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와 수석 기독교 성지를 찾아서

허석 한국설화연구소소장
2024-12-25 19:06
기독교와 수석

순천은 한국 불교의 양대 산맥인 조계종과 태고종의 본산이 있는 불교 도시이다. 또한 ‘남한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도시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도 순천은 이색적인 도시이다. 민주당 계열의 아성인 곳에서 민주노동당,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연거푸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순천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국적인 관심이 쏠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름이 순천(順天)인 이유도 하늘을 거스르는(逆天) 것을 예방하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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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가로46㎝×높이40㎝×폭12㎝, 영월)

 

순천에 기독교 선교의 깃발이 꽂힌 때는 언제일까?

1893년 선교 지역 분할 협정을 통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미국 남장로교에서 1893년 2월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1867~1951 이눌서) 선교사를 파견한다. 그가 군산을 거쳐 전주를 답사한 것이 최초의 호남지역 방문이었다.

이듬해 전주에 최초의 선교기지가 세워진데 이어 1898년 목포, 1904년 광주에 이어 1912년 순천에 선교기지가 설치되었다.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배유지) 선교사의 조사 김윤수(金允洙 1860∼1919), 순천의 김억평 신도가 순천 매산등(매산 언덕) 일대의 부지를 매입해 선교기지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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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사용되었던 최초의 순천읍교회

사실 순천을 처음 찾은 선교사는 1894년 호남 일대를 순회하던 레이놀즈 일행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인 선교 행위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최초의 선교 활동은 1897년이다. 테이트(L. B. Tate ?~1929 최의덕) 선교사가 순천 장터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준 것이 기록으로 나타난 최초의 선교 활동이다. 광주에 있던 오웬(C.C. Owen 1867~1909 오기원) 선교사도 순천을 오고가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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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대교회

(가로24㎝×높이20㎝×폭8㎝, 중국)

그래서인지 순천에 선교기지가 세워지기 5년 전, 순천 교인들은 스스로 교회를 세웠다. 순천 최초의 교회인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가 1907년 4월 15일 금곡동에 세워진 것이다. 1909년 유진 벨 선교사와 프레스톤(J.F.Preston 1875~1975 변요한) 선교사가 순천에서 50여 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미션스쿨 매산학원의 설립

선교기지가 세워진 이듬해(1913년)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매산 선교기지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프레스톤 선교사에 이어 코잇(R.T. Coit ?~1932 고라복) 선교사 가족, 여선교사 비거(Meta Louse Bigger, 백미다)와 두피(Lavalette Duppy, 두애란) 선교사가 속속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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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코잇 선교사 일행의 모습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였다. 선교사들이 일시에 선교기지로 들어오면서 사택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집에서 여러 가구가 비좁게 생활을 하다 보니 열악한 환경 때문에 코잇 선교사의 어린 두 자녀가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꿋꿋하게 복음 전파와 교육, 의료사역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순천 시가지와 농촌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학교 설립과 의료 선교사역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10년 4월 프레스톤 선교사와 코잇 선교사가 순천시 금곡동 사숙에서 매산학교(중학교, 남자고등학교)를 개교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매산여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코잇 선교사의 두 자녀가 희생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의료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래서 전주병원에 근무하던 티몬스(Henry Loyola Timmons 1878~? 김로라)는 1913년 순천진료소를 열어 의료 사역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비좁은 시설 때문에 밀려드는 환자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15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여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했다.

 

인요한 가문의 순천 사랑

가장 뒤늦게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결핵진료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독교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1954년 남편 휴 린튼(Hugh M. Linton 1926~1984 인휴) 목사와 함께 한국에 온 로이스 린튼(Lois F Linton 1927~ 인애자) 사모는 광주의 결핵환자들을 위해 자택을 환자 수용소로 제공한 데 이어 1960년 순천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녀가 바로 인요한(John Linton 1959~ ) 박사의 어머니다. 그녀가 결핵진료소를 개설한 것은 세 아들을 결핵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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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선교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었던 기독진료소

인요한 박사의 외증조부인 유진 벨 박사는 대한민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호남지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녀의 딸 샤롯 벨(Charlotte Bell 1899~1974)이 당시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1891~1960 인돈)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가 바로 인요한 박사의 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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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선교사의 선교 사역 당시 사진

