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상술박엉의 슬픈 사랑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5:51
여수설화

여수 삼산면 초도 의성리 건너편에 보면 동쪽으로 뻗어난 산이 있다. 그 산자락 끝에 상술박엉이라는 높은 절벽이 있는데 그 절벽 약간 옆 사각 바위에는 주먹으로 쳐서 움푹 패인 듯한 구멍이 파여 있다. 이 바위에는 오래 전부터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아주 먼 옛날, 근처 마을에 장래를 약속한 처녀 총각이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시간만 나면 사랑을 나누었다.

어느 날, 처녀가 총각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옛적에 여자가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기... 부모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허락하셨어요. 그러니 날을 잡아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

말을 꺼내놓고 부끄러운지 처녀의 볼이 발개졌다. 그런데 반색을 할 줄 알았던 총각이 어쩐 일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부담스러웠을까? 처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혼은 중대한 문제이니 조금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니, 생각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고 부모님께서도 허락하셨으면 된 것 아니에요?”

처녀가 반박을 하는데도 총각은 별 다른 대꾸 없이 먼 바다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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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총각이 점차 처녀를 멀리 하기 시작하였다. 장래를 약속한 터라 이미 몸까지 섞은 마당에 처녀는 총각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다그쳐서 그런 것은 아닌지 후회도 되었다.

사과도 할 겸 해서 총각을 찾아가던 처녀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다름 아닌 총각의 곁에 서 잇는 다른 처녀였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처녀는 얼른 몸을 숨겼다. 몰래 지켜보니 총각이 다른 처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독심을 품고 두 사람 앞에 나선 처녀가 총각에게 따졌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평생을 함께 하자더니... 그래서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피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돌아온 것은 무시였다. 총각이 처녀를 마치 투명인간 보듯 한 것이다. 차라리 뭔가 변명이라도 하면 좋을 것을... 처녀는 말문이 막혀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며칠을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던 처녀가 다시 총각을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오히려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였다. 그러니 돌아와 달라고 애원도 하였다. 하지만 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눈빛마저 험악해졌다.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평생을 함께 하자 약속하였던 다정한 그가 아니었다.

그 날 밤, 처녀가 상술박엉으로 올라갔다. 비장한 눈빛이었다. 처연한 눈빛이었다. 상술박엉 위에서 한참을 소리 없이 울던 처녀가 한순간 무심한 눈빛이 되었다. 모든 것을 놓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렇게 처녀는 상술박엉 절벽에서 자신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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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죽었는데도 총각은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지 여전히 다른 처녀와 사랑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총각이 가는 곳마다 뱀 한 마리가 나타나 따라다녔다. 다른 처녀와 만날 때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 보면 바로 옆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일을 하러 갈 때도 뱀이 나타났으며 자다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보면 어김없이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낫을 들고 뱀을 죽이려 하면 놀랍게도 뱀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죽은 처녀의 원혼이 뱀이 되어 나타났다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이 불길하다며 총각을 멀리 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뱀이 쫓아 와서 옆에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도 점차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였다. 총각과 사귀던 처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 총각은 외톨이었다.

총각은 죽은 처녀의 이름을 부르며 통사정을 하기도 하고 밤낮으로 빌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총각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도 처녀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총각이 상술박엉으로 올라가자 뱀도 따라갔다. 말없이 뱀을 바라보던 총각이 눈물 한 방울을 흘리더니 주먹으로 바위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그리고는 벼랑에서 자신의 몸을 던졌다. 놀랍게도 뱀 역시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뒤를 따랐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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