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용곡마을의 용녀총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5:49
순천설화

순천 주암면 용지리에 학관산(鶴官山, 계관산이라고도 한다)이 있고 그 산 밑에 있는 마을이 용곡마을이다. 마을 동쪽 들판에 수퉁산이라는 동산이 있는데 주암 조(趙)씨들의 선산이다. 동산 정상에 서너 계단을 돌로 쌓은 네모난 봉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녀총(龍女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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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용녀총의 모습.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학관산이다.

용지(龍池)마을과 수퉁산 사이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커다란 소(沼)가 있었는데 용소라 불렸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용지리인 것이다. 용소는 물이 맑고 깊어 마을 사람들이 여름에는 목욕을 자주 하였으며 빨래터로도 이용되었다.

 

옛날 용지마을에 마음씨도 곱고 얼굴도 예쁜 처녀가 살고 있었다. 모두들 며느리를 삼고 싶어 하였으며 총각들은 애를 태우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이 처녀가 용소에서 두 다리를 벌린 자세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치맛자락이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살펴보니 솥뚜껑만한 거북이가 치맛자락을 입으로 물고 희롱을 하고 있었다. 처녀가 빨래방망이로 거북을 밀어 젖히고 치맛자락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거북은 달아나지 않고 빨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처녀 곁을 맴돌며 아쉬운 눈짓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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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일이라 생각하였으나 빨래를 마치고 돌아온 처녀는 이내 잊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꿈에 미소년이 나타났다. “나는 마을 앞 용소에 사는 용왕님의 아들로, 낮에 빨래하는 낭자의 아리따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어 낭자의 치마폭을 잡고 희롱하였습니다. 아버님의 허락을 받고 왔으니 나의 사랑을 받아 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소년의 간청이 간절하기도 하였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훤칠한 용모에 끌려 마음을 허락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그러나 깨어보니 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 해도 너무도 생생하였다. 그래서 처녀는 비록 꿈속에서라도 마음을 허락하였기에 더 이상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 나이가 차고 혼기가 넘어도 처녀는 제 아무리 좋은 혼처도 마다하고 처녀로 늙어 죽었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처녀를 용왕댁 혹은 용녀라 불렀으며, 처녀가 죽은 후 마을 사람들이 용궁의 왕자와 결혼한 여자라 하여 마을 앞에 능처럼 커다란 묘를 만들어 용녀총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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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704년 조현범이 지은 강남악부에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어느 여름날 밤, 마을 처녀와 할머니가 용소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욕을 마치고 나서 옷을 입으려 하니 할머니의 옷을 그대로 있는데 처녀의 옷만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처녀는 한참을 주위를 찾아 헤매다 그대로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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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바라본 용녀총의 모습. 보통의 둥그런 봉분과는 달리 네모난 봉분이 눈길을 끈다.

그날 밤 처녀가 막 잠이 들려던 차에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소년이 처녀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소년은 다짜고짜 처녀를 범하였으며 처녀는 졸지에 소리조차 치지 못한 채 정절을 잃고 말았다.

처녀는 다음날부터 문고리를 잠갔다. 하지만 소년이 찾아오면 문고리가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닌가. 처녀가 소리치면 어른들이 뛰쳐나왔으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처녀의 옷이 벗겨지고 처녀는 계속해서 겁탈당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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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은 후 처녀는 아들을 두 명 낳았는데 낳은 아들마다 조금 자라면 행방을 감춰버렸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처녀를 범한 소년이 용왕의 아들일 것이라고 수군거렸고 처녀가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죽자 처녀를 용왕댁이라 불렀다고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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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만 남은 용소의 모습. 용지마을과 용녀총 사이에 있었다는 용소는 개발의 여파로 이제 흔적이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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