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청년 장군 이대원과 죽죽녀
여수시 삼산면에 있는 손죽도(巽竹島)의 원래 이름은 손대도(損大島)였다. 본디 손대도라도 이름이 붙은 것은 이대원(李大元) 장군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최연소 만호인 이대원 장군이 죽자 섬 주민들이 모두 슬픔에 잠겼고, 섬에 그렇게 많던 대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 그후 오늘날까지 대나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대(大)자를 죽(竹)자로 바꾸고 손(損)자는 손(巽)으로 바꾸어 그 본 뜻을 흐리게 하였다.

고흥 쌍충사에 있는 이대원 장군 영정
이대원 장군은 1566년(명종 21년) 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함평 이씨 이춘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문안을 여쭙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군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 밤,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다들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어린 대원이 나섰다.
“제가 당장 장터에 가서 약을 구해 오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몸을 계속 주무르고 계십시오.”

여수 삼산면 손죽도 전경.
장군의 어머니는 그 먼 길을 어린 아들 혼자 보내려니 답답하였지만, 그렇다고 어린 아이들에게 남편을 맡겨두고 약을 구하러 갈 수도 없는 처지라 어쩔 수 없이 대원을 보냈다.
장터까지는 십 리가 넘었다. 그 먼 길을 추운 겨울날 밤중에 여섯 살 어린 아이가 간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장터에 경우 도착한 장군은 약방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자 의원이 눈을 비비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 밤중에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런데 조그마한 어린 아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의원은 놀라 다시 물었다.
“애야.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대원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대견한 듯 대원을 바라보던 의원이 주섬주섬 약을 챙겨주었다.
“위급한 것 같지는 않으니 우선 이 약을 가지고 가서 달여 드려라. 아버지 몸을 따뜻하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깨어나시면 한 번 모시고 오도록 해라.”

집으로 돌아온 장군은 서둘러 탕약을 달여 아버지께 드리고, 다시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결국 장군의 아버지는 그렇게 목숨을 구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장군은 글공부를 하는 한편으로 근처 산골짜기에서 매일같이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4월, 장군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급제하였다. 과거시험을 주관하던 시험관들이 유달리 돋보이는 장군을 보고는 동안(童顔)이라고 서로들 이야기하였다. 그러다 막상 급제하게 되자 신상내역을 보던 시험관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불과 18세밖에 되지 않는 약관의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무과에 급제하자 소년장군이라고 여기저기 소문이 자자하였다. 소문을 들은 대감 한 명이 그를 보자 하였다. 장군을 보자마자 대감은 그 그릇됨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맞춤한 딸이 있어 그를 사위로 들이고자 결심한 대감이 장군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준마가 하나 있는데 사나워서 아무도 타지를 못하네. 그대에게 주고 싶은데 어떤가?”

