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인터뷰 前 여수문화원장 故 문정인 선생

편집부
2024-12-02 15:51
평생을 여수와 함께 한 영원한 麗水人

「그저 한잔 하자는 자리면 / 젊은이도 좋고 늙은이도 좋은 / 무작정 즐겁기만 한 / 속없는 사나이 / 빈 속을 독한 술로 가득 채우고 / 껄껄껄 웃어대는 철삭동이 / 속없는 사나이」故 문정인 선생의 자작시 <속없는 사나이> 전문이다.

 

문정인 선생은 여수문화연구소(www.ysculture.com)라는 사이트를 직접 운영하면서 여수 문화기행, 여수 향토자료, 여수 앨범, 여수의 전설 등 다채로운 향토이야기를 집대성하였다. 그가 이렇게 여수의 향토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7년부터 1999년까지 12년 동안 여수문화원장을 지낸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수에 대한 사랑이 온몸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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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선생. 오른쪽은 중앙동‘화신약국’시절.

문정인. 그는 1937년 6월 30일 태어나 2007년 7월 26일 작고하기까지 오로지 여수에 대한 관심 하나만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수고등학교(5회)와 성균관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화신약국을 운영하면서 평생을 약사라는 직업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선생은 영원한 여수인(麗水人)이다.

늦게 시작한 서예와 홀로 익힌 달마도를 치는 것이 낙이라 하셨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은 서예에도 조예가 깊다. 또한 옛 생명체가 곱게 삭아 흙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생명체를 다루는 마음으로 흙을 빚어 자기를 굽기도 하고, 널판자 위에 여수 풍경을 그려 넣고 전라좌수영시를 쓴 다음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는 서각도 선생의 취미였다.

이처럼 낚시와 사냥, 등산이 취미이면서 시, 수필, 서각, 서예에 조예가 깊은 분이지만 자신의 취미나 기쁨보다는 오로지 평생을 향토 사료를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운영하셨던 사이트는 여수의 재산이자 자랑거리이다. 여수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한 세상을 살다가신 故 문정인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문학을 사랑한 약사, 문화원장이 되다

문정인 선생은 1937년 오사카에서 아버지 문장열과 어머니 박오례 사이에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된 상태로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는데, 오사카에서 출생 후 여덟 살 되던 해인 1945년 해방과 함께 아버지 고향인 여수로 돌아와 여수 서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여수고(5회), 성균관대 약대(60년)를 졸업하고 1984년 여수 중앙동 해안통에서 ‘화신약국’을 열었다. 그 후 문수동 부영 9차 상가로 옮겨 10여 년을 더 운영했다.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문정인 선생은 지역 문화인들과 자주 어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적 영감을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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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살 때의 부모님. 문장열, 박오례 님. 오사카 시절 도라짱으로 불리던 시절의 선생(오른쪽).

그러던 1987년 간판만 있을 뿐 유명무실하였던 여수문화원 원장(1987~199년 삼려통합이전 3대) 직을 갑자기 맡게 되었다. 당시 여수 송재구 시장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선생의 여수 사랑과 문화에 대한 열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문화원 ‘홈페이지’를 열다

문화원장이 된 선생은 약국 경영보다 도자기를 굽고 서예를 즐기는 삶이 더 익숙해졌다. 지역문화원은 그 지역 정신문화의 지킴이요 시간과 역사 속의 인문학적 가치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기둥의 역할이다. 그런 문화원이 날이 궂으면 비가 샜다. 문화에 대한 행정의 무지에서 비롯된 허술함에 선생은 부끄러웠다. 그러던 그에게 문화원의 역량을 높일 기회가 찾아온다.

1996년 경향신문과 문화체육부 주관으로 한국의 5000년 문화를 가상공간에 구축하자는 ‘문화정보화운동’이 펼쳐졌다. 전국 30곳의 단체를 선정해 홈페이지 구축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지역에서는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합동으로 설립한 정보센터와 여수문화원 전산실 등 2곳이 응모하였는데 여수문화원이 만든 ‘여수 문화기행’ 홈페이지가 이화여대, 서울대 등의 전산실을 제치고 ‘사이버문화관’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은 것이다. 전국 192개 문화원 중 유일했다.

