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 서정(墅丁) 김동혁(金東爀)선생

한국설화연구소
2025-01-09 12:02
평생을 농업발전에 헌신한 ‘산악농업의 선각자’
20161128_194033_1.jpg

백운산 농장 개척 시절의 김서정 선생.

과로로 객혈을 하여 입원하였으나 완치 되기도 전에 산으로 되돌아 왔다. 병색의 초췌한 모습이 역력하다.(1961년 10월)

 

<사진출처: 광양문화원 발간「서정(墅丁) 김동혁(金東爀)」>

“저는 60여년동안 농민으로 살아오면서 돈을 버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농민인 저는 비록 가난하지만 우리 농민의 손으로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린다는 긍지와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지난 1998년 9월 (재)대산농촌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대산농촌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한 김동혁(金東爀, 호는 서정(墅丁) 1918~1999) 선생이 계간지 ‘농정과 자치’ 1998년 가을호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소감이다. 당시 (재)대산농촌문화재단은 수상자 발표를 통해 “서정 김동혁 선생은 한 평생을 농업과 농촌을 위해 살아온 농민운동의 선구자며, 개척자다. 수많은 역경을 겪으며 우리나라의 농촌과 농업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상록수”라며 선정이유를 밝혔다.

20161128_194457.jpg

 

김동혁 선생은 81세가 되던 해인 1998년 9월 25일 제7회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한 평생을 농업과 농촌을 위해 살아 온 농민운동의 선구자이며 산악농업의 선각자로 우리나라 농촌과 농업의 발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해 준 것이다.

평생 농토를 가져본 적 없는 농사꾼

 

서정 김동혁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 1918년 11월 28일 전남 광양군 광양읍 목성리의 가난한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광양공립보통학교(현 광양서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유달리 책읽기를 좋아했던 선생은 특히 농촌소설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선생은 평생을 농촌 운동에 몸을 담은 까닭을 가난한 농민을 없애고 싶어서 였다고 한다.

똑똑한 농사꾼이 되고 싶었던 선생은 보통학교 졸업 후 암탉 두어마리로 양계를 시작했다. 1년 가까이 되니 40~50마리로 늘어났다. 그러나 당시에는 양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집안 어른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집안 어른들의 심한 꾸지람과 핀잔을 견디지 못한 그는 곧바로 광양광산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일본인 업주에 대항하여 몇 차례 임금쟁의에 가담했다가 결국 해고 당하고 만다. 선생의 나이 열 여덟 살 때였다. 광산에서의 경험은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가난한 농민 없애고 싶어 농민운동에 투신

 

그 해에 모범 부락 지도원 시험에 합격해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서 농촌지도원으로 활동했다. 부인회를 조직하여 양잠법을 계몽하고 집집마다 가계부를 적어주며 과수 묘목을 나눠주어 심게 하는 한편 미취학 아동들을 모아서 야학을 여는 등 바쁜 일과를 보낸다. 이 시절 선생 일생의 향로를 결정지어준 정신적 스승인 일석(一石 )백남규(白南奎)선생을 만나게 된다.

일석(一石 )백남규(白南奎)선생은 3·1운동 이전에 동경에서 2·28선언을 한 유학생회 총무였으며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으로 있다가 농민자녀들의 농민교육 도장이었던 ‘응세농도학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선생은 백남규 선생의 응세농도학원에 입학했다. 백남규 선생과 또 한명의 스승인 야마자키(山崎延吉) 선생으로부터 농촌에 대한 정열과 가능성을 내다 본 선생은 이들 스승밑에서 농촌지도자교육을 받게 된다. 야마자키(山崎延吉) 선생은 일본 천황의 스승을 지냈고 일본에서 ‘신풍의숙(神風義熟)’이라는 농촌지도자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응세농도학원을 수료한 22세 되던 해인 1939년 선생은 일본 유학길에 올라 야마자키 선생의 신풍의숙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꾸미기]20161128_193935.jpg

 

