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할미와 함께 왜구를 물리치고 마을을 구한

고흥군 도화면 봉룡리 고당마을

‘영험한 할미당 팽나무’

1592년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은 전 국토를 전쟁의 참화 속에 몰아넣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호남 민초들의 항전은 후일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고흥군 도화면 봉룡리 고당마을에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에 당 할매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라고 하지만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오후, 팽나무 아래로 마을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하나둘 모여들었는데 마을 주민들의 손에는 저마다 이불 보퉁이며 쌀자루가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저 아래 마을에 왜놈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떼로 몰려와 사람 죽이기를 마치 파리 잡듯이 하고 아녀자를 겁탈하는 것을 예사로 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지금 당장 마을을 떠나 피난을 가야하지 않겠소?”

“마을 장정들은 모두 이순신 장군 수하에 수군으로 들어가 지금 마을엔 맞서 싸울 젊은이도 없고, 왜놈들은 귀가 터지는 소리를 내는 조총이라는 것을 갖고 있어서 가까이 가기도 전에 숨이 끊어진다고 하는데, 살려면 얼른 마을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팽나무 아래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불안한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누구도 마을을 위기에서 구할 묘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때 팽나무 아래에 초막을 짓고 정월 보름이면 당산제를 지내던 노파가 힘겹게 지팡이에 의지해 노구를 일으키며 마을 사람들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어제 저녁에 팽나무 할미가 내게 비책을 일러 주었으니 이제부터 걱정하지 말고 모두 내 말을 듣고, 내가 시킨 대로 하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팽나무와 노파를 번갈아 바라보며 마을을 구할 묘책을 듣기 위해 노파 주위로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 할매는 자신이 초막집에서 가지고 온 모퉁이를 풀어 그 속에 들어있던 붉은 천을 마을 주민들에게 보여주며 “몸에 두른 붉은색 옷은 물론이고 집에 있는 붉은색 천을 모두 이곳 당나무 아래로 가지고 나오라”고 당부했다.

평소 말수가 적고 흰소리를 하지 않는 당 할매의 성품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몸에 두르고 있는 붉은색 치마를 풀고, 집안에 있는 붉은 천을 모두 모아 당나무 아래에 쌓아 놓았다.

붉은 천이 모두 모이자 당 할매는 붉은 천을 마을 주민들과 함께 당나무 둘레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당나무는 마치 붉은색 깃발을 모아 놓은 무더기처럼 기이한 형상으로 변해갔다. 당나무에 붉은 천이 모두 감기고, 마침 해가지며 당나무와 마을 주민들을 비추었다.

이윽고 저 멀리 마을 아래에서 진군의 나팔소리가 울리고, 수많은 왜군들이 떼를 이뤄 마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긴장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왜군들이 마을 주민들의 시야에 막 들어오려는 찰나 무슨 일인지 진군을 멈추고 잠시 서성이다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왜군들이 길을 되돌아 모두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당 할매가 마을 주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군들이 다가올 때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오는 것을 모두 보았을 게야. 저놈들은 우리 마을에 붉은 깃발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이미 다른 동료 왜군들이 미리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알고 오던 길을 돌아간 것이라네.”

마을 주민들이 정성으로 섬겨온 팽나무가 마을을 구할 비책으로 “자신의 몸뚱이에 붉은 천을 감으라”는 선몽을 당산 할매에게 미리 알려, 마을을 왜구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마을사람들은 팽나무 아래에 다시 당을 짓고 그 이름을 할미당이라 하고 마을이름도 고당으로 바꿨으며, 이후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당마을 사람들은 그 전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