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해달호(海達號)의 진실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3:25
고흥설화

9세기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일본과 중국 사이의 중개무역을 한 이후 우리나라는 점차 해양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장보고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사라진 탓도 있었지만 신라 내부의 분열상이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후삼국시대를 거쳐 왕건에 의해 고려가 건국된 이후부터 간헐적으로 왜구가 출몰하더니 충렬왕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서남해안을 침략하였다. 대부분의 왜구를 격퇴하기는 하였지만 이처럼 왜구가 날뛴 데는 해상권을 장악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고려 말 우왕 때의 일이다. 화통도감의 제조로 임명된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다양한 화포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화포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해상에서 화포를 장착하고 왜선을 격침시킬 튼튼한 배가 더 우선적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튼튼하고 거대한 선박의 건조에도 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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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격퇴시킬 선박 건조를 하다 보니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하여 갈수록 대형화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달호(海達號)다. 해달호는 당시로서는 고려에서 가장 큰 선박이었는데, 주로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무역에 사용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개경상단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정에서 은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이익금의 대부분을 왕의 비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해달호는 풍양현(고흥) 발포에서 건조되었다. 풍양현에서 해달호가 건조되어 바다에 띄워졌을 당시 풍양현 백성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구경을 나왔다고 할 정도로 해달호는 그 크기 하나만으로도 구경거리였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그렇게 큰 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만나기만 하면 다들 해달호 이야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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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호는 진수하자마자 강화도로 올라갔다. 그러나 워낙 배가 커서 웬만한 포구에는 정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다 한 가운데 닻을 내린 후 정박하고 작은 배가 왔다 갔다 하였다. 해달호를 보기 위해 우왕이 직접 강화로 행차하였고 최영, 이성계 등 당시의 권력자들 거의 대부분이 진수식에 참가할 정도로 해달호는 조정 안팎의 관심사였다.

해달호는 배에서 근무하는 사람만 30명이 넘을 정도로 큰 배였다. 건조할 당시 일하는 사람 상당수를 풍양현에서 뽑았기 때문에 해달호에는 풍양현 사람이 많았다. 그 가운데 기로라는 총각과 다홍이라는 처녀는 오래 전부터 서로 은애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기로가 해달호에 오르게 되자 다홍이도 주방 담당으로 지원하여 해달호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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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해달호는 원나라를 서너 차례 다녀온 후 다시 원나라로 가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 중이었다. 그 때 원나라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병을 청하였고 논란 끝에 우왕은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황산대첩 이후 명분과 실리를 얻은 이성계 장군을 견제하기 위해 친원파들은 이성계 장군을 파병의 선봉대장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만약 이성계 장군 일파가 파병에 반대하여 반기라도 들게 되면 사실 대책이 없었다. 막상 이성계 장군에게 파병의 선봉대장이 되라고 통보하기는 하였지만 우왕을 비롯한 친원파 대부분은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파발이 도착했다. 강화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해달호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나라로 가려는 상인들까지 몰려들어 듣기로는 100명이 넘는 사람이 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막상 왕에게 보고를 하려 하는데 왕이 자리에 없었다. 내관에게 물어도 내관은 모른다는 답변뿐이었다.

이러한 중대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왕이 자리에 없다니... 중신들끼리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파병을 하기로 겨우 결정하였는데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터지니 다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우선 파병을 며칠 늦추고 해달호 구조에 전념하자고 의견이 모였다. 그래서 친원파 일부에서는 파병을 꺼려한 이성계 일파가 해달호 사건을 조작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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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이 지나서야 우왕이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해달호 사건을 보고받고도 생각보다 크게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최영 장군을 따로 불러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 “모든 게 과인의 책임이오.” 한 마디 하고는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사흘 후 다시 파발이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해달호가 완전히 침몰하였고, 재빨리 몸을 피한 선장과 몇 명을 빼고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1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해달호는 갑작스런 파도에 밀려 중국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인양을 위해 닻을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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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파발은 구조선이 아무런 구조 행위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전하였고, 연이어 상부의 지시가 내리지 않아 대기하다가 때를 놓쳤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일부에서는 해달호가 갑자기 침몰한 것은 누군가 내부자와 공모하여 고의로 침몰하게 만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몰하기 직전 해달호 주방. 다홍이가 뭔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기로에게 주기 위해 남은 재료로 자신만의 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리를 마친 다홍이가 예쁜 그릇에 담아 기로에게 가는데 부식 창고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가 낮은 것으로 보아 뭔가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몰래 요리를 한 것을 들킬까봐 조심스럽게 지나가려는데 ‘해달호’니 ‘침몰’이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다홍이가 들어보니 한 명이 강압적으로 배를 침몰시켜야 한다 하고 다른 한 명은 반대하는 것 같았다. ‘어명’이라는 말도 들렸다. 다홍이가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한 명은 선장이었고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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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다홍이가 재빨리 지나가려다 뭔가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기척에 놀란 선장과 괴한이 뛰쳐나왔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기로에게 달려간 다홍이가 막 말을 하려는데 선장과 괴한이 들이닥쳐 다홍이를 베었다. 그것을 말리던 기로 역시 목숨을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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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두 사람이나 죽게 되자 선장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며 해달호를 버리기로 한다. 그래서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가 옆구리에 구멍을 내었다. 작은 구멍으로 원을 만들어 시간이 지나면 큰 구멍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장은 중요한 밀지를 가져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측근 두 명을 데리고 배를 빠져나갔다.

선장이 빠져나간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해달호는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포구에서 구조선이 여러 척 왔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조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해달호 근처만 맴돌았다. 이를 보다 못한 어선 몇 척이 다가가려 하였지만 수군들이 접근을 막는 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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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을 앞두고 조정에서는 대규모 장례식이 치러졌다. 눈물바다였다. 수백 명의 장례를 한꺼번에 치르는 마당에 파병을 하네 마네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다. 더구나 파병을 막기 위해 명나라에서 보낸 유군(유격부대)들이 해달호를 침몰시킨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퍼져 명나라를 치기 위한 파병이 더욱 명분을 얻고 있었다.

장례식을 뒤로 하고 이성계 장군은 위화도로 떠났다. 이성계가 떠나자 우왕과 친원파 핵심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비록 해달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성계를 정신없게 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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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중국 산동성에 있는 고대 항구인 봉래수성 해저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

고려청자 등이 발견된 이 선박은 봉래3호라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지난 2005년 중국 산동성에 있는 고대 항구인 봉래수성 해저에서 고려 말에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선박이 발견되었다. 600년 이상 지났는데도 잔존 길이만 21.7m, 폭 5.2m였다. 연구진에 의해 봉래3호로 이름 붙여진 이 선박은 소실된 부분을 복원할 경우 총 길이가 23~28m에 달할 것으로 분석되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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