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오천 냥 사또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29
순천설화

옛날 어느 고을에 사또가 새로 부임하였다. 전임 사또가 임기가 남았는데도 갑자기 이임하더니 채 열흘도 안 되어 기다렸다는 듯이 후임 사또가 온 것이다.

반 년 남짓 근무하였던 전임 사또는 마치 부모님 대하듯이 고을 주민들을 대하였다. 주민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아전들을 나무라는가 하면 어려운 집에는 구휼을 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전임 사또들처럼 뇌물을 받기는 커녕 신관 사또는 오히려 자신의 녹봉으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등 그야말로 청백리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임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정에 있는 고관대작들이 뇌물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경도 벽지로 내보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작업을 한 이가 바로 새로 부임한 사또인데,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정랑과는 먼 집안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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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는 부임하자마자 정사는 뒷전이고 온통 이권 개입에만 혈안이 되었다. 관아의 아전들 인사에도 뒷돈이 공공연하게 오고 갔으며, 나라의 재물로 마을 앞 다리를 놓을 때에도 장부를 조작하여 상당한 돈이 사또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아전들을 시켜 공공연하게 자신의 돈으로 고리대를 하였으며, 대개의 경우 그러한 악한들이 그러는 것처럼 여색 또한 밝혔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눈에 들어온 처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부임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신임 사또가 벌써 몇 년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을 주민들에게는 신관 사또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고통이었다. 얼마나 쥐어짜고 또 짜는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철에도 춘궁기보다 못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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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못한 고을 사람 몇이서 사또를 납치하여 처치하기로 작당을 하였다. 여색을 밝히는 사또를 유인하기에는 역시 미인계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다들 썩었다 하지만 아전 가운데 그나마 양심이 있는 아전이 없지는 않았다. 수소문 끝에 겨우 그러한 아전과 줄이 닿아서 절세가인이 있다고 속여 한밤중에 사또를 유인하는데 성공하였다.

밤은 깊은데 가도 가도 인적은 드물고 답답하여 사또가 입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것이냐? 이 길이 맞긴 맞는 거냐?”

그러자 아전이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라고 하였다.

“사또,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자칫 들통이 나게 되면 산통이 다 깨집니다.”

산통이 깨진다는 말에 사또는 입맛만 쩍쩍 다시며 다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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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그렇게 계곡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이 났다. 달빛 사이로 보니 절세가인이 아니라 장정들이었다. 놀란 사또가 아전과 장정들을 번갈아보며 뭔가 물을 듯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정 가운데 한 명이 말을 건넸다.

“사또, 저희들이 은밀한 곳에 처자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움막이 있는데, 그곳에 잡아다 두었으니 가보십시오.”

내심 긴장했다가 다시 안심이 되었는지 사또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전과 함께 산길을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올라가니 움막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있다는 기척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처자를 얼마나 묶어놓았으면 인기척이 전혀 없을까?’

의아해하면서 움막 안으로 들어선 사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움막 안이 텅 비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서야 속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움막을 빠져나오려는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하며 사또가 덥석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사람들에게 애걸복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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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몰라 사또의 입에 재갈을 물린 후 자기들끼리 이러저러한 의논을 하였다. 당장 죽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되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귀는 열린 사또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인적이 드문 계곡에서 자신을 묶어놓고 어떻게 처치를 할지 의논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당장 죽여서 입을 막아야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자 사또의 눈은 커질 대로 커지며 온갖 발악을 하였다. 결심을 한 듯, 한 사람이 칼을 들고 나서자 다른 한 명이 갑자기 제지하였다.

“아무리 흉악한 사또라 해도 마지막 말은 들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다들 독한 사람들이 못 되어 수긍하는 눈치였고, 급기야 한 사람이 사또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사또가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이미 조정 안팎이 썩을 대로 썩어서 매관매직이 횡행한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은 지방 사또는 만 냥에 거래가 된다는데, 자신은 그나마 조정에 연줄이 있어서 오천 냥에 사또 자리를 얻게 되었단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그래도 본전은 뽑았으니 풀어만 준다면 남은 기간 동안 청백리처럼 선정을 베풀겠다고 하였다.