인요한 박사의 아버지 휴 린튼 목사는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라 불렸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1960년 순천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는 등 결핵퇴치 활동을 전개하였던 그는 1984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후송 도중 안타깝게 숨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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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박사의 어린 시절.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인요한 박사

그래서 인요한 박사는 그때의 충격으로 미국 텍사스로 건너가 엠블런스를 연구 개발하여 한국에 보급하였다. 구급차만 있었다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있는 인요한 박사는 지난 2012년 특별 귀화하여 진정한 순천 사람, 진정한 한국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순천시 기독교 역사박물관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남한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에 걸맞게 순천의 기독교인 비율은 35%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또한 선교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순천시에서는 지난 2012년 11월 선교기지가 있던 매산등에 ‘순천시 기독교 역사박물관(이하 기독박물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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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기독교 역사박물관 전경

 

1447㎡의 부지에 연면적 866㎡ 규모의 기독박물관은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3층에는 선교 초기의 교회를 복원한 미니 채플실을 만들어 방문객들을 위한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관람객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2,000여 권의 책을 비치한 휴게실과 수장고 등도 갖췄다.

지하 1층에 있는 1전시실은 순천지역에 기독교가 전래되는 과정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준다. 낡은 성경을 비롯해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풍금, 각종 신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 있는 제 2전시실은 순천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활동상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보여준다. 박물관에는 근대 기독교 관련 유물과 당시의 일상용품 등 650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1921년식 포드자동차 1대가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이 차량은 선교사 후손들이 기증한 것으로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이용하던 차량과 동종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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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츠 기념 남학교로 지은 매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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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여고 교정에 있는 프레스톤 선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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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선교사들이 타고 다녔던 것과 같은 모델의 포드자동차

순천중앙교회 뒤에는 최근까지 선교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순천기독진료소(조지 왓츠 기념관)가 있다. 매산중학교 교정에 있는 매산관은 ‘왓츠 기념 남학교’로 지은 건물로 1930년에 석조로 신축되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매산여고가 나오는데, 2층으로 된 ‘프레스톤 선교관’이 있다.

 

지리산 왕시루봉 유적지

순천의 기독교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이다. 왕시루봉 선교유적지는 성경과 찬송가를 한글로 번역(구약 38권)해 기독교가 한글보급운동과 문맹퇴치 운동에 기여하는 데 중요한 시발점이 된 곳이다.

지리산 선교유적지는 1922년 노고단에서 형성된 유적과 1961년부터 왕시루봉에 형성된 유적지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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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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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노고단 선교유적지

지리산 선교유적지는 구한말 우리나라 개화기인 1895년부터 시작된 미 남장로교의 선교역사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던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곤란한 것이 풍토병(말라리아, 학질, 이질 등 수인성 전염병)이었다. 당시 선교사와 가족 67명이 사망한 것에서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에 선교사들이 질병 치료와 휴식, 그리고 재충전을 위하여 1922년 지리산 노고단에 수양관을 설립하였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한글 문법책을 만드는 등의 활동도 병행했다.

1935년 ‘풀턴 선언(Fulton Declaration)’을 통해,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자 총독부에서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광주 수피아, 숭일, 목포 정명, 영흥, 전주 신흥, 기전학교)를 폐쇄되고, 1940년 선교사들을 강제 출국시켰다.

6·25를 겪으면서 대부분 훼손된 선교유적지를 인요한 박사의 아버지 휴 린튼(인휴) 목사가 지리산 왕시루봉 일대에 1961년부터 목조와 토담집 등으로 복원하였는데, 현재 12동의 건물이 남아 선교사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지리산 선교유적지는 2013년 1월 제10회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상’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14년에는 (사)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사이에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 보전과 운영을 위한 신탁협약서’가 체결되었다. 지리산 선교유적지가 영구 보존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지난 1월 30일, 순천시 남내동 황금로 패션상가 거리에 손동인·손동신 형제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표지판이 세워졌다. 표지판이 세워진 이곳은 옛 순천경찰서 뒷마당이 있던 곳으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故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당시 24세)·동신(19세) 형제가 총살당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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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순교자 손동인·동신 형제 순교지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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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율촌면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에 있는 삼부자 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은 여순사건 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좌익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때려죽인 강철민을 양아들로 삼고 자신의 두 아들을 대신하여 못다 한 일을 하라고 ‘손인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손 목사 자신도 2년 뒤인 1950년 9월 28일 좌익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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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검

(가로23㎝×높이30㎝×폭10㎝,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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