일본 농민 도장 유학시절.(앞에 의자에 앉은 사람이 야마자키(山崎延吉) 선생으로 추정된다. 이 시절 서정 선생은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산을 개발해야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야마자키의 신풍의숙 시절에 대해 선생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곳의 도제 방법은 무시무시했어요. 배우는 사람은 모두 6명인데 가르치는 사람은 12명이었어요. 그 놈들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해요. 밭고랑을 쇠스랑질 하는데 밭고랑이 끝날 때까지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해요. 일 배우면서 ‘빠가야로’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요. 이 놈들을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했지요.”(「月刊藝鄕」. 1990년 2월호)

 

신풍의숙을 수료한 이듬해 1941년 일본 북단의 훗카이도에서 시작해 남단 가고시마까지 걸어서 일본의 독농가를 찾아다니며 영농 비법을 배웠다. 당시 선생은 산지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일본 농업현장 돌며 산지 개발 필요성 절감

 

1942년 3월 조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경기도 농업시험장에서 실습생으로 근무하다 일본인과의 불화로 그해 12월 해직되고 만다.

26세가 되던 1943년 스승 백남규 선생의 도움으로 경기도 시흥군에서 개척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시흥군 남면 수리산 밑에서 농지를 개간하고 채소의 온상재배를 시도했다. 해가지면 야학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곳에서 가정을 꾸렸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경기도 중앙농업시험장에서 잠시 관리로 근무하다 1947년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와 ‘희창농장’을 세우고 광양군청산하 원예조합을 인수해 현 광양원예농협의 전신인 광양군 농예 생산가공조합을 창설했다. 1950년 한미합작 유휴지 개척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사업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이 나자 34살의 나이로 군에 입대한 선생은 제대 후 부산에서 피난하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전남 여천군 돌산면 금봉리 금천 마을에 도서농업연구소를 차리고 월동 채소 농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월동 채소 재배에 성공한 1959년 전남 일대에 농촌 계몽운동이 일어나 여천군 돌산면, 삼일면과 광양군 광양읍, 봉강면, 옥룡면 등지에서 농촌 계몽 강연과 4-H 조직활동에 나섰다. 전남 농촌부흥회 동지회 회장을 맡게 된 선생은 전국을 돌며 농민운동을 펼쳤다. 1961년 광주에서 ‘주간 새농민 신문을 창간해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얼마안가 5·16 군사 쿠테타로 폐간되고 말았다.

선생의 삶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수차례 시도했던 협업농장이 그러했고 4-H운동, 농사개량운동, 생활개선운동 등 농민계몽운동 또한 그러했다.

[꾸미기]20161128_193956.jpg

 

서정 김동혁 선생은 18세에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 농촌진흥운동 모범마을 지도원을 시작으로 4-H 모범마을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평생을 농촌계몽운동에 몸 바쳤다.지난 1998년 전국 4-H운동 50년사 출판기념회 모습. 당시 한국 4-H연맹 총재 이재오, 농림부장관 김성훈, 농촌진흥청장 김강권, 국회의원 및 4-H 운동 공로자들과 함께했다.

4-H운동 등 농촌계몽 위해 끝없이 도전

 

1961년 8월 산악 개척 농업에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백운산에 올라 ‘백운산 협업 개척 농장(이하 백운산농장)’을 세운다. 당시 도내에서 농민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던 황한용, 한창수, 허재현 등 7명의 농사전문가가 의욕적으로 참여했다.

백운산 농장 시절.jpg

 

1963년 11월 8일 백운산 농장 개척자와 가족들. 이들의 의복은 1년에 단 한 벌 지급되었다. 식생활은 5월~10월의 반 년은‘감자 보리밥’, 11월~4월의 반 년은‘고구마 보리밥’에 김치, 된장국으로 해결하였으며 주거는 가족 입주자들은 1세대 1실을 배정했고 독신자들은 1실에 2~3명씩 배정 했다. 고된 생활이었으나 10년후에는 전국 모범 문화 산촌을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들은 ‘한국산악농업연구소’를 만드는 등 기초를 다져갔다. 백운산농장은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정신적으로 협동정신과 개척정신을 승화시키고 경제적으로는 버려진 산과 고급 두뇌자원, 풍부한 농촌의 잉여 노동력 등 3대 유휴자원을 활용하여 잘사는 농촌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기술과 노동력 모아 일구려 했던 꿈의 백운산농장

