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애 끓는 상여소리
고흥군 두원면 내당리에 신맹희(申孟熙)의 처 영광정씨(靈光丁氏) 효열비가 있다. 이 효열비에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오래 전 이곳 내당리 뒤에 있는 화전산 개박골에 상여가 지나고 있었다. 여느 상여보다 슬픔이 극에 달하여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상여의 주인공이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상여의 주인공은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1374~1446)의 후손 신맹희(申孟熙)이다. 신개는 139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황해도,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뒤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신맹희는 혼기가 되자 영성군(靈城君) 정찬(丁贊)의 후손 운대 출신 정씨(丁氏)와 혼례를 치렀다. 정찬은 공민왕 때 나라에 공을 세워 광록대부(光祿大夫)1) 영도첨의(領都僉議)2)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 고려시대 정2품 품계.
2) 고려시대 도첨의부의 최고관직.
명문가의 아들 딸이 결혼을 하여 고흥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이들을 시기하였는지 혼례를 치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신맹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정씨 부인이 인근의 명의와 명약을 다 써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천지신명께 빌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정씨 부인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입에 넣어 드렸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사흘을 연명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남편 신맹희는 불행히도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랬으니 상여가 가는 길이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정씨 부인은 통곡 소리가 얼마나 원통하였겠는가. 스물도 못 되어 청상과부가 된 정씨 부인의 곡소리가 개박골을 감싸고 돌았다.
힘들게 힘들게 화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상여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사람들이 묘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하관 절차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묘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위령제가 시작되었다. 신맹희의 묘소 앞에 간단한 제수가 차려졌고 향불이 피워졌다. 그 앞에서 청상과부가 된 정씨 부인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차라리 숨어버리면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이 편해서였을까? 그나마 실낱같던 햇살은 화전산 꼭대기 쪽구름 사이로 급히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심술궂게 불어오던 회오리바람도 곤두박질하며 숨어버린 햇살을 따라 날개를 접고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3)
3) 고흥문화원 <고흥의 전설>에서 인용.
축문을 읽는 정씨 부인의 처연한 목소리가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목소리보다 더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든 것이 바로 정씨 부인의 몸가짐이었다. 슬피 울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행동거지가 더욱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다.
남편의 묘 앞에서 두 차례 절을 마친 정씨 부인이 술잔을 받아들고 잠시 묵념을 하는 것 같더니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손가락을 깨물었다. 정씨 부인의 손가락 끝에서 선혈이 뚝 뚝 떨어졌다. 그러자 주위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들여왔다. 정씨 부인의 모습이 얼마나 결연하였으면 누구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정씨 부인은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술잔에 자신의 피를 흘렸다. 드디어 술잔 속에 정씨 부인의 선혈이 가득 고였다. 정씨 부인은 그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남편의 묘소에 다가가 정성스럽게 부었다.
정씨 부인의 일은 곧바로 고흥 일대에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정작 정씨 부인은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친정으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에 시댁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친정에 간 정씨는 정작 식음을 전폐하였다. 친정 식구들이 교대로 음식을 권하였지만 정씨 부인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애야, 그래도 먹어야 산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어떻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친정 어머니가 권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아닙니다. 제 부덕의 소치로 남편이 요절하였는데 어찌 제 한 목숨 살자고 음식을 탐하겠습니까?”
친정 오빠가 나서서 윽박지르고 친정아버지까지 나서서 타일러도 허사였다.
친정에 온 지 사흘 째 되던 날, 정씨 부인은 남편의 묘소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바칠 때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막상 낭군의 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나고 키우신 부모님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정씨 부인 앞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남편이 나타났다.
“여보! 내 운명이 그러한 것이거늘 어찌 그대 또한 내 뒤를 따르려 한단 말이오. 더구나 내가 다하지 못한 효도를 당신이 내 부모님께 해드려야 하오. 그것이 내 소원이오!”
그 말을 남기고 남편이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난 남편의 모습 때문에 잠시 갈등을 겪던 정씨 부인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에요. 여보. 시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것 또한 저에게는 중요하답니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기어이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던 정씨 부인은 안채의 분위기를 살폈다. 친정 부모님께서 곤히 잠드신 것이 분명하였다.
살며시 방을 빠져 나온 정씨 부인은 어둠을 뚫고 부모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불 꺼진 방을 향해 정씨 부인이 마음속으로 고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못난 이 딸을 용서하세요. 백 번을 다시 생각해도 남편만을 섬기며 일부종사 하라 하신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이 길 뿐이라 생각합니다.’
마당에서 부모님께 마지막 하직인사를 하며 정씨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비록 출가외인이라 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불효를 행하려 하니 송구한 마음 가눌 길 없었기 때문이다.
정씨 부인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땅바닥에 쓰러지고 또 쓰러졌다. 정씨 부인은 마치 자신의 가슴을 천 근 만 근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결국 정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는 것도 불효지만 부모님 가슴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는 것이 더 큰 불효라 생각하고 구천을 헤매다 자신에게 나타나 부모님께 대신 효도해달라던 남편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정씨 부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시댁으로 돌아가 시댁 부모님을 모시고 평생 수절하며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정씨 부인은 조카 신갑균(申甲圴)을 양자로 맞아들여 대를 이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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