사람들끼리 의견이 분분하였다. 사또를 죽여 봐야 더 나쁜 놈이 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풀어주자. 어떤 사람들은 속으면 안 된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빨리 죽여야 한다. 사람들이 설왕설래하자 사또가 쐐기를 박았다.

“만약 나를 죽이면 무사하기도 힘들 것이지만 후임 사또는 분명 만 냥을 주고 올 것이오. 그러면 그 사람은 만 냥을 뽑으려고 당신들을 더욱 더 쥐어짤 것이오.”

듣고 보니 그도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사또를 납치하여 죽이려 했는데 후환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풀어준다면 오늘밤 일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겠소이까?”

“물론이요. 목숨만 살려준다면 없었던 일로 하겠소. 아니 생명의 은인으로 삼겠소.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개과천선하여 남은 임기 동안 선정을 베풀겠소. 믿어주시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하대를 하던 사또가 갑자기 말투마저 공손해지자 사람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찜찜하였던 데다 선정을 베풀겠다는 사또의 말에 넘어간 사람들은 결국 사또를 풀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관아로 복귀한 사또는 돌변하였다. 그날부터 신변 호위를 겹겹으로 한 채, 없었던 일로 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을 납치하였던 사람들을 죄다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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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선정을 베풀겠다는 말은 물어보나마나였다. 전보다 더 고을 사람들을 쥐어짰다. 이제는 누구도 사또를 입에 담기조차 두려워하였다. 말 한 마디 잘못하였다가는 끌려가 곤욕을 치리기 때문이었다.

옥에 갇힌 사람 가운데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 제법 학식도 있어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아버지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비록 사또를 납치한 죄는 크지만 전후 사정을 참작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아버지가 옥살이를 한 데 대해 조목조목 정리하여 조정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얼마 후 전라감영에서 사람이 내려와 정씨 아들을 찾았다.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감사를 만났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감사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였다.

“나이도 어린 것이 감히 뭘 안다고 이런 탄원서를 내고 XX이야?”

다짜고짜 반말도 반말이지만 설마 감사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육두문자를 써가며 감사는 정씨 아들을 윽박질렀다. 마치 탄원서를 낸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감사 어른. 도대체 누구 편인가요? 저희 아버지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어서 탄원서를 냈는데, 그게 잘못인가요?”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감히 한 고을의 수령을 야밤에 납치하여 살해하려 한 것이 잘못이 아니란 말이냐?”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감사는 이미 어떤 결론을 내리고 온 듯하였다.

“탄원서에도 썼지만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죽 하였으면 그런 일까지 저지르게 되었는가 살펴주시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고을 사또의 학정에 대해 살피시라는 것입니다.”

“아니, 감히 누구 앞이라고 이래라 저래라야? 잔소리 말고 탄원서나 취하해! 그러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는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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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처벌을 받게 된다는 말에 정씨 아들은 주춤하였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럼 저희 아버지는 어찌 되시는 것입니까?”

“네가 탄원서를 취하하면 내 사또를 적당히 타일러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류를 받아내마. 어차피 이런 일은 오래 끌어봐야 서로 간에 좋을 일은 없지 않겠니?”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서 탄원서를 취하한다는 글을 써준 정씨 도령에게 감사가 한 마디 하였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니 너도 제법 머리가 있는 놈이구나.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면 머리만 똑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나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냥 올라왔겠니? 너 같으면 본전 생각 안 나겠어? 능력은 두 번째고, 돈 없으면 자리고 뭐고 다 소용 없는 거야.”

알고 보니 감사 역시 만 냥을 내고 그 자리에 올랐기에 전라도 곳곳을 돌며 부정한 돈을 받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후 공교롭게도 동학혁명이 일어나 고을 사또는 물론이요 감영에 있던 감사를 비롯한 탐관오리들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한다. 반면 정씨를 비롯하여 감옥에 갇혀 있던 무고한 백성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렇게 좋은 세상이 오는가 싶더니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니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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