 

“나는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별로 보람된 일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기술이 있는 한 사람과 노동력을 가진 열 사람쯤이 함께 합쳐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그 생각의 시초였다.” (198년 광양군지에 기고한 서정 선생의 「백운산농장 개척기」 中에서)

 

선생은 4-H 농촌 청소년운동과 농사개량, 생활개선 그리고 농협운동 등 소위 농촌 계몽운동을 하며 돌아다닐 때 여기 저기에서 그 지역의 자연조건에 맞을 법한 새로운 농사 지식을 전했다. 몇 해 후 그 지방에 다시 가 보면 나름대로 그 사업이 성공해 기틀이 잡힌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타고난 성품탓인지 여기 저기에서 불러도 즐겁고 흥미로운 마음으로 선선히 응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구차하게 꾸려 나가는 낙후된 농촌을 보면 부아가 치밀정도로 안타까워서였다.

20161128_194013.jpg

 

1963년 백운산 농장 전경. 광양군 옥룡면 동곡리 산 55번지 일대 면적 232㏊(완전 확보 187㏊, 국유림 45㏊) 규모였다. 최초 입산 일은 1961년 8월 2일로 함께 산을 오른 개척자는 김서정, 황한용, 한창수, 고광선,(일명 고광일), 김종태, 조현취, 허재현 등 7명이다. 1963년 3월부터‘농림부 시범 백운산 협업 개척 농장’이 되었다. 1970년 초까지 약 10년 동안 운영되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자신을 돌아다보니 이렇게 일에 미쳐 돌아다니다가 어느날 자기는 뿌리도 없는 뜨내기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고민한 것이 백운산농장과 같은 협업농장이었다. 자신도 살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사는 방법을 찾다가 농민들이 가진 우직한 성격과 근면한 노동력에 자신과 같은 사람의 지식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백운산 농장에서는 처음 단계에서는 농산 소득으로 50가구를 수용할 계획이었고 그 농산물을 가공하는 소득으로 50가구를 더 수용할 계획이었다. 100가구의 마을이면 우리나라 자연마을로 치더라도 상당한 규모다. ‘닭이 천 마리면 봉이 한 마리’라는 속담도 있듯이 이 가운데는 유치원 보모감도 있을 수 있고, 국민학교, 중학교 교원자격자도 있을 수 있다. 유치원도 만들고, 분교장도 만들고, 수가 늘어나고 해가 묵어가면 6학년 까지 반을 늘리 수도 있고, 그러나 아무리 늘어나도 콩나물 교실은 안될 것이니 학습지도는 잘 될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간호원이라고 없으란 법이 있겠으며, 약사나 의사라고 있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이곳은 자연마을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드는 마을이니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라고 없으란 법이 없었다. 유치원도 만들고, 국민학교도, 중학교도 만들고, 이발소나 미장원도 만들고, 구매점도, 진료소도 만들고, 갖가지 가공공장도 만들고, 필요한 것이 없는 것 없이 다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잘만 되었더라면 지금쯤 3층 연립주택이 이 산속에 즐비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일반 사회에서처럼 불필요하거나 낭비적인 시설, 악의 소굴이 될 수 있는 그런 시설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중략) (198년 광양군지에 기고한 서정 선생의「백운산농장 개척기」中에서)

개척자들의 숙소가 있던 터.jpg

 

백운산 농장 개척 당시 개척자들의 숙소가 있던 자리.

방풍림 조성지.jpg

백운산 농장 방풍림 조성지 전경(1971년), 1962년 경 등고선과 능선

따라 정연하게 식재 되었던 소나무 3만여 그루(약 20㏊)가 9년이 지

난 동안 무럭무럭 자라 숲을 이뤘다.

