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일제에 저항했던 황보익 목사

한국설화연구소
2025-01-09 16:22
일제강점기 전남 동부권
기독교 전파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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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황씨인 황보익(1895-1953) 목사는 여수시 남면(금오도) 우학리에서 황정빈의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황 목사를 포함해 그 5형제는 일찍이 개신교를 받아 들였고, 일제 강점기 3.1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가문 전체가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일제에 저항하는 등 활약을 보였음에도 교계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전남 동부권의 기독교역사를 보면 예수교장로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지기 이전에는 순천노회를 중심으로 교회 개척이 이뤄졌고, 목회자들을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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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학리교회 전경

여수 우학리에서 고흥 거금도로

 

황 목사의 고향인 금오도 우학리에는 1906년에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당시 의병지도자 서병도가 벌교 무만동에서 이상한 서양종교를 보고 돌아와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고, 안돌영과 김문옥 두가정이 모여 드린 가정예배가 시작이었다.

이에 소장파 명창순, 황보익, 안정혁, 김문옥, 정두범 등은 여수까지 범선을 타고 다시 벌교 무만교회(1905년 설립)까지 걸어서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섬마을의 미신을 몰아내고 주민을 계도하려면 예수교를 믿는 것이 제일 낫다는 데 뜻을 같이하여 무만교회의 최진막 조사(전도사)를 초빙해왔다.

이들은 우학리 322-2번지에 있던 제당을 헐어 버리고 여기에다 예배당을 세우고 예배드렸으니 이때가 1908년 4월 5일이었다.

이때 황 목사의 나이가 14세였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어머니가 설득시켜 복음 가족이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이어졌다. 그 가족들은 거금도(금산면) 오천리로 이주한다. 당시 거금도는 금오도와 함께 같은 돌산군 소속이어서 바다를 통해 가까운 이웃이었다.

오천리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금오도는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어 거금도로 이주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천리도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것은 섬의 특성상 마찬가지였다.

황 목사가 벌교에서 일본에 건어물 무역을 한 것을 볼 때 당시 각종 해조류 생산이 풍부한 거금도로 이주한 이유가 아닌가 추정된다.

또 이미 조선말에 가까운 친척이 이곳 오천리로 이주하여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볼 때 당시 바다를 통하여 서로 꾸준히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 목사는 목포영흥학교를 졸업하였다. 금산면 오천리로 들어온 시기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10년 직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흥군에 가장 큰 섬인 거금도는 우학리교회와 마찬가지로 선교사의 전파가 아닌 주민들 스스로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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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수 장로

1928년 발간된 ‘조선야소교장로회’의 기록에 따르면 거금도의 개신교 개척자는 한익수(韓翊洙) 장로와 대지주였던 선영홍(宣永鴻)이었다. 선영홍은 1903년 충북 보은으로 이주하면서 신앙을 이어가지 못하였지만, 장로가 된 한익수는 1925년 순천노회 장로총대, 1926년에는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노회 고흥과 보성 시찰부장으로도 활동한 한 장로는 조사(전도사)로도 헌신하면서 고흥 과역교회, 남양 주교교회, 벌교척령교회 등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등 초기 개척교회의 정착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섬마을의 개신교 전래와 황 목사의 활약

 

1900년대 들어 당시 한반도에는 연이은 가뭄과 흉년으로 삶이 고달팠다.

1902년에는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고, 최초로 수입쌀인 안남미(베트남산) 30만석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개신교를 전파하던 시기였다. 고흥에는 이미 1894년에 미국 선교사 레이놀즈와 드류가 1차 선교답사여행을 다녀갔다.

이어 1897년에는 의사출신 선교사 유진벨과 오웬이 2차 선교답사여행을 다녀가면서 한약방을 하던 신우구(고흥군 최초의 신자)를 중심으로 첫 예배가 이뤄지는 등 개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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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Eugene Bell, 1868~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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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C.C.Owen. 1867~1909)

하지만, 계속된 가뭄으로 이어진 흉년은 대한제국의 암울한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섬마을 거금도주민들의 삶은 조정의 조공 독촉으로 더욱 비참해졌다. 이런 실정을 돌산군청에도 탄원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금산면 명천교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익수 집장과 선영홍 참봉이 금산면주민들을 대표하여 직접 경성으로 올라가 신문고를 울리고 어려움을 호소하였다고 전한다.

