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굴비 이야기
‘영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굴비’다. 그런데 ‘굴비’ 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바로 ‘자린고비’이다.
조선 광해군 때 류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자린고비 이야기가 나온다.
충청도 충주지방에 고비(高蜚)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지독하게 아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아꼈는지 부모 제사 때 지방(紙榜)을 쓰는 종이도 아까워 한 번 쓴 지방에 기름을 먹여 계속 썼기 때문에 ‘절인’이라는 별명이 이름 앞에 붙었다. 그래서 ‘절인고비’라 부르던 것이 ‘자린고비’가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사전에서는 자린고비의 한자가 자린고비(玼吝考妣)라 되어 있다. 고비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일컫는 말인데, 어원에 대해서는 다툼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자린고비의 주인공은 실존 인물이다. 바로 조선 숙종((肅宗 1661~1720) 때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증삼마을에 살았던 조륵(趙玏)이다.
하루는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 날아가자 조륵이 쫓아갔다. 쉬파리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200리가 넘는 단양 장벽루까지 쫓아갔다.
무더운 여름, 부채를 사다 놓고는 부채를 부치는 것이 아니라 부채가 닳을까봐 벽에 부채를 매달아놓고 머리를 흔들었다는 이야기 역시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이다.
조륵의 자린고비 삶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져 하루는 생선장수가 왔는데 며느리가 생선은 사지 않고 생선만 만지작거리다가 들어와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였다고 한다. 그러자 칭찬을 할 줄 알았던 시아버지가 “물독에다 손을 씻었으면 몇 끼를 더 먹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전라도에서 유명한 구두쇠가 조륵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하룻밤을 묵고 가는데 문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저녁 때 밥풀을 남겼다가 자신이 가져온 창호지 조각으로 바람구멍을 막고 잠을 청하였다.
다음날 아침, 전라도 구두쇠가 길을 떠나면서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 것이니 가져가겠습니다.“ 하고는 창호지를 뜯어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전라도 구두쇠가 창호지를 뜯어 집을 나선 뒤 한 5리쯤 가고 있는데 조륵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보시오! 종이에 붙은 밥풀은 내 것이니 놓고 가시오!”
그러더니 전라도 구두쇠에게 창호지를 건네받아 칼로 밥풀을 긁어내더니 가지고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아끼고 또 아낀 덕분에 조륵은 환갑 나이에 만석꾼이 되었다. 인색한 삶을 산 탓에 조륵은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는데, 환갑이 되던 날 그 동안 억척스럽게 모은 재산을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이에 여기저기에서 송덕비를 세웠는데 송덕비에는 ‘자인고비(慈仁考碑)라 새겨져 있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을 하였으며, 자신이 죽으면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자식에게는 아무런 재산을 남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륵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굴비 이야기일 것이다. 조륵은 제사에 쓰고 난 조기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반찬 삼아 밥을 먹도록 하였다. 식구들이 어쩌다 두 번 이상 쳐다보면 “얘야, 너무 짜다!”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말린 조기를 굴비라 부른 것은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 ?~1126)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17대 왕 인종(仁宗 1109~1146)의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1122년 예종(睿宗 1079~1122)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14세의 어린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이모가 되는 자신의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권력기반을 더욱 더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의 전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인종이 측근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1126년 이자겸은 척준경(拓俊京 ?~1144) 등과 함께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척준경의 배신으로 이자겸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정주(靜州)1)로 유배를 가게 된다.
1) 지금의 영광.
개경에 있을 때 이자겸은 간혹 조기를 먹어보기는 하였지만 유배를 온 정주에서는 조기가 많이 잡혀 조기를 정말 많이 먹었다. 조기가 잡히는 철에만 먹는 것이 아니라 소금에 간하여 말려서 먹기도 하였다.
비록 난을 일으켜 귀양을 보내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두 명의 이모이자 부인의 아버지인 이자겸을 계속 유배지에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종이 몰래 사람을 보내 죄를 인정하면 용서해주겠노라고 전하였다.
그런데 이자겸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대답은 하지 않고 말린 조기를 정성껏 싸서 임금께 바쳤다. 처음 먹어보는 말린 조기가 정말 맛이 있어서 외손자에게 먹이려는 것이었을까?

인종이 말린 조기를 열어보니 그 위에 놓인 종이에 ‘정주굴비(靜州屈非)’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뜻을 거꾸로 썼던 것이다. 결국 이자겸은 그해 겨울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오늘날 영광 조기를 굴비(屈非)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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