잠시 후 하인 여럿이 쩔쩔매며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그런데 장군이 올라타자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말에 올라탄 장군은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것을 본 대감의 아들이 화를 내며 이야기하였다.
“저런 고약한 놈! 과거 급제한 것이 무슨 대수라고. 감히 미관말직인 주제에 일국의 재상이 말을 주는 데도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다니!”
그러자 대감이 아들을 제지하며 말하였다.
“애야 내가 아까워하지 않고 준 것을 그가 감사하지 않았다고 나무라지 마라. 그와 나 사이에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느니라.”
얼마 후 동래 정씨 처녀와 혼인을 하게 되었지만 갑자기 병을 얻어 운명하고 만다. 이듬해 장군은 주변의 권유에 못이겨 용인 이씨와 재혼을 하게 되고, 아들 권(權)을 낳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는 1586년(선조 19년), 장군은 21세의 나이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전라도 고흥 지방의 녹도만호1)가 되었다.
1) 종4품 무관 벼슬.
장군이 녹도만호로 부임한 이듬해 왜구들이 녹도 근처에 침범하였다. 기습공격을 받았는지라 상부에 보고할 틈도 없이 장군이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그러자 전라좌수사로 있던 심암(沈巖)은 이대원을 시기하였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도 못마땅한데 승승장구하여 벌써 만호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이대원 장군이 녹도만호로 부임하였을 당시 관기 가운데 죽죽녀(竹竹女)2)라는 여인이 있었다. 죽죽녀는 한눈에 사랑에 빠졌고, 이대원 역시 죽죽녀를 어여삐 여기게 되었다.
2) 요즈음 말로 ‘쭉쭉빵빵’이라는 은어가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늘씬한 미녀였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전라좌수사 심암이 군기 점검 차 녹도진에 왔다. 수사가 오자 의례히 소록도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취흥이 벌어졌다. 죽죽녀가 가야금을 탔다. 그런데 죽죽녀를 바라보는 수사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더니 이대원에게 말하였다.
“이 만호. 저 계집을 나에게 주시오.”
죽죽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연주를 중단하고는 이대원 대신 대답을 하였다.
“수사 어르신.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리가 촛불 하나도 사사로이 켤 수 없습니다. 저는 녹도진의 여자랍니다.”
죽죽녀의 말에 심암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다시 징그러운 웃음을 띄며 말하였다.
“그래? 맹랑한 아이로구나. 그렇다면 본영에 있는 기생과 맞바꾸지 뭐. 어떻소, 만호.”
의견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라 명령투였다.

이대원은 무슨 생각인지 빙그레 웃었다. 승낙한다는 뜻인 줄 알고 심암이 말하였다.
“내일 출항할 때 이 계집을 데려가겠소.”
그러자 갑자기 죽죽녀가 일어서더니 달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늘에 달이 몇 개이지요?”
“그야 하나지.”
무심코 대답해놓고는 아차 싶었던 심암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다에도 달이 떴으니 두 개로구나.”
“그것은 달이 아니라 그림자인 걸요?”
그러자 심암이 발끈하면서 호통을 쳤다.
“네 이년! 감히 누구 앞이라고, 죽으려고 환장하였느냐? 잔소리 말고 내일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그리 알거라!”
그런 심암을 물그러미 바라보던 죽죽녀가 느닷없이 은장도를 꺼내들더니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고 말하였다.
“저를 강제로 데려가신다면 이 은장도로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
죽죽녀의 결연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심암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본영으로 돌아갔다.
좌수사가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왜구들이 대거 쳐들어왔다. 앞장을 섰던 동료들이 몰살당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왜구들은 손죽도를 중심으로 약탈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밤이 깊었는데도 심암이 이대원을 불러 출격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고 병사들도 지쳤으니 내일 진격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심암은 막무가내였다. 중과부적이었는데도 내보낸 것은 이대원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군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물러서자니 명령불복종일 뿐만 아니라 손죽도에서 고통당하고 있을 주민들이 떠오르고, 그렇다고 나서자니 죽음이 불을 보듯 뻔하여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어린 권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죽죽녀가 이대원을 찾았다.
“장군. 저 때문에 장군께서 사지로 몰리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수사 영감을 찾아가 볼까요?”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잘 아는 이대원이 죽죽녀를 막아서며 말하였다.
“아니다. 어차피 왜구들을 소탕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내 어찌 너를 팔아 목숨을 구걸하겠느냐. 돌아가 기다리도록 해라. 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죽죽녀가 돌아간 뒤 한참을 고민하던 이대원 장군의 눈빛이 순간 비장하게 변하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끊어 속저고리에 무언가 혈서를 썼다. 10월 17일의 일이다.
일모원문도해래(日暮轅門渡海來)
진중에 해 저문데 바다 건너오니
병고세핍차생애(兵孤勢乏此生哀)
슬프다 외로운 군사, 끝나는 인생
군친은의구무보(君親恩義俱無報)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 못 갚으니
한입수운결불개(恨入愁雲結不開)
한이 구름에 엉키어 풀리지 않네.

