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준의 수담수담 당산제가 그리운 승주읍 도정리 군장마을 600년 수령 ‘느티나무’
순천시 보호수가 들려주는 나무와 사람 이야기
순천사람들! 잘들지내고 계시는가.
나는 순천시 승주읍 도정리 군장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온지가 6백년이 된 느티나무라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당산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할아범’ 나무라고도 하는데 사실 느티나무는 암수가 없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인간들처럼 젠더 감수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생명체라고도 볼 수 있지.
흔히 인간들은 백수(白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면 제 명을 다 살았다고들 하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향하며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우리네 나무들은 천년을 살아야 천수(天壽)를 다했다는 말을 듣게 되니...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이제 막 생의 절반을 넘긴 그래도 아직은 젊은 나무라네.
마침 ‘당산목’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나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정월대보름날 저녁이면 당산제라는 명목으로 거하게 생일상을 받는 귀한 몸이었다네. 내 자랑 같지만 그때 나는 마을 뒷산에 사는 호랑이와 마을을 침범하려는 역병을 막아줬고, 사람들은 나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당산제라는 명목으로 생일상과 함께 신명나는 매굿으로 나를 즐겁게 하고는 했지. 산중 마을이라 당산제가 열리는 정월 칼바람이 매서웠지만 나는 동네 사람들이 내 발아래 부어준 막걸리와 매굿 장단에 취해 나뭇가지를 흔들며 춤을 추었고 그날은 뒷산 소나무와 앞산 어린 밤나무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네.
그때만 해도 매일 아침이면 마을 안골 김 서방네 한 살배기 손자의 울음소리가 나의 곤한 아침잠을 깨웠고, 동이 트고 나면 내 발아래 작은 오솔길로 학교에 등교하는 동네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와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매일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네. 여름 백중날이면 동네 사람들 모두 나무아래에 모여 들돌들기 놀이를 했었는데 안골 박 서방이 한 아름이나 되는 들돌을 불끈 들어 어깨 뒤로 매칠 때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묵은 나무껍질을 몸에서 떨어내고는 했다네.
요즘 사람들 옛날이야기 싫어하는 줄은 알지만 말 나온 김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 조금만 더 하려네.
내 나이 5백 살 무렵, 내가 마을 입구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이래 사람들의 삶이 제일 팍팍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동네 최 씨가 마을에 흘러든 일본 목재상 꼬임에 빠져 나를 베어 팔려고 한 적이 있었지. 어느 날인가 동네 최 씨가 목재상 일본인과 함께 마을을 찾았는데 그들은 도래송곳으로 내 몸에 구멍을 내고 내 몸속이 비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가격을 흥정하고는 다음날 벌목꾼을 불러 나를 베어내기로 약속하고 마을을 내려갔지.
나는 그날 밤 다음날 해가 뜨면 꼼짝없이 벌목꾼에게 베어질 운명을 직감하고 나의 지난 5백 년의 시간을 갈무리하는 내 삶에 가장 긴 밤을 보내야 했다네. 그런데 다음날 해가 떠도 최 씨와 벌목꾼은 나타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내 발밑을 찾아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전날 밤 객지에 나가있는 최 씨의 아들 둘이 변고를 당했고 최 씨가 나를 베어내는 것을 포기했다는 소리를 내게 전했지.
그 일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매년 당산제날이면 제를 주관하는 마을 김 노인 꿈에 현몽을 통해 이렇게 말했네.
“사람들아. 어찌 내가 뿌리를 내린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겠나. 세상 이치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니 마땅히 나도 그 순리를 따를 뿐이라네.”
어쨌든 나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신의 피조물뿐일지니 오묘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어찌 다 알겠으며 내 앞날을 미리 알겠는가마는, 나도 태풍이 불어 내 가지가 바람에 찢기는 고통과 뜨거운 번개를 두려움으로 몸에 받은 적도 있는 만큼 그저 자연의 섭리를 따를 뿐이라네. 옛날 케케묵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6백 살 묵은 나무가 이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고 더 큰 소망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그 옛날처럼 마을에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내 그늘 아래서 예전 그 시설처럼 마을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다기 들려오는 그 날이 사무치게 그리울 뿐이네. 얼마 전 순천시장이라는 사람하고 트롯인가 뭔가 노래를 한다는 사람이 내 발아래 찾아와서는 우리 동네가 좋다며 마을에 활력을 찾기위해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는데, 내가 너무 좋아서 오랜만에 나뭇잎을 흔들며 어깨춤을 추었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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