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아들 살린 부모의 지극한 사랑
옛 날 고흥 포두면 중흥마을에 정씨 3대가 살았다. 사는 것은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내외 간 금슬이 좋은데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기에 화목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더구나 어린 손자가 얼마나 재롱을 부리는지 집안에 웃음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을 하늘도 시샘하였는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없는 형편에도 인근에 용하다는 의원은 다 불렀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아예 무슨 병인지조차 모르니 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책도 없이 죽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런 아들 내외를 지켜보는 시부모의 마음 또한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무슨 몹쓸 병에 걸렸는지 아들의 얼굴은 갈수록 일그러졌고, 고통을 참지 못하여 내는 신음 소리에 다들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이 아픈 이후로 단 하루도 편하게 자본 적이 없었던 정씨가 어쩐 일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꿈에 백발이 성성한 산신령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안타까워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안타까운 일이로다.”
“신령님, 제발 살려주세요.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꿈에서도 정씨는 아들 걱정이었다. 그러자 돌아서려던 산신령이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야기하였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정씨는 무슨 일인지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부인이 물어도 그는 도무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정씨가 부인을 보자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부인, 저리 두면 아들 목숨이 며칠 못 갈 것 같소. 그런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정씨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러다 뭔가 결심을 한 듯한 눈빛을 보이더니 말을 계속 하였다.
“산신령이 이르기를 아들을 살리려면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정씨 부인은 마른 침을 삼키더니 바짝 다가앉아 빨리 이야기하라는 듯이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게... 아들을 살리자면 손자 녀석을 희생시켜야 한다는데...”
뭔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던 정씨 부인은 남편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대경실색하면서 펄쩍 뛰었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아들 살리려고 손자를 희생시키다니요.”
말을 해놓고도 민망했는지 정씨는 그런 부인에게 뭐라 대꾸도 못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 다 말을 잊은 것처럼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다음날, 아들의 병이 극에 달했는지 그날따라 신음 소리가 더 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마저 부슬부슬 내려 정씨 내외의 시름 역시 극에 달하였다. 며느리는 그런 남편과 시부모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아침 일찍부터 남의 집 일 다니러 나가고 없었다.
아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정씨가 부인을 불러 살며시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손자는 빗속에도 놀러 나간다고 없으니 누가 들을 사람도 없었지만 정씨는 은밀한 목소리로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부인, 이제 시간이 없소. 아들이냐 손자냐 빨리 결정을 합시다.”
묵묵히 듣고 있던 부인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뭐라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부인 역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하였다.
정씨 내외는 며느리가 없는 틈을 타서 재빨리 일을 처리하기 위해 손자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손자를 찾아 막 사립문을 나서려는데 저쪽에서 손자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막상 손자를 희생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달려오자 두 사람은 크게 흔들렸다. 그러다 돌연 두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정씨 내외가 한참을 가마솥에서 무언가를 끓이더니 국물을 떠서 아들에게 먹였다. 한 숟갈 한 숟갈 겨우 받아먹는 아들을 바라보는 정씨 내외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의 눈에서도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혔다.
![[꾸미기]동자삼-3.jpg](/gears_pds/editor/news-fb4899fa-df0c-4541-ab27-da506521e19f/1735566332432.jpg)
정씨 내외는 며느리가 벌써 이틀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사실 이미 두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로지 아들을 살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사흘째 되는 날 놀랍게도 아들의 얼굴빛이 살아나더니 급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씨 내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난 것을 기뻐하는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묵직한 것이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깨어나자마자 손자부터 찾았다.
“아버지, 이놈은 어디 갔어요?”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정씨 내외의 얼굴은 아들이 낫기 전보다 더욱 일그러졌다. 도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며느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뭐라 할 말을 잃은 정씨가 아들을 부축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애야, 우선 바람이나 좀 쐬자. 몇 달 동안 누워있었으니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고 이야기하자꾸나.”
아들은 부모님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이상하기는 하였지만 별 생각 없이 아버지한테 기대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세 사람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정씨 내외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정씨 내외보다 더 놀란 것은 며느리였다. 여태껏 누워있던 남편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는 손자만 달려와 아버지 품에 덥석 안겼다.
사실은 이랬다. 며칠 전 품을 팔러 갔던 며느리는 갑자기 비가 내리자 일을 못하게 되었고 실망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먼발치서 보니까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부엌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혹시 드실 것이 없어서 그러나 생각한 며느리가 서둘러 부엌으로 다가갔다가 그만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킬 것인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온 며느리는 서낭당 밑에서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러다 남편보다는 아들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였다. 설령 아들을 희생시킨다 해도 남편이 낫는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느리는 아들을 찾아 데리고 그길로 친정으로 도망쳤다. 일단은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친정에서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병들어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도 떠오르고, 마음고생 하는 시부모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천진난만한 아들을 보면 다시 그런 마음이 싹 가시다가도 ‘그래 아들이야 또 낳으면 되지’ 하는 마음에 며느리는 독한 마음을 품고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의 병이 나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씨 부부가 아들에게 먹였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씨가 부엌으로 달려가서는 가마솥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가마솥에는 커다란 동삼(童參)이 들어있었다. 며칠 동안 손자라고 생각하고 달여서 아들을 먹였던 것이 동삼이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가족에게 산신령이 복을 내린 것이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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