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태조 왕건의 부인 장화왕후 오씨

왕건과 오씨의 설화가 전해 오는 완사천(浣紗泉)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877~943)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바로 태자 책봉과 관련한 고민이었다. 각 지방의 호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혼인정책을 펼친 결과 부인이 모두 29명인데다 아들 25명에 딸이 9명이었다. 그러니 자기 지방 출신을 왕위계승자로 만들기 위한 암투가 치열해진 것이다.
첫째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큰 아들이 장화왕후 오씨(?~?)에게서 난 무(武)였지만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에게 태(泰), 요(堯), 소(昭) 등 아들이 다섯이나 되었다. 더구나 오씨는 나주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유씨는 충주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기에 왕건이 매우 곤란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장화왕후가 어느 날 왕건에게 아들 무의 볼에 난 흉터 이야기를 꺼내며 얼굴을 붉혔다.
“폐하, 무의 얼굴에 생긴 돗자리 무늬가 갈수록 선명해지니 걱정입니다.”
그러자 왕건은 장화왕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태봉국(泰封國) 궁예의 장군으로서 909년 나주로 출정한 왕건은 나주에 머무르면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왕건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 산 아래에 오색 광채가 비치는 것이 아닌가.
왕건이 광채가 나는 곳을 따라 가보니 샘가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리따운 모습에 반한 왕건이 처녀에게 물 한 그릇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운 뒤 공손히 바쳤다.
“아니, 아가씨. 어찌 버들잎을 띄운 것이오?”
“급하게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처녀가 바로 나주 토착세력인 나주오씨 집안 오다련의 딸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사실 오씨 처녀는 왕건이 찾아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첫날 밤, 오씨와 동침을 하게 된 왕건은 장차 삼한을 통일하고자 하는 자신의 미래에 그녀의 한미한 가문이 걸림돌이 될 것 같아 마지막 순간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고 말았다. 그러자 오씨가 다시 몰래 그것을 집어넣어 임신이 되었다.
<고려사>에서는 그로 인해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고, 사람들은 혜종을 ‘주름살 임금’1)이라 불렀다고 한다.
1)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120쪽.
장화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옛 기억을 떠올린 왕건은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오씨를 바라보았다. 무의 나이가 일곱 살이니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그 아리땁던 처녀가 구중궁궐 속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고운 얼굴이 저리 상하였단 말인가.
그러나 오씨를 생각하면 무를 태자에 올려야 하지만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인 셋째 왕후 유씨 집안을 무시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고민이 깊어진 왕건은 상자에 자황포(赭黃袍)2)를 담아 장화왕후 오씨에게 보냈다.
2) 왕이나 귀인이 입는 황적색 도포.

장화왕후 유적비
왕후가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를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이니 그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여론을 조성하여 태조에게 간청함으로써 장화왕후 오씨에게서 난 무(武)가 921년(태조 4년) 드디어 정윤(正胤)3)에 책봉되었다.
3) 고려 초기엔 모든 왕자들이 너도 나도 태자라 불려서 왕위 계승자는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 따로 불렀다.
장화왕후는 왕건과의 만남으로 추정해 보건대 895년을 전후로 태어났을 것으로 보이며, 934년을 전후로 해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녀가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혜종이 태어난 마을은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왕을 상징하는 ‘용(龍)’자를 써서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다. 당시 오씨 처녀가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이 지금도 나주 시청 앞쪽 도로가에 있고, 그 옆에는 왕비의 비(碑)가 남아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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