 박윤하(朴潤夏)가 태어났다. 하늘이 내린 효자로 유명한 윤하는 날 때부터 효자였다고 한다. 보통의 아이들은 배고프면 잠에서 깨어 울고, 대소변을 봐서 기저귀가 축축해도 깨어 우는 바람에 갓난아이를 둔 부모는 밤새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윤하는 신기하게도 마치 어른마냥 밤에 잠을 잘 잤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 윤하가 부모님 편하게 하려고 잠을 잘 잔다고 칭찬을 하였다.
더구나 대소변을 가리는 일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 훨씬 빨랐다. 그러니 같이 아이를 키우는 다른 부모들로부터 윤하는 시샘 반 부러움 반의 대상이었다.
자라면서 윤하는 친구들과도 사소한 일로도 다투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과 지내다보면 간혹 사소한 시비가 붙을 수도 있고 더러 속상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윤하는 무조건 참고 말았으며, 설령 속상하는 일이 있어도 부모님 앞에서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윤하가 친구들과 함께 서당에서 돌아오고 있는데 까마귀 몇 마리가 나무에 앉아 까악 까악 울어댔다. 그러자 친구들이 까마귀들을 보며 기분 나쁜 새라고 돌을 던져 쫓으려 하였다. 그러자 윤하가 나서서 말렸다.
“애들아, 까마귀는 나쁜 새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데...”
“너희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 들어봤니?”
윤하가 반포지효 이야기를 하자 친구들이 시큰둥하게 윤하를 쳐다보았다. 글공부로는 윤하를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포지효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준다고 해서 생긴 말이야.”
윤하의 말에 친구들은 들었던 돌멩이를 슬그머니 놓고 말았다. 그날 이후 윤하가 가는 곳에는 이상하게 까마귀들이 따랐다. 마치 친구라도 된 것처럼 까마귀들은 윤하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윤하 역시 그런 까마귀들이 좋았다.
![[꾸미기]효자 박윤하-2.jpg](/gears_pds/editor/news-f8b276c4-6710-47e7-a1b1-18fde9d707cb/1736340244580.jpg)
이렇듯 천성이 온순하고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윤하는 마을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윤하의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이후로 윤하는 바닷가에서 일하다가도 틈만 나면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 병세를 살폈다. 친구들이 그런 윤하를 말렸다. 어차피 노환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친구들이 말려도 윤하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 간병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일을 하던 윤하는 아버지가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윤하가 들어오자 아버지가 윤하에게 뭔가 말을 하려 하였다. 아버지 가까이 다가가서 귀를 대던 윤하가 그 길로 다시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아버지께서 전복이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잔하였던 바닷가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파도가 너무 드셌던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반평생을 바닷일로 지내왔던 윤하라 할지라도 감히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께서 전복이 먹고 싶다는데 정작 물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효심 가득한 윤하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니 아버지께서 기다리실 것이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울며 바닷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천우신조였는지 굵은 전복 세 마리가 바닷가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윤하는 전복을 주어 들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전복죽을 수어 아버지께 올렸다. 전복죽 때문인지 아버지 병세가 다소 호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윤하는 아버지께 매일 전복죽을 쑤어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꾸미기]효자 박윤하-3-1.jpg](/gears_pds/editor/news-f8b276c4-6710-47e7-a1b1-18fde9d707cb/1736340354076.jpg)
다음날 다시 전복을 구하려고 마당으로 나오던 윤하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제각각 전복 한 마리씩을 물고 나타나 마당에 떨어뜨려 주고 간 것이다. 평소에 친구처럼 지내던 까마귀들이 동료 까마귀들까지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순식간에 전복 수십 마리를 얻게 된 윤하는 매일같이 아버지께 전복죽을 쑤어드렸다. 전복이 떨어진 만하면 어찌 알았는지 까마귀들이 다시 전복을 물어다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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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이 한양에까지 알려졌다. 전라감영에 윤하의 효행이 보고가 되었고, 이에 전라도 관찰사가 임금께 장계를 올려 윤하의 효행에 대해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알린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윤하에게 효자 정문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호조참판의 벼슬을 증직하였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 이 설화는 여수문화원장을 지낸 故 문정인 선생님이 채록한 내용에서 기본 뼈대를 삼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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