양봉하는 모습.jpg

백운산 농장 개척 기간인 1963년 1월 꿀벌(양봉) 기르는 모습.

후박나무숲.jpg

백운산 농장 개척기간 중에 조림한 후박나무 숲.

선생은 50가구 정도가 한 농장에서 생활한다면 또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농장을 이룬 마을은 가구 수가 아닌 작목별로 나누어 작목별 책임자가 반장이 되고, 전체 농장 책임자가 이장인 되는 것이다.

마을에서 한두 농가쯤의 환자가 생겼다고 해도 협동경영 속에서는 그 정도의 결원은 무난히 커버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과수원으로 80㏊를 일구어 밤나무 40㏊, 사과와 포도 각 10㏊, 그리고 복숭아와 감을 5㏊씩, 배와 대추, 호도가 각각 3㏊ 씩, 앵두와 자두를 0.15㏊ 또 1백㏊의 방목장을 만들어 한우 1백마리, 젖소 5마리, 산양, 면양, 유양 각각 50마리씩을 사육할 예정이었다. 이와 함께 한봉 1백 통, 양잠 1백 장의 종합축산을 기획했는데 갈아 부쳐 먹을 수 없는 73㏊의 황무지에는 뽕나무, 대나무, 리키다소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낙엽송, 잣나무, 아카시아, 산수유, 유동, 스기, 전나무를 각각 5㏊씩 식재하고 옻나무, 작약 각 3㏊씩, 나머지 4㏊에는 표고 1만 그루를 심기로 했다.

20161128_194027.jpg

 

1963년 백운산농장 젖소 사육장. 이 당시 가축으로는 젖소 11마리, 양과 면양이 46마리, 돼지 8마리, 염소 50여 마리 등 모두 120여 마리가 되는 대식구로 늘어났다.

이를 위해 2백만 원의 자금으로 제1차 5개년을 투자기로, 제2차 5개년은 확대 생산기로, 제3차 5개년을 자립기로 구분했다.

그들은 새벽 4시면 일어났다. 여명이 밝기 전에 그 날 할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작업을 마친 밤이면 다들 모여 앉아 매일 계획의 실행에 대한 평가를 하고, 다음 계획들을 의논했다. 가족 입주자에게는 1세대 1실을 배정했고 독신자들은 2~3명씩 한 방을 사용했다. 의복은 어른과 아이 구별없이 1년에 작업복 1벌이 지급되었으며 최대한 자급자족키로 했다.

20161128_194048.jpg

 

1963년 11월 경 백운산농장 식구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서정 선생.

그리고 농장 안에 농민학교와 보육소를 설치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학교, 중학교, 직업교육과정도 유치할 계획을 세웠다. 백운산 농장의 생활상이 알려지자 ‘산지영농의선구자’, ‘산의기적을이룩한사람들’ 등으로 전국적인 매스컴을 타게 되었다.

정부에서도 농업구조개선 심의위원회가 설치되어 백운산 농장을 비롯하여 전국에 5개소의 시범개척농장을 만들었다. 백운산 농장은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당초 계획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갔다. 전성기였던 1962~ 1964년에는 대학교수, 정부관계자, 대학생, 농민 등 하루에도 수십명이 농장을 견학했었다.

 

“벼도 못자리 때부터 이삭이 패기까지가 가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 시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보살피고 거름도 자주 주어야지요. 그런데 다 자란 벼에 비료를 몽땅 퍼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스컴에서 떠들고 정부의 정책사업으로 추진되다 보니 여러가지 예기치 못한 문제점들이 생겼지요. 유명세에 따라 엉뚱하게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사람도 생기고, 농정도 장관이 바뀔 때마다 변경되어 대대적으로 벌여왔던 사업의 지원금이 하루 아침에 끊기지 않나…. 결국 이런 이유들이 겹쳐 이상촌에의 꿈은 한낱 물거품이 됐지요.”(「月刊藝鄕」. 1990년 2월호)

 

 