장군은 손대남(孫大男)이라는 부하를 불러 저고리를 주었다.
“내 오늘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나갈 것이니, 부디 이 저고리를 가족에게 전해주시오.”
장군은 비록 부하이지만 나이가 훨씬 많은 손대남에게 존대를 하였다. 사지로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위엄이 있는 장군의 결연한 의지를 손대남도 말리지 못하였다.
이대원의 지휘를 받는 부하병졸들은 1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불과 며칠 전에 전투를 치르느라 지쳐 있기에 다들 전투에 나가기를 꺼려하였다.
“비록 중과부적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설령 죽는다 해도 우리로 인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려우리오!”
젊은 장군의 결의에 찬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들 용기백배 하여 손죽도로 향하였다.
손죽도 근처에 가자 손죽도 주민들은 멀리서 환호하였다. 왜구의 침략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구원병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때문에 이대원 부대가 나타나자 그렇게 환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며 3일을 싸웠지만 도저히 해볼 수가 없었다. 전라좌수사 심암이 후발 부대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찌 버틸 수가 없었다.
몇 명 남지 않은 조선 수군들의 저항이 예상외로 만만치 않자 왜구들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이대원 장군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부상을 당한 채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군을 사로잡은 왜구들은 그를 돛대에 묶어놓고 투항을 권유하였다. 비록 적장이지만 젊은 장수의 기개가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이 끝까지 호통을 치자 왜구들은 장군의 사지를 찢어 죽였다.
이대원 장군의 처참한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심암은 이대원의 죽음을 숨기고 마치 자신들이 싸워서 왜구를 물리친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장군의 저고리를 전달한 손대남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손대남으로부터 저고리를 건네받은 죽죽녀가 전라도관찰사에게 탄원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관찰사는 이미 전라좌수사 심암이 겁이 많고 탐욕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비겁한 심암과는 달리 녹도만호 이대원이 커다란 전과를 올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사실을 이미 임금께 보고하였다. 이에 선조가 심암을 교체하여 그 직분을 장군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교지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군이 죽은 뒤였다. 결국 이대원 장군은 만호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전라좌수사 신분으로 전사한 셈이다.
죽죽녀의 탄원서를 토대로 전라도관찰사가 다시 장계를 올려 결국 조정에까지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암은 이대원 장군이 전사한 지 44일 만에 서울 당고개에서 처형당했다.
당시 손죽도 사람들이 이대원 장군의 시신을 가묘를 써서 매장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손대남은 장군의 애마(愛馬)를 타고 평택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장군의 고향집 가까이 이르자 도저히 가족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말의 입에 장군의 저고리를 물려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애마는 장군의 저고리를 물고 장군의 집에까지 오더니 크게 한번 울고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고흥에서 평택까지 쉬지 않고 달려와서 지쳤을 수도 있지만, 애마 스스로 장군의 뒤를 따라갔다고도 볼 수 있다. 장군의 가족은 혈서가 있는 속저고리로 대신 장례를 치렀다. 평택 대덕산에 장군의 묘소가 있다. 장군의 묘소 아래에는 애마의 무덤[忠馬塚]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평택 확충사에 있는 이대원 장군 묘소.
가운데가 장군이 절명시를 적었던 속저고리를 묻은 무덤이고, 왼쪽이 동래 정씨, 오른쪽이 용인 이씨 부인의 무덤이다. 맨 아래 검은 비석 세워진 곳이 충마총(忠馬塚)이다.
이대원 장군이 죽은 뒤 그를 기리며 소복을 입고 지내던 죽죽녀는 정유재란 때 좌수영이 무너져 혼란스러울 때 왜군에게 붙잡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있는 순천왜성으로 끌려갔다.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죽죽녀에게 반하여 수청을 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수청을 들 것처럼 그를 안심시킨 죽죽녀가 느닷없이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내 목숨을 끊고 말았다. 꿈에도 그리던 이대원 장군에게로 한시라도 빨리 가고자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평택 확충사와 이대원 장군 동상.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죽죽녀 이야기는 고흥 출신 송수권 시인의 시집 <사구시의 노래>에 수록된 ‘녹동애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이대원 장군과 이순신 장군 비교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