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1924~2009)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광주 묘역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혹독했던 정치 겨울 동안 강인한 덩굴 풀 인동초를 잊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라 될 것을 약속합니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인동 덩굴에 비유한 것이다. 사실 인동초는 풀이 아니라 나무다. 흔히 이야기하는 겨우살이덩굴인 것이다.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인동초’인 이유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
신안군 하의도 촌놈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신안군의 작은 섬 하의도 후광리에서 김운식과 장수금 사이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김대중은 마음이 여리고 겁이 많았다고 한다. 밤에는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도깨비가 튀어나올까봐 마음을 졸였으며, 바람이 불면 마당 구석에 있는 화장실을 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혼자서 뭍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하루는 갈대밭에서 야생 오리를 잡아와 집에서 키우려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먹이를 잡아다 주며 온갖 정성을 들였지만 이내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다시 야생 오리를 잡아와 어떻게든 길러보려고 했다.
어린 김대중은 또 엉뚱하게 나중에 임금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의도에는 김해 김씨 선산이 명당이라서 그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임금이 되고 싶었으면 이웃 마을에 아기가 태어나자 점쟁이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화를 냈다고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있는 김대중대통령 생가터.
아홉 살 때 김대중은 서당을 다녔다. 당시 하의도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서당에 다니게 된 것이다. 당시 서당 훈장이었던 김연(金鍊)은 학문이 깊어 인근에 명성이 높았는데, 김대중을 가르치고는 “김대중은 크게 될 인물이다.”고 하였다.
1933년 4월, 김대중은 하의도에 새로 생긴 4년제 보통학교1)에 입학하였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중은 서당에 다닌 학력을 인정받아 곧바로 2학년에 편입되었다.
1) 지금의 초등학교.
김대중은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통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신문을 탐독하였다. 아버지가 구장(區長)2)을 맡고 있어서 <매일신보>가 들어왔다. 외딴 섬마을이기 때문에 신문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며칠 묵은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김대중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소식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정치면은 어린 김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통학교까지 왕복 3km를 걸어 다니면서도 김대중은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벙거지를 둘러쓰고 내달렸다고 훗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하였다. 시험을 보면 늘 최고의 성적을 받았고 어머니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느라 바빴다.
1936년 가을, 김대중의 가족은 목포로 이사를 하게 된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김대중의 부모가 집과 논밭을 팔아 목포로 이사를 한 것이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김대중은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3)로 전학했다. 꿈에도 그리던 뭍에서의 생활은 김대중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소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대중은 1939년 4월 5년제인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 입학하였다. 일본 학생이 절반이나 되는데도 김대중은 3년 동안 반장을 맡았다. 3학년 때 진학반으로 옮긴 김대중은 만주에 있던 건국대학에 진학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941년 겨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청년사업가 김대중
1944년 봄 졸업을 한 김대중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경리 담당 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이듬해인 1945년 4월 9일, 김대중은 목포에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던 차보륜의 딸 차용애와 결혼한다. 김대중의 나이 21세, 차용애의 나이 19세였다.

차용애 여사와 장남 김홍일, 차남 김홍업
<출처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광복 후에는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원으로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당초 의도와 다르게 좌경화 움직임을 보여 탈퇴를 한다.
좌익과 결별한 뒤 1947년, 김대중은 배 한척을 가지고 목포해운공사를 세워 사업을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아 50~70t 선박 여러 척을 보유하게 된다. 사업이 한창이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김대중은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철수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처형은 면하였다.
그해 10월부터는 선박 두 척을 수리하여 사업을 재개하였고, 목포일보를 인수해 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말이 사장이지 열악한 조건 때문에 김대중도 직접 취재를 나갔는데, 당시의 경험이 김대중의 정치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기간 동안 김대중은 해상방위대 전남지구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1년 동안 국군의 군수 물자 해상 수송을 맡기도 했다. 해상방위대는 전쟁 기간 1년 동안만 유지된 보조 기관이다.
정치 입문과 연이은 실패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는데, 김대중은 목포시 선거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국민당 정중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만다. 이듬해 김대중은 상경하여 야당 정치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1956년 9월 민주당 신파에 입당한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유당 후보 측에서 중복추천을 함으로써 김대중의 등록을 무효로 만들어버려 출마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김대중은 대법원에 제소하여 1959년 승소하게 되고 자유당 국회의원인 나상근이 당선 무효되어 1960년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또 다시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하고, 같은 해 7월에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인제군 후보로 출마하지만 또 자유당 전형산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이 와중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지만, 김대중을 지켜본 장면(張勉 1899~1966) 전 국무총리가 그를 대변인으로 발탁해 중앙으로 올라오게 된다.
4.19혁명 이후 자유당 소속 전형산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로 자격을 박탈당하게 됨으로써 이듬해인 1961년 5월 14일 인제군 선거구에서 또 다시 보궐선거가 열렸는데, 김대중은 드디어 민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이틀 뒤 5.16 쿠데타가 발생함으로써 국회가 해산되고 만다. 그야말로 비운의 정치인인 셈이다.
재혼 후 승승장구하다
김대중은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을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처음으로 본격적인 의정 활동을 하게 된다.

