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겨 보는 설화 상사바위의 슬픈 사랑

한국설화연구소
2024-12-23 15:45
무안설화

무안군 일로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우비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영산강 쪽으로 바위 한 쌍이 우뚝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相思)바위라 부른다.

백제 때 이 마을에 황 부자가 살고 있었다. 황씨는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였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들이 없이 딸 하나라는 점이었다. 황씨의 딸 나은이는 외동딸인데다 미모마저 뛰어나 나이가 들자 서로가 며느리를 삼으려고 인근 고을에서 매파를 보내기도 하였다.

 

어느 날 나은이가 영산강으로 굴을 따러 갔다. 말이 강이지 바다와 인접하여 있어서 나은이가 살고 있는 마을은 바닷가나 마찬가지였다. 부잣집이어서 아쉬운 것은 없었지만 나은이는 가끔씩 굴을 따거나 해산물을 채취한다는 핑계로 외출을 하였다.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말리던 나은이의 부모도 나은이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히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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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만 있다가 강변에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였다. 나은이는 굴을 따러 왔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동안 강변 둑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전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강가 바위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굴을 따기 시작했다. 굴 따는 도구를 놀릴 때마다 싱싱한 굴이 찍혀 나왔다. 굴 따는 솜씨를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는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굴을 차려 드려야지.”

부모님 상에 자신이 직접 딴 굴을 올릴 것을 생각하니 나은이는 절로 신이 났다. 그러다 보니 바구니 가득 굴을 땄지만 더욱 욕심이 생겼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물에서 50c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에 굴이 정말 다닥다닥 많이도 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굴이 참으로 소담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꼭 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은이가 치맛단을 부여잡고 살짝 뛰어 바위에 오르는데 바위에 이끼가 끼어 있었는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으악!”

나은이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미끄러지더니 그만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은이는 따스한 온기가 자신의 몸을 깨우는 느낌을 받았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놀랍게도 자신의 주변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강물에 빠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찌된 일이지? 나은이가 고개를 들어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모닥불 건너에 잘 생긴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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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스런 얼굴로 나은이를 바라보고 잇던 청년이 말하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요.”

청년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나은이가 정신을 차린 것을 알게 되자 나고 청년의 얼굴은 금세 환해졌다.

의아해 하는 나은이에게 청년이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었다.

청년은 이웃 마을인 각골에 사는 추씨의 아들 지환이었다. 마침 강변에 산책을 나왔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여인의 비명이 들려 달려와 보니 나은이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환이가 나은이를 구해냈을 때 이미 나은이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편평한 이곳으로 안고 와 살려냈다고 한다.

지환이의 이야기를 듣던 나은이가 그 대목에서 갑자기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그러자 지환이도 무엇이 부끄러운지 얼굴이 발개졌다.

지환이 덕분에 살아났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였기에 우선 불을 피워 젖은 옷을 말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은이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몸과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몸에는 남자의 옷이 입혀져 있고 모닥불 주변에는 자신의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은이가 지환의 뺨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러나 지환의 뺨을 때리는 나은이의 표정이나 목소리, 눈빛을 보건대 기분 나빠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다 큰 처녀로서 뭔가 그렇게라도 해야만 될 것 같은 본능적인 행위였다. 지환이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뺨을 맞고도 개의치 않았다.

“정말 하늘의 도우심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지환이의 말을 듣고 나은이는 ‘아니에요. 당신 덕분이에요’고 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아무 말없이 있던 나은이가 감자기 눈물을 흘렸다.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지 지환이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낭자, 내가... 내가 무얼 잘못 했소?”

“아니에요. 정말, 정말 감사한데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요.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게요.”

홍조 띤 나은이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달빛에 반사되어 마치 수정처럼 빛났다.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과분한 말씀을 하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지환이의 의연하고 겸손한 태도에 나은이는 묘한 매력을 느꼈다.

찰랑거리며 조용히 속삭이는 강 물결 소리, 온 밤을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그것들에 묻혀 지환과 나은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때였다. 멀리서 나은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굴 따러 나간다는 딸이 밤늦도록 보이지 않자 황부자 집에서 사람들을 모아 나은이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나은아!”

“나은 아가씨!”

나은이를 찾는 목소리에 이어 멀리서 횃불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은이는 지환과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횃불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사흘 뒤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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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두 사람은 몰래 만나 사랑을 꽃피웠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사흘에 한 번씩 만났는데 이제는 단 하루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매일 바깥 출입을 하다 보니 결국 부모님께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평범한 집안 출신의 지환이를 황부자가 반길 리 만무하였다. 집안 이야기를 듣자마자 황부자는 두 사람의 만남 자체를 막았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죽겠다며 버티는 나은이를 막을 수 없었다. 금지옥엽 외동딸을 가난한 집에 시집보내는 것이 못마땅하여 황부자는 지환에게 돈을 많이 벌어오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지환이는 나은이와 결혼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않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어려서부터 어업으로 잔뼈가 굵은 데다 그물을 던지는 솜씨가 있는지라 벌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황부자는 지환이에게 그렇게 푼돈을 벌어서 언제 부자가 되겠느냐 구박하였다.

 

어느 날, 지환이는 영산강을 따라 서해 바다에까지 나아가 물고기를 잡아오겠다고 하였다. 이웃에 사는 사람이 큰 돈벌이가 된다며 유혹을 하는 바람에 지환이가 흔들렸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나은이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앞서, 위험하다며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떠난 지환이는 떠난 지 34일이 되어서야 소식으로 돌아왔다.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떠났던 각골 사람이 돌아왔는데, 서해에서 조업을 하던 중 큰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모두 사망하였다는 것이었다.

나은이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서도 나은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같이 강변 바위에 나가 울며 지냈다. 당장이라도 지환이가 탄 배가 안개를 헤치고 다가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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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이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천지가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그 먹구름 속에서 한 줄기 번갯불이 나은이가 서 있는 바위 밑에 비치더니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천둥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강물 위에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더니 그 속에서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 나은이를 감고 유유히 물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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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전해들은 나은이 부모가 강변에 이르자 두 마리의 큰 구렁이가 물속에서 나타나더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마을 사람들이 강둑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태연하게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풀 줄 몰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환이와 나은이의 못다 한 사랑 때문에 원혼이 구렁이로 변한 것이라 믿고 두 사람의 혼례를 치러주었다. 그러자 구렁이 두 마리는 몸을 풀고 나은이 부모를 향해 인사를 한 후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못다 이룬 두 남녀의 사랑을 애틋하게 여겨 이 바위를 상사(相思)바위라고 불렀으며, 이 바위는 일로읍 청호리 영산강변에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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