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홍복사 금란 낭자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 있는 운암산에는 수도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그런데 오랜 옛날 이곳에는 홍복사(洪福寺)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복사에는 금란 낭자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꽃을 시샘하는 소슬바람이 간지럽게 불어오던 어느 날 밤, 뒤뜰에는 배나무 꽃이 때마침 춘절을 맞아 탐스럽게 피었고 동쪽 하늘엔 짙은 어둠을 헤치고 둥근 보름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젠 밤도 제법 깊어서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한데 적막을 깨치고 어디선가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활짝 핀 배나무 옆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문득 얼굴을 들어 하늘에 있는 달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연거푸 한숨을 내쉬면서 길 가까이 있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다가갔다.
그는 홍복사 근처에 살고 있는 서생(徐生)이었다. 서생은 아주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로 초가집 한 채를 짓고 살아가는 중이었다. 노총각 혼자 구차스럽게 살자니 매사에 생기가 없었고 세월을 보낸다는 것이 지루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서생은 달이 떠오르는 날이면 이렇게 혼자 하늘을 바라보며 처량한 자기 신세를 한숨과 노래로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서생은 차츰 빛을 잃어가는 달을 바라보며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한수의 시로 읊었다.
“꽃피는 춘삼월에 배꽃이 만개하고, 달빛은 푸르른데 나 홀로 거닐자니, 연연한 마음만이 들게 하는구나.”
바로 그때였다. 서생이 막 노래를 끝마쳤을 때 괴이한 음성이 허공에서 들려왔다.
“그대가 좋은 배필을 얻고자 하면서 어찌 이루지는 않고 한탄만 하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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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말소리가 들리더니 서생은 놀라서 더듬더듬 물었다.
“아, 아니 누구시온데 그렇게 말을 하시오?”
“나는 관음보살이라. 내 너를 불쌍히 여겨 처자와 인연을 맺어 주리니 신심(信心)을 정성껏 쌓아라.”
“예, 관음보살님. 고맙습니다. 그저 이놈의 소원만 풀어 주십시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관음보살을 만난 서생은 너무도 좋아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몇 번이고 큰절을 하였다.
마침 그 이튿날은 불교 신자들이 홍복사에 등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날이라 많은 남녀가 절을 찾아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서생은 깨끗이 목욕을 하고서 저녁 늦게 홍복사를 찾아갔다.
부처님 앞에 꿇어앉은 그는 소매 속에 간직했던 윷 한 개를 꺼내들고서 말하였다.
“오늘은 부처님과 더불어 윷놀이를 하고자 합니다. 윷을 던져서 거꾸로 놓이면 법연(法筵)을 베풀어 부처님께 갚아 드릴 것이고, 바로 놓이면 아리따운 아가씨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한 서생이 곧 윷을 던지니 빙글빙글 돌다가는 똑바로 떨어졌다. 이제 서생이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는 춤이라도 출 듯한 기분이 되어 엉금엉금 불단 옆으로 기어갔다.
몸을 감추고 기다리며 한 시간 가까이 깜빡 졸다가 눈을 뜬 서생이 앗! 소리를 내며 움찔하고 말았다.
법당 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십 오륙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녀가 살그머니 불단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미기]홍복사 금란 낭자-3.jpg](/gears_pds/editor/news-f8047cc3-f970-45de-9f6c-7377e078a493/1736268142648.jpg)
서생은 너무도 신기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봤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까만 머리를 길게 땋았고, 분이며 연지로 곱게 단장한 용모는 마치 하늘의 선녀가 내려온 것 같았다. 소녀는 사뿐히 불단 앞에 꿇어앉아서 섬섬옥수를 들어 향을 피우더니 어깨를 잔잔히 들썩거렸다.
“아! 인생의 박명함이 어찌 이와 같사옵니까?”
자세히 살펴보니 울고 있었다. 흑흑 소리 죽여 울 때마다 소녀의 가냘픔 몸은 가느다란 파동을 치며 묘한 곡선을 이루었다.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서생은 소녀에 대한 호기심이 불같이 솟아났다.
‘부처님이 내게 점지하신 처녀인데 어째서 저리 서럽게 울까?’
슬피 흐느끼는 소녀를 보니 마음이 더욱 타올라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생은 몸을 일으키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낭자는 누구신데 야심한 밤중에 그리 슬피 우시오?”
“…….”
“나는 이 근처에 사는 서생인데 부처님의 계시로 처자를 기다리던 중이오. 이것도 인연이니 낭자의 이름을 말해주오.”
서생이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소녀는 이슬 같은 눈물이 가득 맺힌 얼굴로 서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을 하였다.
“예. 소녀의 이름은 금란이라 하옵니다. 얼마 전에 왜구가 침입하여 약탈을 하고 소녀를 욕보이려 했사옵니다. 그러나 너무도 원통하여 갈 곳을 잃고 이렇게 혼령이 되어 신세를 한탄했던 것이옵니다. 이제 소녀도 불심을 받아 사람의 몸으로 환원하였으니 너무 의심치 마시옵소서.”
소녀의 이런 얘기를 들은 서생은 상대가 너무도 미인인지라 분위기에 맞지 않게 갑자기 욕정이 솟아올랐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 꽃 같은 처녀와 함께 있자니 자연 마음이 요동친 것이다.
‘내 평생 원하던 아리따운 소녀를 만났는데 무엇을 주저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마음속으로부터 물결치자 서생은 용기를 내어 소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마침 불당 옆에 허물어진 빈방이 있는지라 망설이지 않고 소녀를 끌어안았다. 물오른 수양버들처럼 나긋나긋한 여인의 몸은 정말 매끄러웠다.