원래 집장은 ‘집장사령’이라 하여 죄인의 장형을 집행하던 관리였는데, 이 당시에는 면장급 관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영홍은 금산면에서 ‘선참봉’으로 불리는 지주였다.

이들의 호소로 조공은 감해줬다. 이 두사람은 경성거리를 구경하다가 길거리에서 미국선교사를 만났다. 한학에 유능하고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두사람은 선교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거금도로 돌아올 때는 한글로 번역된 성경책(쪽복음) 수백권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선영홍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07년 신흥리교회(현 신흥교회)가 설립되었다. 무엇보다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복음전파가 이뤄진 것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선영홍의 소작농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주출신이었던 오석주 목사가 세운 신평리교회(현 명천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소작농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복음전파가 쉽게 이뤄졌다. 그래도 당시 오랜 유교사상과 보수적인 사회분위기에서 서양종교인 개신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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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리교회(구 명천교회) 건물

금오도 우학리교회도 1907년에 세워졌지만, 이들 교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등록된 것은 1908년이다. 황보익 목사는 우학리교회 설립멤버였다.

명천출신 오석주 목사와 박수홍 등이 신흥리교회에 다니다가 1908년 명천에 신평리교회(현 명천교회)를 세웠다.

일찍이 신학문에도 눈을 떠 목포 영흥학교(중학교과정)를 졸업하였다. 1903년 유진벨 선교사가 주도해 설립한 영흥학교는 1909년 중학교를 추가로 설립하였다.

 

거금도로 이주한 황목사는 1913년 18살에 오석주 목사의 여동생 오명심과 결혼하면서 명천마을에 정착하였고, 신평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오천교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7년에는 그곳에서 외아들인 황성수 박사를 낳았다. 황박사가 6살 때까지 명천에서 살다가 벌교로 이주하였다.

황 목사가 거금도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기간은 1910년에서 1923년으로 13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는 1923년 벌교로 이주하여 수산물 무역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사재를 털어 조성리교회와 벌교교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심장병에 걸리자 사업을 일체 중단하고 부용산에서 40일간의 산상기도를 통해 건강을 다시 회복하면서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1924년에는 목치숙 등과 함께 순천노회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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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읍교회 전경

1927년 보성읍교회 조사(전도사)로 부임하여 1931년 순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1934년 정식으로 보성읍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부흥강사 등으로 사역하였다. 1948년에는 순천노회 노회장도 역임하였다.

특히 그의 전도활동은 막힘이 없었다. 향교와 함께 유교사상의 본거지인 보성양로원까지도 전도대상이었다. 양로원은 보성사회의 유지들이 다니는 본거지였지만, 그의 과감한 교제와 복음 전파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무너뜨렸다.

결국 이 양로원 회원들이 최소한 한번 이상은 교회에 출석을 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저항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황민화 운동’과 함께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본 경찰은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선 경찰력을 동원해 교회와 노회·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교계는 이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회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여 굴복하고 말았다.

 

1938년 이후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인물로는 주기철(평남), 이기선(평북), 한상동·이주원·주남선(경남), 손양원(전남), 이계실(함남) 등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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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8.18. 하기아동성경학교기념사진

1940년 3월 안동회합에서는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세속화되어 신사참배를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신앙 동지들을 확보해 신령한 교회 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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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5.19. 유년주일학교졸업기념사진

이에 일제는 전국에 걸쳐 ‘조선기독교 불온분자 일제검거령’를 내려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였고, 재판에 회부해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른 이가 많았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자만 2000여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용학, 주기철, 최봉석, 최상림 등 50여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특히 여수 우학리교회에 재직중이던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는 완강하였다. 순천노회에서만 이기풍 목사를 비롯하여 17명의 목사가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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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목사

집단적 신사참배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도 많았다. 황 목사는 보성, 고흥지역을 중심으로 교회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황두연 등 그의 형제들은 적극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동참하였다.