발전을 거듭하던 백운산농장에 불안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문객들 맞이에 농장을 돌볼 겨를이 없어지더니 자급자족을 하고도 남아돌던 감자, 고구마도 손님들에게 차마 숙식비를 부담시킬 수 없어 무료로 접대하다 보니 식량이 동이 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964년도 봄부터 정부 보조가 끊어지자 가축들의 사료도 마련하기 어려워졌다. 그동안 정부의 각종 지원으로 입주자는 24가구로 늘어났고, 한우만 70마리가 넘었다. 이미 불어날 정도로 불어난 백운산 농장에 전혀 예기치 못한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지도일지.jpg

백운산 농장에서 쓴 지도일지(1965년). 63년 3월부터 농림부 시범 농장이 되면서 정부지원을 받게 되자 전남도 소속 행정지도원(박동윤)이 파견되었다.

[꾸미기]20161128_194056.jpg
[꾸미기]220161128_194056.jpg

군사정부 시절 김종필 국무총리, 장경순 농림부 장관, 송호림 전남도지사 등 정부고위 관료들이 백운산을 방문하고 정부 시책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자 1962년 5월부터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면서 많을 때는 최고 120여 명이 백운산 농장에 운집하기도 했다.

감당하기엔 너무 비대해진 규모는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다 지쳐 결국 사채를 쓰게 되고 단기사업 위주로 운영하게 되면서 저평가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967년 농림부는 백운산 농장에서 손을 뗐다. 농장은 길 잃은 미아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3년 간 자력 재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 쳤다. 그러나 결국 1970년 초 눈물을 머금고 백운산농장을 떠나야 했다.

고된 개간사업을 하는 동안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병원을 뛰쳐나와 꾸역꾸역 올라갔던 백운산. 생명처럼 지켜왔던 국내 최초의 협업농장이자 이상적 자치마을을 꿈꿨던 백운산농장. 232ha의 산비탈에 15년이란 시간을 투자해 황금의 농장을 만들 수 있다는 원대한 포부는 개척의 삽질을 시작한지 10년만에 뼈아픈 교훈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농장은 정부의 지원금 등 엄청난 빚으로 농협의 공매 처분돼 어느 기업의 사원휴양소로 변해버렸다.

 

뼈아픈 교훈 남긴 백운산 농장

 

“나는 정부의 보조정책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대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보조정책이 망국적(亡國的)이라고까지 극한적으로 부르짖고 자금은 철저히 각자 마련토록 했지요.”(「月刊藝鄕」. 1990년 2월호)

 

‘평생농군’인 선생에게 정관계 진출의 유혹도 있었다. 금배지에의 유혹도 있었고 신설될 산림청장 자리를 맡아줄 것을 권유받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오히려 정부의 기구확대 방안에 반대하며 당시 농림부장관의 설득을 깨끗이 거절했다고 한다.

선생은 우직하리만치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농촌운동사에 ‘좌절된 신화’로 끝나고 만 ‘백운산 농장’의 실패 또한 쓰리고 아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그 실패를 완전한 실패로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9년 광양 곡수((穀樹)협회를 만든 선생은 초대회장을 맡아 광양일대에 대대적인 밤나무 식재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주민의 호응을 얻어 광양은 당시 전국에서 밤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부상했다. 전국의 밤 시세를 좌우할 정도였다. 1973년 ‘시운암 산악 농업연구소’를 세우고 밤나무 연구에 매진하던 선생은 광양군 옥룡면 추산리 일원에 밤나무 밭 40여 ha를 조성해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밤나무 유대접목’을 실시했다.

밤나무 식재.jpg

1969년에 밤나무를 유대접목법으로 묘목을 생산하여 1972년에 결실된 밤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서정 김동혁 선생님.

