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백운산에 서린 삼정(三精) 설화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35
광양설화

864년(신라 경문왕 4년) 희양현(지금의 광양)에 흉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자 희양현감이 도선국사를 모셔왔다. 신라 말기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로 잘 알려진 도선국사는 옥룡사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물리치고 희양현에 평화를 가져왔다.

옥룡사에 머물고 있는 도선국사에게 희양현감이 찾아왔다. 제대로 된 감사의 뜻을 표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수에 능한 도선국사에게 한 마디라도 더 들어볼 요량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차를 마시며 뜸을 들이던 현감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사님, 우리 희양현에 내려오신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희양현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현감이 찾아와서 개인적인 부탁을 할 줄 알았는데 희양현을 위해 한 마디 해달라 하자 도선국사가 현감을 다시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을 꺼냈다.

“현감이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고을을 위해 부탁하니 내 한 말씀 드리겠소이다. 이곳 희양현은 백운산의 정기가 얼마만큼 잘 뻗어나가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달라질 것입니다. 특히 백운산에는 세 가지 정기가 서려 있는데...”

도선국사가 세 가지 정기를 이야기하자 현감이 마른 침을 삼키며 바짝 다가앉았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인가요?”

“그 하나는 봉황의 정기요, 다른 하나는 여우의 정기이며, 마지막이 돼지의 정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기라는 것이...”

봉황과 여우와 돼지의 정기가 서려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현감이 어정쩡하게 되물었다.

“그 세 가지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 태어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것은 알 수 없지요. 때가 정해진 것이 아니요, 장소가 정해진 것도 아니랍니다. 천지인(天地人)의 조화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몇 백 년 후일지 아니면 천 년, 이천 년 후일지, 아니면 영원히 태어나지 않을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우의 정기를 타고 난 월애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옥룡면 초암마을에 월애(月涯)라는 소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예쁘장한 미모 때문에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지냈는데 자라면서 그 미모가 더욱 빼어나 인근 총각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하지만 월애는 미모보다 그 총명함이 더 뛰어났다.

월애의 아버지는 화평군 김심(金深 1262~1338)이었다. 광주에 살던 김심이 잠시 광양에 머물던 때 월애를 낳았고, 그런 연유로 초암마을에 살았다.

김심은 본관이 광산(光山)인데 만호와 도원수를 지냈으며, 세 번이나 정승에 임명되었다. 김심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이 바로 월애다. 그 즈음 고려 조정에서는 원나라에 조공과 함께 공녀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 경향각지의 젊은 처녀들을 선발하여 원나라로 보낼 공녀를 선발하였다. 나라를 잃은 설움도 컸지만 어린 딸들을 공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분노하였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딸을 몰래 숨겨놓기도 하고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공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공녀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원나라로 가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 위해 직접 자원하고 나선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대개 권문세가의 딸들이 그런 경우가 많았다.

김심의 둘째 딸 월애 역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나라에 갈 때 공녀를 자원하여 함께 따라갔다.

원나라에는 세상 모든 문물이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래서 월애는 원나라에 머물기로 작정하고 이름도 달마실리(達麻實利)로 바꿨다. 공녀 가운데 특별한 심사를 거쳐 원나라 궁녀가 되기도 하는데, 달마실리 역시 궁녀로 뽑혔다. 고려 출신 궁녀들은 대개 허드렛일을 하였고, 원나라 출신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여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마실리는 재치가 있어서 그러한 위기를 번번이 빠져나왔다.

달마실리는 우연한 기회에 진왕(晉王) 야손철목아(也孫鐵木兒)와 알게 되고 그의 눈에 든다. 그러다 1323년 8월 원나라 황제 영종이 시해를 당하게 되자 9월에 진왕이 황제로 즉위한다. 바로 태정제(泰定帝, 1276~1328)다. 급기야 태정제는 달마실리를 황후로 책봉한다.

‘고려사’ 충숙왕 무진 15년(1328)조에 보면 “이자성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우리나라의 화평군 김심의 딸 달마실리를 황후로 책봉하였다.’고 하였다.”고 나와 있다.

황후가 된 달마실리는 태정제로부터 ‘여우같은 재치와 미모를 한 몸에 지닌 여걸’이라는 칭찬을 받곤 하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달마실리는 원나라 조정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태정제가 즉위하자마자 그 해에 승하하여 달마실리에게는 위기가 찾아왔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여 여전히 원나라 조정의 실세가 된다. 고려 조정에서는 물론 왕조차도 원나라에 어려운 청을 할 일이 있으면 황후를 통하여 부탁을 하였으며, 달마실리, 즉 월애는 고려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월애를 기념하기 위해 월애가 태어난 초암마을을 ‘월애마을’이라고 칭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월애촌(月愛村)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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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옥룡면 초암마을 월애촌. 월하촌이라고도 한다

봉황의 정기를 타고난 최산두

 

1482년(성종 13년) 광양 백운산 기슭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산두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렸다. 그래서 이름을 산두(山斗)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여 22세(1504년) 때 진사에 올랐고 31세(1513년) 때 별시문과에 급제 하였다. 홍문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그는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호당(湖堂)에 올랐다.

그러나 조광조 등과 뜻을 같이 하여 훈구파를 비판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고 왕의 신임을 잃게 된다. 결국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동복으로 유배된다. 하지만 유배 기간 중 많은 사람들과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후학 교육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최산두 선생은 봉황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최산두 선생을 배향하고 강학도 하던 서원이 봉양서원(鳳陽書院)이다. 최산두 선생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돼지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은?

 

도선국사가 이야기한 백운산의 세 가지 정기 가운데 돼지의 정기를 받은 사람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돼지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돼지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 태어나면, 중국 진나라 때 사람으로 중국 역사상 전설적인 부자로 손꼽히는 석숭과 같은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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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백운산

백운산은 예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소문이 나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다 마지막에 걸음을 멈춘 곳이 바로 백운산이다. 즉, 백두산의 장엄한 기운이 가장 먼 길을 달려와 맺혀 있는 곳이 바로 백운산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관계로 보조국사 지눌, 선각국사 도선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했으며, 지금도 큰 스님들은 한번쯤은 꼭 백운산을 거쳐간다고 한다.

광양에서 석숭과 같은 그런 사람이 날 지 기다려진다. 일부에서는 광양제철이 들어선 것이 바로 돼지의 정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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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숭(石崇, 249~ 300)

중국 서진의 문인으로, 무제 때 수무령으로 관직을 시작해 혜제 때 중랑장, 형주자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형주자사로 있으면서 향료 무역 등을 독점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백여 명의 처첩(妻妾)을 거느렸으며, 집안의 하인도 8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석숭은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는데, ‘진서’와 ‘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 보면 뒷간에조차 화려한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하여 손님들은 침실인 줄 알고 놀라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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