선생은 홈페이지에 싣는 여수 진남제와 거북선 등의 소개 글을 자비를 들여 영어와 일어, 중국어로도 변역해 게시했다. 인접 국가에 여수의 문화재와 축제를 알려 관광객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홈페이지는 ‘여수문화연구소(www.ysculture.com)’의 모습으로 지금도 오픈되어 있다. 부인 이종애(69세·사진) 여사는 ‘여수문화연구소’에 대한 선생의 남다른 애착을 이렇게 전했다.

“1996년, 97년 그때는 홈페이지가 뭔지도 모를 때였지요. 젊은 사람들도 끙끙대는 것을 60이 넘은 사람이 홀로 독학하다시피하며 밤샘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번역도 대부분 직접 손을 대셨어요. 돌아가실 때도 다른 유언은 없는데 유독 ‘여수문화연구소’는 닫지 말고 당신이라도 운영해 달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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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아름다운 여수! 여수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부제처럼 홈페이지 구석구석엔 여수문화기행, 향토사료, 여수 땅이름 유래, 여수방언, 옛 여수 사진 모음, 여수의 전설 등 여수문화애호가이자 연구가인 선생의 손때 묻은 페이지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종애 여사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는 하는데 본인이 운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이 기록들을 아끼고 사랑해줄 누군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말한다.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산하 좌익 군인들이 일으켰던 반란은 우리 민족의 처참한 비극입니다.”(1988년 12월 10일자 광주일보 10면 ‘여순반란사건 개칭운동’ 관련 기사 시작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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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향토 발언대’에 실린 선생의 글.

‘여순반란사건’으로 오랜 시간 각인되어 왔던 이 사건은 여수와 순천 지역민의 가슴에 큰 상처였다. 1988년 비극의 피해자들을 ‘반란자’로 둔갑시킨 명칭을 바꾸기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이 펼쳐졌다. 여수문화원과 여수청년회의소, 청소년선도회 등이 나선 이 캠페인은 동부 6군을 넘어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선생은 신문에 기고를 하는 등 캠페인의 맨 앞에 나섰다.

1992년에는 ‘여순반란사건 개칭 추진위원회’를 꾸려 위원장을 맡아 사건의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며 범시민 서명운동을 펼쳤다. 이 같은 노력은 1992년 10월 국감에서 이문석 당시 총무처 장관으로부터 “지역민의 명예에 심대한 훼손의 우려가 있다. 본질에 맞는 명칭이 사용되도록 모든 행정적 노력을 다하겠다”(1992년 10월 21일 자 전남일보)는 답변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선생과 지역민의 노력은 1993년 정부와 여당인 민자당 등이 재조명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사건의 명칭은 ‘반란’이라는 오욕의 흔적을 지우고 ‘여순사건’으로 공식화 되었다. ‘여순사건’ 개칭 추진운동을 통해 사건의 기록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 선생은 1997년 여수문화원의 이름으로 ‘14연대 반란사건 50주년 결산집’을 발간했다. 선생은 “불행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새 여수 건설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글로 발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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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선생이 여수문화원 재임시절 발간한 여순사건 관련 자료집들.

 

충무공 사액사원 1호 ‘충민사’ 사적 지정

1989년 9월 1백여 명의 지역 인사들이 모여 ‘전라좌수영 성역화추진위’가 구성된다. 성역화를 위한 모임을 갖기 시작한 지 1년이 된 시점이었다. 위원장인 당시 고려상호신용금고 정채호 대표를 중심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사액사원 1호인 ‘충민사’를 사적으로 지정·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충렬사(사적 236호)가 있는 통영을 장군의 시호인 충무라 부르고, 아산에는 현충사(사적 155호)가 있는데 왜 여수는 외면당하고 있냐며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직접 액자를 내리고 제사를 지낸 곳인 ‘충민사’를 사적지로 지정해야 한다는 지역민의 바람이 담긴 역사문화운동이었다. 선생은 추진위의 목소리가 되어 각종 언론 등을 통해 지정의 당위성을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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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성역화를 추진하면서 지역의 각 단체들이 광주일보 등에 게재한 광고. 문정인 선생이 스크랩 해둔 자료.