이 유대접목은 국내 임학계의 가장 큰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모든 접목법은 가지에다 가지를 붙이는 것으로서 대개 1년이 지난후에야 가능했으나 유대접목법은 1년 이내의 뿌리와 줄기를 접목시키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2~3년이면 수확을 할 수 있고 동해(凍害)에 강한 데다 생산비도 절반이나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접목법이 개발된 지 5~6년이 지나도 학계에서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유대접목한 밤나무 묘목에 밤나무 암이 발생했다고 허위 발표까지 했다. 선생은 결국 시비를 가려줄 것을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서울농대를 중심으로 한 임업시험장파와 농민 김서정의 정면 충돌은 선생의 판정승으로 끝이 났다.

밤나무 식재관련 책.jpg

「밤나무 유대접목법 시비에 관한 논고」

“유대접목 묘목을 관납품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와 가격문제는 연관이 있었어요. 만일에 인정한다면 생산비가 저렴하니까 묘목 단가를 떨어뜨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지요.”(「月刊藝鄕」. 1990년 2월호)

 

선생은 당국이 유대접목법 보급을 외면한 배경에는 이같은 추악한 이권 문제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국과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밤나무가 1941년 혹벌이 생겨 10년 이내에 일본 전국을 휩쓸어 밤나무 농사를 망치게 했던 사실을 들어 우리나라도 여기에 대비, 혹벌이 오지 않는 묘목의 수입을 서둘 것을 농림부에 건의 했으나 담당 산림국은 사사건건 비협조적이었다. 결국 혹벌이 강원도 원주에서 발생해 불과 2~3년 사이에 경기도를 휩쓸 정도로 번지자 부랴부랴 유실수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일본서 전정한 밤나무 가지를 수입해 오는 난리를 떨었다 한다. 이때 쓴 논문이 「밤나무 유대접목법 시비에 관한 논고」이다.

선생의 밤나무 투쟁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광양을 밤 주산지로 만든 ‘유대접목’

 

선생의 산악농업에 대한 열의는 ‘오봉산농장(1974년)’, 승주군 낙안면의 ‘제석산농장(1976년), 해남군 화산면의 ’삼일농장(1979년)‘ 개척으로 이어졌다. 이즈음 전북 무주구천동에서 시도했던 고랭지 채소 재배에 실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는‘협업농업’의 꿈을 다시 이루어 볼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그 해가 고냉지 채소가 날벼락을 맞은 해가 아니었습니까? 그 때문에 내꿈은 완전히 무산되었어요.”(「月刊藝鄕」. 1990년 2월호)

 

1982년 이후 선생은 전남 일대의 농장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광주 무등산의 광일농장에서 고문으로 계실 때인 1987년 선생의 주요 역작으로 꼽히는 「소파동 백서」를 펴낸다.

정부에서 융자까지 해주며 소를 기르도록 권장하던 때가 있었다. 농민들은 정부를 믿고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리하게 수입한 소 때문에 소값이 폭락하는 소값 파동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농촌은 부채에 찌들어 갔다. 이런 현실을 목도한 선생이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고발한 책이 「소파동 백서」다.

20161128_194732.jpg

선생은 1991년 4월 주간 한국농어민신문과의 대담에서 농민이 매년 겪는 불황이나 고통의 일부는 농민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소 파동은 그 책임의 99%가 정부 당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농민들도 따라만 가서는 안 되겠고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비판도 하고 정책 제시도 해야 할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집필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통계 자료의 수집과 분석, 그리고 현장 농민들의 신빙성 있는 증언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선생은「소파동 백서」를 토대로 농민들의 구체적인 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선생은 그것 또한 자신의 무력 탓으로 돌리며 아쉬워했다.

 

「소파동 백서」 통해 얻은 교훈

 

“지금까지의 농업정책이 다 실패해 온 까닭은 모든 정책이 관료·학자·정치인들의 탁상공론으로만 만들어졌을 뿐 농민의 의사가 담겨 있지 않아서 입니다. 그래서 어용조직이 아닌 살아 있는「농민의 조직」이 꼭 필요합니다.”(동아일보 1987년 4월 1일자)

농장의 서정 선생.jpg

 

선생은 전라남도 일대 농장에서 후배 지도에 정성을 쏟았다. 사진은 1984년 무등산 광일농장 고문으로 있으면서 젖소의 사육 실태를 관찰하고 있다.

