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준의 수담수담 당산제가 그리운 승주읍 도정리 군장마을 600년 수령 ‘느티나무’

차범준
2024-12-27 10:47
순천시 보호수가 들려주는 나무와 사람 이야기

순천시 보호수가 들려주는 나무와 사람 이야기

34-수담수담.JPG

순천사람들! 잘들지내고 계시는가.

나는 순천시 승주읍 도정리 군장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온지가 6백년이 된 느티나무라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당산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할아범’ 나무라고도 하는데 사실 느티나무는 암수가 없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인간들처럼 젠더 감수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생명체라고도 볼 수 있지.

흔히 인간들은 백수(白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면 제 명을 다 살았다고들 하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향하며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우리네 나무들은 천년을 살아야 천수(天壽)를 다했다는 말을 듣게 되니...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이제 막 생의 절반을 넘긴 그래도 아직은 젊은 나무라네.

마침 ‘당산목’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나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정월대보름날 저녁이면 당산제라는 명목으로 거하게 생일상을 받는 귀한 몸이었다네. 내 자랑 같지만 그때 나는 마을 뒷산에 사는 호랑이와 마을을 침범하려는 역병을 막아줬고, 사람들은 나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당산제라는 명목으로 생일상과 함께 신명나는 매굿으로 나를 즐겁게 하고는 했지. 산중 마을이라 당산제가 열리는 정월 칼바람이 매서웠지만 나는 동네 사람들이 내 발아래 부어준 막걸리와 매굿 장단에 취해 나뭇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었고 그날은 뒷산 소나무와 앞산 어린 밤나무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네.

그때만 해도 매일 아침이면 마을 안골 김 서방네 한 살배기 손자의 울음소리가 나의 곤한 아침잠을 깨웠고, 동이 트고 나면 내 발아래 작은 오솔길로 학교에 등교하는 동네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와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매일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네. 여름 백중날이면 동네 사람들 모두 나무아래에 모여 들돌들기 놀이를 했었는데 안골 박 서방이 한 아름이나 되는 들돌을 불끈 들어 어깨 뒤로 매칠 때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묵은 나무껍질을 몸에서 떨어내고는 했다네. 

요즘 사람들 옛날이야기 싫어하는 줄은 알지만 말 나온 김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 조금만 더 하려네.

내 나이 5백 살 무렵, 내가 마을 입구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이래 사람들의 삶이 제일 팍팍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동네 최 씨가 마을에 흘러든 일본 목재상 꼬임에 빠져 나를 베어 팔려고 한 적이 있었지. 어느 날인가 동네 최 씨가 목재상 일본인과 함께 마을을 찾았는데 그들은 도래송곳으로 내 몸에 구멍을 내고 내 몸속이 비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가격을 흥정하고는 다음날 벌목꾼을 불러 나를 베어내기로 약속하고 마을을 내려갔지.

나는 그날 밤 다음날 해가 뜨면 꼼짝없이 벌목꾼에게 베어질 운명을 직감하고 나의 지난 5백 년의 시간을 갈무리하는 내 삶에 가장 긴 밤을 보내야 했다네. 그런데 다음날 해가 떠도 최 씨와 벌목꾼은 나타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내 발밑을 찾아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전날 밤 객지에 나가있는 최 씨의 아들 둘이 변고를 당했고 최 씨가 나를 베어내는 것을 포기했다는 소리를 내게 전했지.

그 일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매년 당산제날이면 제를 주관하는 마을 김 노인 꿈에 현몽을 통해 이렇게 말했네.

 

“사람들아. 어찌 내가 뿌리를 내린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겠나. 세상 이치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니 마땅히 나도 그 순리를 따를 뿐이라네.”

 

어쨌든 나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신의 피조물뿐일지니 오묘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어찌 다 알겠으며 내 앞날을 미리 알겠는가마는, 나도 태풍이 불어 내 가지가 바람에 찢기는 고통과 뜨거운 번개를 두려움으로 몸에 받은 적도 있는 만큼 그저 자연의 섭리를 따를 뿐이라네. 옛날 케케묵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6백 살 묵은 나무가 이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고 더 큰 소망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그 옛날처럼 마을에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내 그늘 아래서 예전 그 시설처럼 마을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다기 들려오는 그 날이 사무치게 그리울 뿐이네. 얼마 전 순천시장이라는 사람하고 트롯인가 뭔가 노래를 한다는 사람이 내 발아래 찾아와서는 우리 동네가 좋다며 마을에 활력을 찾기위해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는데, 내가 너무 좋아서 오랜만에 나뭇잎을 흔들며 어깨춤을 추었다네

©설화와 인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 글

카테고리

인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