이희호 여사와 결혼식
<출처 :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64년 당시 야당인 민주당 김준연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공화당 정권이 한일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 1억 3000만 달러를 들여와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상정했고, 이때 김대중이 필리버스터 의사 진행 발언에 나섰다. 그는 무려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한일 협정의 잘못된 점, 김준연 의원 구속의 부당성 등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결국 구속동의안 처리는 무산됐다.
이 일로 초선의 김대중은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으며, 당의 중진인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박사에게 인정받아, 당내에서도 입지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박정희 대통령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당선된다.
1969년에는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여 이듬해인 1970년에 치러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을 꺾고 대통령 후보가 됨으로써 김대중은 일약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김대중
비록 엄청난 금권 관권 선거로 인하여 아깝게(95만 표 차이) 떨어졌지만 김대중은 차세대 지도자로서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하게 되었다.
1971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전국구로 자리를 옮겨 전국을 누빔으로써 신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 광주-목포 간 1번 국도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 사고로 김대중의 보좌관이 세상을 떠나고 본인도 중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게 된 것이다.
유신 치하에서의 김대중
이제 더 이상 선거로는 집권을 연장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최후의 방법으로 10월 유신을 감행한다. 한 마디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당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유신 소식을 듣게 된 김대중은 미국 망명을 결심한다.
그리고 이후 약 1년 동안 일본과 미국 각지에서 기자 회견과 연설 등을 통해 반유신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한다.
그가 동교동 가택에 연금되어 있는 동안 양심적인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의 반유신 투쟁은 계속되었다. 1976년 명동 성당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된 김대중은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받고 1978년 12월 가석방되었다.
1979년 3월 4일, 윤보선의 자택에서 국민연합을 구성하고 윤보선·함석헌과 함께 3인 공동 의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그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을 총재 후보로 지지하였다. 얼마 안가 10.26 사건이 터지고 김대중은 드디어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다.
신군부세력 집권기의 김대중
가택연금에서 벗어난 김대중은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김종필, 신민당을 지키고 있던 김영삼과 더불어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른다. 이른바 3김 시대가 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12.12사태로 신군부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고, 1980년 5.17쿠데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일체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김대중은 내란 음모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만다.
그러자 이튿날인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가 거세게 벌어진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김옥두, 김상현 등 김대중의 측근들은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벙커로 연행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군사 재판의 결과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자 전 세계에서 김대중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미국대통령조차 김대중에 대한 사형이 집행될 경우 양국 관계에 파국이 올 것이라고 거세게 압박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서한을 보내어 선처를 호소하였다.
결국 안팎의 압력에 굴복한 신군부는 1981년 1월 김대중을 무기 징역으로 감형한다. 그리고 이듬해 12월, 무릎 치료를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미국으로 보낸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직전에 정치 규제에서 풀린 수많은 야당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한다. 그러자 김대중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암살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김대중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전두환의 방미를 무산시키겠다고 압박을 가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미국의 몇몇 하원의원들과 저명 인사들이 김대중의 귀국길에 자진 동행하였다.
김대중이 귀국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김대중을 연행하여 동교동에 연금하였다. 그러나 그 덕분에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제1야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얼마 후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김영삼 등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면서 김대중은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게 된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단일화가 무산됨으로써 두 사람은 민주화의 열망을 저버린 사람으로 지탄을 받게 된다.
하지만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은 서울과 호남을 석권해 제1 야당이 된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김대중은 제1야당 당수로서 일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가 여대야소 국면으로 바뀌면서 다시 판도가 달라진다. 주도권을 빼앗긴 김대중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생의 라이벌 김영삼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이미 69세였던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1월 영국으로 출국한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3년부터 국내외의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김대중은 오히려 은퇴 전보다 더 호의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정계복귀를 계획한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때 민주당 지지선언을 하며 정계복귀를 타진하던 김대중은 그해 7월 마침내 정계 복귀를 선언하였고,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 본격적인 대선행보를 시작하였다.
미국 클린턴과 영국 블레어 등 정권교체 성공 사례 연구가 반영된 ‘New DJ Plan’으로 약간의 우클릭을 시도한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연대를 추진하여 1997년 7월 이른바 DJP연합이 탄생하게 된다.

DJP연합으로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왼쪽이 김종필, 오른쪽이 박태준
결국 그해 12월 김대중은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을 꺾고 최초로 수평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하며 드디어 4수 끝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다
대통령으로서의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길 수밖에 없어 논외로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평생 일관되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해 헌신해 온 점을 평가받은 것이다.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은 마하트마 간디, 사하로프, 넬슨 만델라, 빌리 브란트 등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하였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2004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해 3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 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
2004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을 하자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김대중은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다. 그 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도 김대중은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을 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하여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2009년 8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내고자 평생을 바친 김대중 대통령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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