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용소(龍沼)와 하연 감사
구례 산동면 원촌마을에 용소라 불리는 연못이 있다. 용소에는 하연 감사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하 감사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용소. 산동온천을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다.
고려말기였던 1376년, 우의정을 지낸 하자종(河自宗)과 진주 정씨 사이에 셋째 아들 연(演)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던 하연은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일찍이 과거 준비에 들어갔다. 연의 나이 불과 열네 살이던 1389년, 당시 가장 학식이 높았던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께 사사하였다. 연의 할아버지가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원(河允源)이며, 큰형 하왕(河瀇)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둘째 형 하동(河洞)도 풍해도(豊海道 지금의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훗날 동생 하결(河潔)은 대사간(大司諫), 막내동생 하부(河溥)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
첫째와 둘째도 영특하였지만 셋째 아들이 특히 영특한지라 아버지가 포은 정몽주 선생께 연을 특별히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1392년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 선생이 선죽교에서 비명횡사하고 나니 연의 상심이 너무나 컸다. 연의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집안도 대단한데다 영특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준이었고, 더구나 외모 또한 출중하여 인근 처자들은 하연의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스승을 잃고 상심하고 있는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연을 중매하고자 하는 매파들이 줄을 섰다. 그러다보니 하연의 부모 입장에서는 과거 공부에 지장을 줄까봐 서당에 다니는 것을 금하고 집으로 독선생을 불러 과거 준비를 시킬 정도였다.
그런데도 매파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자 급기야 하연의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를 위해 구례 산동에 있는 지인 집으로 유학을 보냈다. 비록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학문이 깊었던 친구에게 연의 아버지는 아들을 의탁하게 하였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산간벽지로 보내면 지겨운 매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믿을 만한 친구에게 사사하는 것 또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연이 내려온 곳은 구례 산동면 원촌마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친구라는 분은 학식이 뛰어났다. 하연이 보기에는 개경에서도 그러한 분을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시큰둥하였던 하연도 점차 산동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묵묵히 학문에 정진하던 연이 어느 날 머리를 식힐 겸 마을 앞 용소에 나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을 치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아리따운 처녀가 버드나무 가지로 물고기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비록 옷매무새는 초라하였지만 한눈에 보아도 고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다 연과 눈이 마주쳤는데 무슨 일인지 둘 다 동시에 볼이 발개졌다.
그 후 틈만 나면 용소에 나가 시간을 보내던 연은 우연한 일로 그 처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날도 물고기를 희롱하고 있던 처녀가 발을 헛디뎠는지 갑자기 용소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말았다. 허우적대고 있는 처녀를 향해 용소로 뛰어든 연은 구사일생으로 처녀를 구해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처녀의 이름은 버들이었다.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버들이라 이름이 지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버들이와의 만남에 푹 빠져버린 연은 급기야 과거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연의 부모가 원촌마을에 들이닥쳤다. 과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랑 놀음에 빠져 지내는 연을 어찌할 수 없었던 친구가 연통을 보낸 것이다.
매파들의 등쌀 때문에 시골로 내려보냈던 아들이 공부는 뒷전이고 사랑 놀음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의 부모가 한 달음에 내려왔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뒤로 한 채 연은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연이 떠난 뒤 버들이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이를 보다 못한 버들이 부모는 버들이를 근처 최부잣댁 소실로 들여보내고 말았다. 쌈 몇 섬이 탐이 났는지, 아니면 양반댁 자제와 놀아난 버들이가 미웠는지, 그것도 아니면 연의 아버지가 친구에게 뭐라 큰 소리를 쳤던 것으로 볼 때 뭔가 압력이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버들이는 그렇게 환갑이 다 된 최부잣댁 소실로 들어갔다.
최부자에게는 이미 장성한 아들이 넷 있었다. 그런데 소실로 들어간 버들이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다. 비록 아들이 넷이나 있기는 하였지만 말썽을 피우는 데다 본처 역시 잔소리만 심하여 최부자는 버들이가 낳은 늦둥이에게 푹 빠졌다.
