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용섬의 슬픈 사랑 이야기
고흥 금산면 명천마을 앞 바다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용섬이다. 용섬에는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있는데, 노송에는 예로부터 용의 승천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주 옛날 이 마을에 다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가 살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다정이는 부모님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느 해 봄, 다정이가 뒷산에 올라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여기저기 취며 고사리 등의 나물이 다정이를 유혹하였다. 한참 동안 나물캐기에 정신이 없던 다정이가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훤칠한 청년 한 명이 서서 다정이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있자 흠칫 놀랐던 다정이가 이내 진정을 하고 물었다.
“누구세요? 처음 보는 분인데...”

그런데도 청년은 말이 없이 다정이만 바라보았다. 말을 못하는 것일까? 다정이는 청년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손짓 발짓 섞어가며 말을 하였다. 그러자 청년도 다정이처럼 손짓 발짓으로 대답하였다. 정말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잘 생긴 청년이 말을 못하다니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다정이는 가지고 온 밥이며 물을 건네주었다. 다정이와 점심을 맛있게 먹은 청년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다정이에게 답례로 주었다. 무심코 받아보니 처음 보는 신기한 약초였다.
집으로 돌아온 다정이가 청년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자신이 캔 것처럼 신기한 약초를 꺼내자 부모님은 깜짝 놀랐다. 얼핏 보기에도 족히 백 년은 되었음직한 산삼이었기 때문이다. 산삼을 내다 판 다정이 아버지는 그 돈으로 밭을 몇 마지기 살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다정이는 뒷산에 올라 말 못하는 청년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디 사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물론 그때마다 청년은 다정이에게 신기한 약초들을 이것저것 주었다. 그 덕분에 다정이네는 금세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그 날도 다정이가 설레는 마음으로 뒷산에 오르는데 멀리서 보니 둘 만의 자리에 청년이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리 하는 것일까? 다정이가 가까이 가는데도 청년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옥황상제의 막내아들이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 인간세계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옥황상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던 터라 옥황상제는 차마 영원한 추방령을 내리지 못하고 조건을 붙였다.
“네가 만약 200년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묵언수행을 한다면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겠노라.”
“아바마마, 하늘나라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네가 200년 동안 약속을 지킨다면 네가 떨어진 마을 앞 섬에 있는 노송을 휘어 감고 열 바퀴를 돌도록 해라. 그러면 하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하여 옥황상제의 막내아들은 용으로 변하여 명천마을 뒷산에서 살게 되었다. 동시에 옥황상제는 명천마을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세월이 흘러 옥황상제와 약속한 200년이 다 되었다. 벌써 용섬의 소나무도 수령이 200년이 되어 거목이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위기가 다가왔다. 생각지 못했던 다정이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하마터면 말을 할 뻔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약속한 200년을 하루 앞두고 왕자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 내일이면 하늘나라로 돌아가 아바마마를 뵐 수 있을 텐데, 다정이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발목을 잡았다. 다정이의 순진무구한 눈빛이 하늘 길을 막아선 것이다. 그렇다고 200년의 기다림을 한순간에 포기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왁!”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청년을 놀래키려 다정이가 소리를 지르자 왕자는 하마터면 말을 할 뻔하였다. 하지만 200년 동안 말없이 지내다보니 아예 말을 잊어버린 듯 왕자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연을 말하자니 금기를 어겨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고, 말을 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자니 실망할 다정이의 모습이 떠올라 왕자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한 동안 먼 바다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한참 흐르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왕자는 다정이에게 뭔가를 꺼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 큰 약초였다. 오늘은 무슨 언짢은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온 다정이가 부모님께 약초를 건네 드리자 부모님은 뒤로 넘어질 뻔하였다. 부모님도 여태껏 처음 보는 커다란 산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뿌리가 아니라 다섯 뿌리나 되었다.
다음날 새벽, 뭔가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다정이가 마당에 나가 기지개를 펴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깜짝 놀라 빛이 비추는 곳을 보니 용섬이었다. 그런데 용섬 가운데 있는 노송을 커다란 청룡이 휘어 감고는 열 바퀴를 돌더니 한 차례 울음을 토해 내고는 순식간에 하늘 높이 사라졌다. 다정이에게는 그 용의 울음소리가 왠지 슬프게 들렸다.

용이 승천한 뒤로 다정이는 거의 매일 뒷산에 올랐지만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도 없이 사라진 청년을 그리워하며 다정이는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청년이 나타났다. 그런데 꿈속의 청년이 말을 하였다.
“나는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막내아들이오. 죄를 짓고 귀양을 내려왔다가 죄가 풀려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었소. 말을 하지 말라는 아바마마의 엄명이 계셔서 말도 못하고 떠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오. 내 그대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
꿈에서나마 청년과 재회한 다정이는 그때서야 의문이 사라졌다. 하지만 꿈만 같았던 청년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평생을 홀로 살았다. 물론 청년이 건네준 산삼을 팔아서 큰 부자가 되었기에 다정이 가족은 평생을 편하게 지냈다.

고흥 금산면 명천마을 앞에 있는 용섬
그때 이후 마을 앞 섬을 용섬(龍島)이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승천한 용의 기운이 항상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출항 할 때나 입항 할 때도 수호신인 용섬이 항상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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