서생이 하는 대로 전신을 내맡긴 소녀는 눈을 살며시 감고 남자의 몸을 받아 들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젠 밤도 깊어 달이 중천을 넘어 기울어졌는데 소녀가 난데없는 주안상을 차려왔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흥을 돋우니 서생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꾸미기]홍복사 금란 낭자-4.jpg](/gears_pds/editor/news-f8047cc3-f970-45de-9f6c-7377e078a493/1736268215968.jpg)
그런데 세상이 온통 즐겁게만 보여 서생이 연속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자 소녀가 슬픈 안색으로 말하였다.
“이제 소녀가 낭군과 운우의 정을 맺은 바 있으나 앞일이 걱정이옵니다. 다행히 낭군께서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평생을 모시겠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 이제 겨우 당신을 만났는데 어찌 저버리겠소. 남아일언중천금이니 맹세하리다.”
서생이 이렇게 맹세를 하자 소녀는 그제야 기뻐하였다. 그 때 마침 새벽 닭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아오니 너는 본가로 돌아가거라.”
여태껏 술을 따르던 그녀는 황급히 시녀를 부르더니 이렇게 이르고는 서생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낭군님은 이제 남이 아니니 소녀의 처소로 가시와요.”
창밖이 밝아오자 서생은 소녀와 함께 절을 떠나 마을로 내려왔다.
“아니, 자네는 이른 새벽에 어딜 갔다 오나?”
길에서 마주치는 마을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다. 그들의 눈에는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서생은 그럴 때마다 아무 대답도 않고 빙긋이 웃으며 소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생이 소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한 뼘 정도나 자란 쑥이 뒤덮힌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집으로 들어간 소녀는 서생을 방에 앉히고서 곧 음식을 들여오게 했다. 둘이 마주앉아 식사가 끝나자 다시 서로 부둥켜안고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마치 오래도록 함께 산 부부처럼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사흘째 되던 날 소녀는 평소보다 많은 음식을 차려오고 더욱 다정스럽게 서생의 시중을 들었다. 연거푸 권하는 술에 서생이 주기가 오르자 소녀는 무릎을 다소곳이 세우고 앉아서 말하였다.
“낭군, 이곳의 삼일은 속세의 삼년과 같습니다. 이제는 연분이 다 되었으니 돌아가셔야 합니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서생은 말 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소녀가 서생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오니 거역하지 못하옵니다.”
“그래도...”
서생은 이 아리따운 소녀와 이별한다는 것이 싫었으나 하늘의 뜻이라니 더 이상은 고집을 피우지 못하였다.
“당신이 돌아가시면 내일 소녀의 부모님이 저를 위하여 홍복사에서 제를 지낼 것입니다. 만약 낭군께서 이 몸을 잊지 않으신다면 도중에 기다렸다가 만나십시오.”
다음날 서생이 홍복사 근처에서 길을 지키고 있자니 정말 여인들의 행렬이 있었다. 소녀의 말이 믿기지 않아 설마 하던 그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딸과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끊은 오늘을 매우 슬퍼하는 여인의 부모는 길을 가로막는 젊은이를 보고 의아해 하며 물었다.
“총각이 어인 일로 남의 제사를 그르치려 하시오.”
“저는 동촌(東村)에 사는 서생이온데 어젯밤 금란 낭자와 정을 맺고 이곳에 왔습니다.”
“뭐라구요? 금란이를 만났단 말이오? 그런 일이...”
금란의 부모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서생이 아무리 그렇다고 우겼으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만나서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고 홍복사로 가버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서생의 온몸이 힘이 쭉 빠지고 맥이 풀려버렸다.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렸을 때였다.
“낭군, 왜 그대로 돌아가시옵니까? 소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주소서.”
어디선가 부드러우며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서생이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금란이 서 있었다.
“아, 금란 낭자?”
“낭군께선 지금 곧 소녀를 따라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옵소서. 지난밤과 같이 음식을 드시오면 전부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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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한 소녀는 슬그머니 되돌아서 홍복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서생도 그녀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따라갔다.
제를 지내는 곳에 다다른 소녀는 제상 앞으로 가서 수저를 집어 들고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딸의 제사를 지내던 금란의 부모는 서생이 들어서자마자 음식을 먹는 소리가 들리니 괴이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비록 그들의 눈에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보이진 않으나 죽은 혼백이라도 정성을 받아주니 오직 감동할 뿐이었다.
그제야 미쳤다고 생각하던 서생의 말을 믿게 된 그녀의 부모는 부랴부랴 한쪽 장막을 치우고는 서생과 딸을 동침하도록 마련하였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주위가 어두워지자 서생과 금란이 부모가 허락하는 자리에서 잠자리를 같이 하니 그 기쁨이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소녀는 몸단장을 하고서 떠날 시간이 되었다면서 장막을 빠져나가려했다.
“낭자, 안 되오.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오?”
“이제 당신의 정성으로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안녕히 계시옵소서.”
금란 낭자가 한사코 떠나가니 서생은 가슴이 에이는 듯했다. 서생이 구슬픈 눈물을 뿌리며 애통해 하니 소녀의 부모들도 딸이 떠나는 것을 눈치 채고 통곡을 했다. 그래서 조용하던 절엔 한동안 곡성이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서생은 금란의 무덤을 매일 찾아가서 혼백을 위로했다. 세상 사람들은 서생의 불심이 지극해서 부처님이 인연을 맺어준 것이라고 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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