73세가 되던 해인 1990년 고향인 광양을 떠나 곡성군 삼기면 대명마을로 거처를 옮겨 다시 농사에 매진했다. 광록생명농업회 회장으로 친환경 농업을 연구하다 ‘한국오리농법연구회’를 만들고 회장을 맡으셨다. 1999년 10월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남 농업 발전 협의회 환경 농업 분과 위원, 화순군 북면 원리와 옥과면 주산리의 ‘중소농 고품질 농산물 생산 단지’ 조성, 전남 전문 농업 경영인 연합회 회장, 21세기 광주·전남 농업 발전을 위한 모임 고문, 한국 사회 발전 시민 실천 협의회 지도 위원 등 다양한 자리에서 지역사회와 전남 농업의 발전에 헌신하셨다.

집필중 인 선생.jpg

서정 김동혁 선생은 낮에는 산악농업개척과 농민계몽운동, 밤에는 집필을 통해 농민의 살소리와 된소리로 농민의 고충과 그 대책을 세상에 알리고자 애쓰셨다.

1962년 식산포장을 수장하고, 1963년 금탑산업훈장 제10호(농업부문제1호), 1998년 제7회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하셨다.

선생이 남긴 저서로는 ‘밤나무유대접목幼대接木) 시비是非)에관한논고論考)(1973)’, 소파동波動) 백서(白書)(1987), 「수입농산물농약오염」편역編譯)(1994) 등이 있다. 정원휘

 

<이 기사는 광양에 거주하고 있는 서정 선생의 외조카인 강승기(66) 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광양문화원에서 펴낸 「서정(墅丁) 김동혁(金東爀)」을 참고했습니다. >

선생의 묘.jpg

전남 곡성군 삼기면 농소리 3구. 대명 마을 뒷산인 대명산 산자락에 위치한서정 김동혁 선생의 묘.

 

 

‘서정(墅丁)’이란 호(號)의 유래(由來)

 

김동혁 선생의 호는 서정(墅丁)이다. 선생이 1947년 경기도 임업시험장을 그만두고 귀농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스승인 백남규 선생이 시조 한 수를 지어주었다.

 

그대를 보내노니 운농(雲農)이라 부르노라

자백홍진(紫佰紅塵) 저자 속에 고달프던 나그네야

백운과 아늑한 농촌 그대 그려 하노라

 

스승이 지어준 ‘운농(雲農)’이란 호는 당시 서른 살 밖에 되지 않은 선생의 입장에서 너무 원숙한 느낌이라 쓰지 않다가 언젠가 수필을 기고하며 일종의 익명처럼 단 한 번 써 먹었다고 한다. 다시 만난 스승이 ‘평소에 쓰지 않는 것을 보니 별로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구나’하며 새로운 호를 지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서정(墅丁)이다.

백남규 선생.jpg

일석 백남규 선생(1884~1970).

전북 고창 출신의 교육자로 각급 학교의 교감과 교장을 지냈다.

1934년 전남 광산 재단법인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院) 원장 시절 서정 선생을 만나 그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 주었다.

37년간 정성을 모아 사학을 육성하고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서(墅)자는 아주 드물게 쓰이는 자로 뜻은 농막(農幕)이며, 논이나 밭, 즉 들의 농장에 지어진 작은 집을 뜻한다. 정(丁)자는 이 놈 저 놈하는 놈 정, 병정(兵丁), 장정(壯丁)할 때 쓰인다. 즉 벼슬이 없는 장정이란 뜻이 된다.

이 두 글자를 합하면 ‘들집 또는 농막에 사는 사나이’다. 좀 더 주석을 달면 ‘농막에 사는 벼슬 없는 사나이’가 된다. 선생은“이것은 진짜 나의 생활, 나의 뜻에 가장 적합한 호”라며 그 후부터 즐겨썼다. 그러다보니 본명보다 호가 더 유명해져 ‘서정’이라고 해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스스로도 ‘김서정’이라고 불러야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 글

카테고리

인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