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어미 호랑이의 보은
옹기를 파는 그릇점이 있어서 점촌이라고도 불렸던 서면 세동(細洞)마을은 구랑실 재 너머 마륜 맞은 편 산골에 있는 마을이다. 옹기를 굽던 가마에서 유래되었는지 지금은 마을 입구에 참숯가마 찜질방이 만들어져 눈길을 끈다.
옛날 이 마을에 가희, 나희, 다희라는 세 아가씨가 살았다.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셋은 한데 어울려 노는 재미에 도통 시집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뒷산에 올라 나물을 캔다는 명분으로 하루 종일 쏘다니기가 일쑤였다.

서면 세동마을 뒤편으로 호암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어느 날 셋이 나물을 뜯으러 골짜기와 산 능선을 헤매고 다닐 때였다. 양지 바른 바위틈에서 아주 귀여운 갓 태어난 새깨미(고양이) 새끼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커다란 구렁이가 슬금슬금 새깨미 새끼한테 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의 아가씨들이라면 구렁이만 보아도 놀라 기겁을 하였을 텐데 세 사람은 달랐다. 어느 틈에 구했는지 가희가 커다란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순식간에 구렁이를 쫓아낸 세 사람은 앞 다투어 새깨미 새끼를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깨미 새끼는 마치 어미에게 달려들 듯 세 사람의 볼을 번갈아가며 핥아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포효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호랑이 소리였다. 에그머니나. 새깨미 새끼인줄 알았는데 호랑이 새끼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나물바구니도 내팽개친 채 죽자 살자 구르고 뛰어서 마을까지 뛰어와 방으로 들어간 뒤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웅크리고 그 날 밤을 샜다.
밤잠을 설친 가희는 아침이 되자 겨우 진정하고 어제 있었던 일을 어른들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침밥을 지으려고 밖으로 나간 가희의 어머니는 어제 가희가 산에 버려두고 왔다는 나물바구니에 나물이 가득 담긴 채 마루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가희야! 이게 뭐니? 나물바구니가 왜 여기에 있어?”
가희 역시 나물바구니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에 버려두고 온 바구니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것도 나물이 가득 담긴 채로 말이다. 나희나 다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희와 다희의 나물바구니 역시 나물이 가득 담긴 채 마루에 놓여있더라는 것이다.
그날 이후 호랑이를 봤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집채만한 호랑이가 멀리서 마을을 향해 웅크린 채 앉아있더라는 이야기며, 때로는 뒷산 어귀에 널부러진 멧돼지며 노루를 호랑이가 물어죽였다는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나왔다.
처음에는 호랑이의 출현을 두려워하던 마을사람들도 차츰 호랑이가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가씨 세 사람이 자신의 새끼를 구해준 것을 알고 보은을 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멧돼지며 노루도 물어다놓고 가끔 나물바구니도 채워놓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마을사람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을사람들은 생업에 열중했고 아가씨들 역시 예전처럼 나물을 따러 뒷산에 오를 수 있었다. 심지어 호랑이가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에 산에 오르는 일이 무섭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희의 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멀쩡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자고 일어나더니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의원 역시 알 수 없는 병이라며 손을 놓아버렸다. 그런 아버지를 보다 못한 나희가 뒷산 어귀에서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희와 다희 역시 나희 곁에 앉아 슬피 울었다.
다음날 아침 나희는 부뚜막에 놓여있는 풀을 힐끗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보통의 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의원을 불러 물어보니 백년도 넘은 산삼이었다. 서둘러 산삼을 달여 아버지께 드리니 나희 아버지는 씻은 듯이 나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랑이가 한 일이 분명했다.
마을 어른들은 마을에서 생산한 옹기가 일정 분량이 되면 광양이나 순천 읍내에 내다 팔았는데, 돌아오면 항시 늦은 밤이었다. 어느 날 어른들이 없는 틈을 타 불한당이 쳐들어왔다. 불한당을 처음 발견한 다희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데 불한당이 갑자기 걸음아 나살려라 하면서 도망을 쳤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호랑이는 마을 어른들이 안 계시면 마을을 지켜주기 위해 마을 앞 낮은 산에서 밤늦게까지 바라보며 지켰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마을 뒷산을 호암산이라 부르고, 마을로 접어드는 입구에 있는 큰 바위를 범바구라 부른다.

세동마을 입구에 있는 범바구. 마을 어른들이 옹기를 팔러 나갈 때 마을 어귀에 앉아 마을을 지켰다는 호랑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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