하지만 한여름 소나기처럼 행복이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버들이가 소실로 들어온 지 얼마 안 지나 아들을 낳은 데다 우락부락한 최부자와는 달리 갓난아이의 용모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버들이와 그렇고 그런 소문이 자자하였던 하연의 핏줄이라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연기처럼 피어나는 소문이 최부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소문을 접한 최부자는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하연의 얼굴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러다보니 버들이는 물론이요 버들이가 낳은 아들까지도 구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최부자의 구박을 버티다 못한 버들이는 아들을 안고 용소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하연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동시에 뒤로 한 채 그렇게 버들이는 차디찬 용소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버들이 모자가 사라진 후 최부자는 물론이요 네 명의 아들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차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버들이의 저주가 최부잣댁에 미친 것이라고도 하고 애초에 집안 내력이 죽을 병을 타고 났다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흘러 어느 덧 20여 년이 지난 1422년 어느 날, 하연이 전라감사가 되어 구례에 나타났다. 139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쳤던 하연이 전라감사로 왔다가 구례에 들른 것이다. 구례에 온 하연은 옛 기억을 떠올렸는지 산동으로 행차하였다. 감사가 산동 작은 마을로 행차한다 하자 구례 관아에서는 난리가 났다.
오후에 산동에 도착한 하연 감사가 관아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머물러 여장을 풀다가 피곤했는지 잠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슬피 울면서 자신의 다섯 아들을 살려 달라 간곡히 부탁하였다.
꿈에서 깬 하 감사가 괴이한 생각에 하인을 불러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감사가 도착한다고 해서 인근 주민들이 점심 때 용소에서 잉어 다섯 마리를 잡아 저녁 찬거리로 준비하고 있었다. 막 목숨을 잃을 뻔한 잉어 다섯 마리가 감사의 손에 의해 방생되었다.
그때야 버들이 생각이 났는지 감사가 은밀하게 버들이의 소식을 물었지만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지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숙소에서 잠을 자던 하 감사의 꿈에 다시 예의 그 노인이 나타나 하연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꿈에서 깨어난 하 감사는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용소로 나아갔다. 오래 전 버들이와의 추억을 기억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 감사는 용소 가까이서 뭔가를 응시하였다.
그때였다. 용소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뭔가가 꿈틀거렸다. 달빛 사이로 보니 용의 꼬리가 분명하였다. 한 마리도 아닌 다섯 마리 용이 서로 뒤엉켜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 요망한 것들!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겠느냐?”

담력이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 감사가 호통을 치자 용 다섯 마리가 몸통을 드러내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뒤로 넘어지고 말았을 텐데 하 감사는 요지부동이었다. 하 감사가 다시 소리쳤다.
“네, 이놈들! 감히 누구 앞에서 요망한 짓을 하는 게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자 이번에는 용 다섯 마리가 불쑥 머리를 드러내었다. 그러더니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느닷없이 하 감사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순간 하 감사가 갑자기 뒷덜미를 움켜쥐고는 뭐라 하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목격자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용의 얼굴이 흡사 버들이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용소 앞에는 진주(晉州) 하씨 문효공파(文孝公派) 중앙종친회에서 세운 유적비가 있는데, 비각에 새겨진 용과 관련된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께서 전라감사로 있던 1422년(세종 4년) 산동에서 주무시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내 손자 다섯이 영감의 반찬거리로 잡혀와 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부디 살려 보내달라고 간청하기에 꿈을 깨어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정말로 잉어 다섯 마리를 잡아다 놓았다 함으로 즉시 풀어주라고 하명하였던 바 3일 후 밤 꿈에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면서 무슨 소망이 있느냐고 묻기에 용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날이 새거든 못가로 나오라고 하고는 그 노인이 사라졌다. 이튿날 못가에 나갔더니 정말로 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용소 앞에 세워진 하연 감사의 유적비. 하 감사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하연 감사는 1396년에 과거에 급제, 이듬해 봉상사 녹사로 벼슬을 시작하여 1419년 강원도관찰사, 1427년 평양부윤, 1445년 우의정, 1447년 좌의정을 거쳐 1450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453년 78세로 별세하였으니 설화 속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가문인 데다 워낙 총명하였기에 다양한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또한 용소 건너에 있는 운흥정(雲興亭)은 이 고장 유림과 선비들이 고사와 유적을 추앙하여 세운 것이라 하니 용을 보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할 것이다 ♠

하 감사에 얽힌 이야기를 기리며 지역 유림들이 세웠다는 운흥정(雲興亭) 전경.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