당시 전남지방기념물 11호에 불과했던 ‘충민사’는 4년 후 1993년 6월 사적 381호로 정식 지정되었다.

추진위 구성원들과 여수 시민들에게 이 일은 대단한 경사였다. 충민사의 사적 지정은 충민사와 관련있는 유물들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질 것이었다. 4백 년 만의 숙원을 풀었다며 좋아한 선생은 지정 통보를 받은 1992년 11월 21일 아침, 한 지역지에 ‘여수항 경사’라는 시를 문화원장의 이름으로 띄운다.

“... 충무공사액 1호 사원 충민사는 사적으로 지정받으니 / 좌수영 선조님들의 영령을 대할 수 있게 되었네 / 해방에 버금가는 이 경사, 얼씨구나, 절시구나 / 경사 속의 경사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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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81호(1993년 6월1일)로 지정된 충민사는 이순신이 전사한 3년 뒤인 1601년(선조 34년) 당시 영의정 이항복이 발의하여 왕명으로 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하였는데,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 5년 앞선 이순신을 모신 최초의 사액(賜額)사당이다.

 

‘난중일기’를 바로잡다

1994년 4월 4일 여수진남문예회관에서는 ‘난중일기’ 번역본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출판된 난중일기는 아산 현충사에 보관 중이던 난중일기 영인본을 복사한 것을 기초로 번역이 이뤄진 것으로 당시 여도중 정희선 교사(현 청암대 교수)가 번역자로 참여했다. 이 충무공의 친필영인본을 수록하고, 해설은 요즘 세대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되었다. 특히 날짜별로 분류한 뒤 번역을 달아 비교 검토가 가능하게 했다.

선생은 1994년 1월 27일자 전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충무공이 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한 곳이 여수인데 기존의 한글번역판에는 이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욱 본영·동헌·진 등 수군 주둔지의 지명의 경우 전남지역은 아예 해설이 없어 삼도수군통제영이었던 여수가 임란 해전사의 뒷전에 밀려있어 안타깝습니다”라고 책을 출판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다.

선생은 기존에 출판되어 있던 6종의 난중일기가 충무공의 주요 활동 무대를 경남, 충무 등 한려수도 일대로 한정해 기술되어 있음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발간된 난중일기 중 첫 대목에 등장하는 “일진 초사흘 동헌에 나와...”에서 ‘동헌’은 지금의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을 지칭하는 것인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며 “경남 지역의 지명과 주둔지는 현재명과 함께 자세한 각주까지 곁들여 있다”고 지적했다.

1993년 1월 31일 중앙일보와의 취재 인터뷰에서 선생은 이은상 등 학자들이 발간한 난중일기의 오류도 지적했다. “충무공이 통제사 임명을 받은 곳이 한산도이고 정유재란 때 원균의 패전으로 한산진이 망해버렸으니 통제영이 따로 없다. 이순신이 진을 치고 다닌 곳이 곧 통제영이다”라는 부분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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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선생이 여수문화원장 재임시절 출판한‘난중일기’번역본. 당시 700권만 제작 돼 전국 도서관 등에 배포되면서 지역에는 몇 권 남아있지 않다. 선생의 부인인 이종애 여사가 설화와 인물에 기증했다.