당시 황 목사가 운영하던 보성유치원과 초등4년 과정이었던 영신학교도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후 감시와 압력이 심해지자, 유학을 핑계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우익단체인 독립촉성회 보성군지부장을 지냈고, 미군정하에서 전남 동부6군을 대표한 입법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입법의원 임기를 마치자, 입각 제의도 거부하고 1949년 보성으로 돌아왔지만, 여순사건에 이어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특히 좌우익에 의한 보복과 학살 등이 자행되었지만, 보성읍교회 성도들 중에는 피해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포성이 채 멈추지도 않은 1951년 황 목사는 교회신축을 결정하여 추진하였다. 황 목사는 논 3000평을 직접 교회신축을 위해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3년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준공을 보지 못하고 소천하였다.

그 교회는 황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처남인 오석주 목사가 부임하여 1956년 말에 현재의 위치인 보성경찰서 뒤편에 완공되었다. 현재의 교회건물은 그때 건축된 석축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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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주 목사

황 목사의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고 득량면 예당리 방장산 자락에 안장되었다. 처남매제 관계였던 오석주 목사와 황보익 목사의 관계는 특별하였다.

나이는 오석주 목사가 7살 많았지만, 혈연을 떠나 함께 일제에 저항하며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복음전파에 기울인 헌신의 흔적이 순천노회(현 순천, 여수, 광양, 보성, 고흥)와 고흥, 보성 등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매제의 뒤를 이어 65세의 고령에 보성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던 오 목사도 황 목사가 못다한 교회건축 임무를 완수하고 76세의 나이로 보성에서 소천하였다.

청빙 당시 고령이라는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교인들은 오 목사의 신앙 열정과 훌륭한 인품에 반대의견은 곧 수그러들었다. 교인들은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인근 관장산 자락에 안장하였다가 교회동산을 마련하면서 다시 이장하였다.

오 목사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고, 다시 유족에 의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일제에 저항했던 황 목사의 형제들

 

외아들인 황성수 박사는 벌교남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일본 도호쿠대학, 미국 컬럼비아대학를 거쳐 미국 사법성에서 근무하다 해방이후, 미군정청 법무부 고문관을 역임했다.

서울 용산에서 2대, 3대, 4대, 보성에서 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3대에서는 최연소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전남도지사도 지냈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정계를 은퇴한 후 법조계와 학계에서 활약하다 미국에서 타계하였다.

황목사의 형제는 5형제였는데, 현재 확실하게 형제로 밝혀진 이는 황재연과 황두연이다. 황재연(黃在淵)은 오천리에 거주하였는데, 황 목사와 함께 오천교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유공자 목치숙의 고흥장터 만세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금산면 오천교회 부설 영천학원 초대교장을 지낸 황두연(黃斗淵, 1905~1984)은 전주신흥학교와 일본호세이대학(法政大學)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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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교회 전경

이어 순천으로 이주하여 순천부읍장과 순천중앙교회 장로를 지냈고, 순천기독교연합회 회장과 대한노총 순천군 연맹위원장, 독립촉성국민회 순천지부장를 거쳐 1948년 제헌 국회의원(순천갑)을 지냈다.

여순사건 때는 진압군이 수복한 후,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인민재판 배석판사로 참가했다는 누명을 쓰고 총살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황 목사의 형제로 거론되는 이는 황병수, 해방이전 보성군수와 목포시장을 역임한 황도연, 벌교읍장을 지낸 황병옥, 황양수 목사 등이 있는데, 아직까지 누가 나머지 친형제이고 사촌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황보익 목사의 형제는 3대에 이르러 27명의 목사를 배출할 정도로 한국 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

최경필 / 한국설화연구소 전문위원

 

<참고자료>

고흥군사, 독립운동사

한국장로신문(2011.11.12.일자)

<한국의 섬> 시리즈 제1권 <전남 여수> 편(목포대 이재언)

오천교회 100년사(2013년)

보성읍교회 100년사(2017년)

한국기독교의 역사 II(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기독교문사, 1990)

일제의 종교침략사(한석희 저, 김승태 역, 기독교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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