선생은 “‘난중일기’를 비롯해 충무공의 장계와 서신, 유성룡의 ‘징비록’ 등에는 분명 여수를 지칭할 때 본영(좌수영) 또는 영(통제영)으로 했으며 한산도를 일컬을 때는 ‘한산도’ 또는 ‘한산진’이라고 밝혔다”며 “한산도를 지칭하면서 ‘영’ 또는 ‘본영’이라고 쓴 곳은 충무공이 직접 쓴 ‘난중일기 초서체본’과 정조 때 편찬한 ‘난중일기 해서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단지 ‘진’으로 표기했다”고 주장했다. 올바르고 정확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한 선생의 연구와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종애 여사는 선생의 난중일기 작업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낸 뒤 꽤 오래도록 좋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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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번역본 출판기념회 사진. 지역신문인‘한려신문’1994년 4월 7일 자에 실린 사진이다.

 

영원한 문화인, 문화를 남기다

선생은 1995년 ‘앞선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한 문인이었다. 문집 ‘속없는 사나이(1997)’와 ‘속없는 이야기(2002)’를 펴냈으며 여수수필문학회 회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문화원장 재임 시절엔 지역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다양한 사업들을 펼쳤다. 1949년 여수읍에서 여수시로 승격한 이후 처음으로 향토사인 ‘삼도수군통제영 여수동사’를 1993년 발간했다. 약 2년 동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한데 모아 여수시 관내 27개 동의 향토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마모되어 가는 여수지역 내 비문의 탁본을 제작해 전시회를 열고, 탁본들을 한데 묶어 ‘여수지역 비석문 탁본 및 한역판(1994)’을 발간했다.

사진집 ‘사진으로 본 여수역사’와 ‘여수문화 한영중일 4개 국어 문화기행집’을 발간하고 여수를 알리는 비디오를 제작해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는 등 관광여수를 위한 디딤돌을 놓았다.

시민들과의 문화를 통한 교류도 활발히 진행했다. 문화원 내에 ‘토완동우회’를 결성해 월 1만원 회비를 내면 언제든지 흙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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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직접 흙으로 제작해 여수시에 기증한 ‘방답 거북선’모형(한려신문).

바쁘게 살다보니 가정은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 이종애 여사는 그런 선생이 야속할 법도 한데 “남자는 바깥일을 해야지요. 아이들이 많이 서운해 하긴 했지만, 저는 크게 원망하거나 한 적 없어요.”라고 말한다.

선생은 문화원장을 사임한 뒤 문수동 화신약국 안쪽에 약국보다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 ‘문화사랑방’을 열고자 했다.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일어 공부도 함께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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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문집‘속없는 사나이(1997)’와 ‘속없는 이야기(2002)’(왼쪽 위). 여수를 알리는 비디오 영상물을 제작해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표창장은 문화원 전시실에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왼쪽 아래). 서예에 열중하고 있는 문정인 선생(오른쪽).

 

“문화사랑방을 만드는 일에 아주 열심이었지요. 약국 안에 약국 두 배가 넘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사랑방을 여신다고 굉장히 즐거워하셨어요. 약국보다 사랑방이 먼저였어요. 그런 사람이었지요. 평생 사람들과 어울려 배우고 알아간다는 것의 즐거움을 아셨던 분이다”

선생의 열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정애 여사의 회고담이다.

선생은 삼여통합 이후 문화원 원장을 사임하게 되면서 많이 안타까워했다. 얼마나 서운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그냥 사무국장하면 안 될까?”라며 진심을 내보이셨다고 한다. ‘문화사랑방’ 을 꾸미며 어린아이마냥 좋아했던 선생이 대장암 선고를 받은 것은 두 번째 문집 ‘속없는 이야기’를 낸 2002년이었다. 5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선생은 2007년 영면에 드셨다.

‘호고인불속(好古人不俗 옛것이나 헌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속되지 않다)’이라는 선생의 좌우명처럼, 오래되고 낡은 것을 좋아하지만 마음은 닳지 않은 누군가가 나타나 선생이 남긴 뜻과 ‘여수문화연구소’의 기록을 이어주길 소망해 본다. (2014년 10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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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여수문화원(원안)과 여수시 종화동에 위치한 현재의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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